당신이 있어서

깊은 울림

by 최빛글

일주일 후면 내 할아버지 기일이자 조상님 제삿날이다. 세태의 흐름에 따라 우리 집도 10여 년 전부터 할아버지 기일에 여섯 분을 합동으로 모신다.

할아버지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굴곡 있는 삶을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잣집 도련님에서 머슴살이를 거쳐 부농으로 거듭났으니 하는 말이다. 농사에 대한 철학과 교육에 대한 신념이 확고해서 혼자 힘으로 기울어진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였다. 그 덕택으로 현재의 우리가 있고, 또한 미래의 후대들이 성장해 나갈 터전이 마련되었다.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남기고 귀감이 되는 인생'을 살았다.


그는 1906년에 태어났다.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그다음 해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우리 성씨가 많은 집성촌이다. 험하지 않은 산을 의지하여 집들이 자리하고 있고, 앞에는 상당한 크기의 저수지가 있는 농촌 마을이다. 뜰이 그다지 넓진 않지만, 골짝 굽이굽이 산밑 자락에 논밭들도 상당하다.

여기서 윗대 할아버지에 관해 잠깐 얘기하고자 한다.

고조할아버지는 큰 서당의 훈장이었고 이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에 꽤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지식과 재산을 가진 영향력 있는 유지였다는 얘기다. 증조할아버지는 그런 고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한데 돌연 예기치 않은 일로 가정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행세하고 부러움을 샀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증조할아버지는 2남 2녀를 두었고, 영민하고 재주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학문에서는 외우는 능력과 깨달음이 남달랐고, 바구니, 짚신이나 새끼줄 꼬는 것까지 생활 물품을 만드는 데도 그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 증조할아버지가 뭔가 이해되지 않는 돌발 행보를 한다.

1914년 되던 해 어느 날, 집 한 칸만 덩그러니 남기고 모든 재산을 청산해 현금으로 바꿔서 남원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열흘이 못 되어 삶의 터전인 고향과 어린 자식이 있는 가족을 뒤로한 채 파랗게 변한 주검이 되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주변에서는 말이 많았다. ‘기생을 봐서 기둥서방에게 독살당했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뒷줄을 대다 죽었다’는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일제 치하에서 일련의 과정을 솔직히 말하고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집안에서는 단순히 기생을 봐서 그렇게 된 것으로 포장해 버렸다. 할아버지도 처음엔 그렇게 말했지만, 나라가 해방되고 시간이 흐른 뒤 나중에는 바뀐다.

당시 상황에 대한 그 나름의 진실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일반적 가정사로 치부해야 일제하에 살아남을 수 있어서 당시의 어른들께서 그렇게 하신 것 같다. 할머니께서 가끔 어린 나를 붙들고 ”네 아버지는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좋은 일 하다 그렇게 되었다 “고 말씀하셨다. 무언가 나라를 위해 일하시다 일본 공작에 의해 어떤 여인에게 독살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 시기가 191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나라를 잃었다는 울분과 좌절감에 휩싸인 시기이지만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씨앗이 하나씩 진행되고 있을 무렵이기도 하다. 따라서, 만세운동을 위시해 계몽 교육, 무장투쟁에 필요한 단체 조직과 활동을 위한 준비와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자금 마련은 그 디딤돌이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그런 선구자이실 수 있다. 의기가 강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건전한 사고의 지식인이셨고,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지내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이 일어서야 한다 “고 자주 말씀하셨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할아버지의 이런 솔직한 말은 그 때의 상황에 비춰서 상당한 근거와 타당성을 가진다.

그는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살림이 바닥난 상황에서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이어 간다. 그러다 열한 살에 할머니, 열세 살에 어머니를 여의게 된다. 집안의 중심이고 미래의 근간인 가장이 없으니 가정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그 충격 끝에 시름시름 한 분씩 생을 마감했다. 이어서 윗누이 두 분은 팔려가듯 시집을 가고, 남동생을 데리고 급기야 머슴살이를 시작한다. 도련님에서 머슴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였고 농경사회라 의식주 해결이 힘든 시절이었다. 부쳐 먹을 다랑논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에 속했다. 대부분은 자기 땅이 없어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그런 시기에 할아버지는 인근 마을의 중소지주에 의탁하며 동생과 함께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원래 집안이 인심과 평판이 좋았던 터라 형제를 잘 받아주었다고 한다. 작은 일부터 하나씩 농사를 배우고, 신체가 성장해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새경(임금)도 받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성실했고, 거기다 구구단을 스스로 터득할 정도로 셈이 빠르고 암기력이 좋았다. 그래서 고용한 지주는 곡식을 팔고 물건을 사 오는 장날이면 꼭 할아버지를 데리고 가서 일을 맡겼다고 한다. 빠르면서도 정확히 계산하고, 실수 없이 일을 꼼꼼히 처리하는 '능력'을 인정받은 까닭이다.

배우는 자세로 성실히 일하며 시간은 흘렀다. 이젠 어느 때가 되면 어떤 종류의 씨앗을 뿌리며, 물과 거름 양을 조절해 어떻게 작물을 키우고 거둬들이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좋은 질의 곡식과 채소를 길러낼 수 있는 영농 기술도 터득했다.

농사일과 농산물의 유통과정을 익힌 후, 할아버지는 동생과 함께 일터와 주거지를 옮긴다. 이곳은 넓은 뜰과 햇볕이 잘 드는 큰 마을로 일찍이 할아버지의 작은아버지가 터를 잡은 동네이다. 후일 할아버지의 터전이 되고, 아버지 형제를 비롯한 우리 남매의 고향이 되는 곳이다.

핏줄인 어른이 있는 곳이라 뜻대로 일이 잘될 것 같았지만 그리 순탄히 풀리지만은 않았다. 할아버지 동생이 자주 어울리던 사촌들의 괴롭힘과 이름 모를 질병으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았다. 그때 동생의 나이는 불과 열대여섯 살이었고, 앓은 지 채 며칠도 안 돼 변을 당했다.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제 시집간 누이 둘 외에 홀 홀 단신이 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이를 악물었다. 쓰리고 아픈 현실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할아버지의 작은아버지에게도 더는 의존하지 않았다. 모든 걸 자신의 계획과 행동으로 하나씩 만들어 갔다. 내면을 켜켜이 쌓으며 성숙된 계기로 거듭났다.

날품팔이와 나무꾼에서 소달구지도 끌어보던 할아버지는 드디어 산밑 귀퉁이에 초가집 하나와 조그만 농토를 장만했다, 온갖 어려움과 긴 항해 끝에 평화로운 작은 섬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땅을 가진 정착 농이 되자 송아지도 기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농사의 근간과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초'가 튼튼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밤낮으로 남들보다 훨씬 더 부지런히 일했다. 밤으로는 바구니, 망태 등 농사와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짜고 엮어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다음날엔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소에게 여물을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몸소 습득한 경험과 지극 정성의 영농'으로 차츰 살림을 늘려갔다.

어느덧 농사 규모도 더 커지고 20대 후반에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열 살 연하의 할머니와 혼인하여 가정을 이뤘다. 당시 할머니가 할아버지 외가 마을에 산 것으로 보아 외가 친척이 중매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정을 이루면서 할아버지의 작은아버지로부터 예전에 머슴살이를 시작하며 맡겨두었던 살림 가재도구를 찾아왔다. 삼 분의 일로 줄어들고 값비싼 물건은 거의 없어졌지만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으로나마 의지할 핏줄이 없었던 처지에서 내린 어쩔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 후 농사를 더 열심히 하고, 송아지를 어미 소로 길러 파는 순환과정을 통해 목돈이 생기면 논과 밭을 사들였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원하던 ''이 마련된 것이다. 마을에서 두 집 밖에 없는 솟을대문이 있는 가옥으로 이사했다. 너른 들녘이 바라다보이는 동네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여기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집이다. 땀과 눈물이 보람으로 나타난 것이고, 뼈 깎는 고통을 이겨낸 '노력의 결실'이었다.

제대로 된 삶의 터전을 잡자, 꾸준히 소를 기르며 농사를 확장하였고 살림은 나날이 윤택해졌다. 외롭고 힘들었던 긴 시간이 가고 희망과 그 열매로 펼쳐질 삶이 햇살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처남이 셋 있었는데 모두 같은 마을로 이주시켜 돌봐주었다. 그러다 보니 처남들도 어려운 살림이 조금씩 나아졌다. 농번기에는 농사일이 많은 우리 집에 와서 일해 주면 알아서 좀 챙겨준 것 같았다. 서로 돕고 사이좋게 산 것이다.

‘나눔’을 행동으로 보였다. 어렵고 힘든 세월을 살다 보니 주변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자립하도록 도와주었다. 비단 처남뿐만 아니라 마을의 품팔이하는 사람들도 불러다 일을 하게 해 주고, 상당히 넉넉한 품삯으로 보상해 주곤 했다.

내가 아홉 살 무렵까지 우리 집에 머슴이 있었는데 그 머슴에게도 남들보다 후하게 새경을 보내 줬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사람 중심의 생각'을 몸소 실천한 경우로, 인격과 인간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자기 이익에만 급급한 요즘같이 각박한 세태에 너무도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나라가 주권을 되찾은 후, 살림이 안정되고 튼튼해지면서는 향교를 출입한다. 사교와 더불어 장래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과 혼인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이즈음 본인의 자식들이 학령기에 접어들면서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근처 학식 있는 분을 초빙하여 집안에 서당을 개설해 교육에 힘썼기 때문이다. 이때 상당한 아이들이 이 서당에서 수학한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는 물론 인근 마을의 연세가 지긋하신 몇몇 분은 지금도 ”산 넘어서까지 이 서당을 다녔다 “고 당시를 회고하는 데서 알 수 있다.

할아버지는 무학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나이에 집안의 풍파를 겪었으니 학교는커녕 살기 위한 투쟁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아홉 살까지 서당에서 배운 명심보감과 천자문이 전부다. 그것도 글자는 모르고 일부 글귀와 뜻만 기억한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기억하고 있는 글귀와 전해 들은 여러 가지 교훈적 말을 경우에 맞게 응용하여 잘 활용했다. 게다가 셈법은 물론 한글도 스스로 깨쳤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 향교 지기 들은 “000 씨가 무학이라고? 아니야, 그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이고 인격자야”라고 할아버지를 평했다고 한다.

슬하에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향교를 통해 교류하던 지기의 집안과 고모 셋을 혼인시켰다. 지혜로운 판단과 외교력으로 무난하고 좋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고모들은 그렇게 혼인해서 다복한 가정을 이루어 잘살고 있다.

3남 중 아버지는 지방 공무원과 시의원을 지냈고, 큰 작은아버지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 지휘관이 되었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건설업에 종사한다. 이만하면 시골에서 자식들도 잘 키운 셈이다. 할아버지의 의지와 교육열, 학구열 덕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기가 보급되기 전에는 밤을 밝히기 위해 주로 석유를 이용한 호롱불을 등불로 썼다. 할아버지는 이 시기에 석유 기름을 팔아서 살림을 늘렸고, 담배 가게도 운영했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으며, 건전한 재산증식에 밝았다. 뭔가 '앞서가는 경영자'였다.

그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 산과 밭, 논을 다 합쳐 상당한 부농이 되었다. 000씨 땅을 밟지 않으면 동네를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 일이 그렇듯,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10 년째 당뇨로 투병 중이던 할머니가 1976년 환갑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족은 물론 주변에서도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고생만 하고 미처 편안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 채 이른 나이에 작별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인생의 동반자를 떠나보내며 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모습은 진한 슬픔과 외로움을 애써 감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 번의 '가슴 아픈 일'이 그렇게 지나갔다.


어느 정도 탄탄한 집안을 만들었으면서도 할아버지는 79세 되던 해(1984년)까지 지게를 지고 밭에 거름을 내기도 했다. 나는 이때 늦깎이 공부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부대끼며 정담을 나눌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내 살갑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그해 가을 어느 날, 동네 앞 들판을 거닐던 할아버지는 무르익은 벼의 주인인 양 참새떼를 쫓고 있는 허수아비 곁에 멈춰 섰다. 너른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결치고, 붉은 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과 함께 기력이 쇠하고 늙어버린 자신을 비춰 보았다. 이젠 평생 해온 농사일을 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한 편의 인생 영화를 가슴 깊이 절절히 감상하고 난 사람의 심정이랄까. 가실 길 없는 공허함을 가슴에 묻고, ‘허 험’ 헛기침을 허공으로 날렸다. 농사일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직장으로 따지면 70년을 전념하였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아닐 수 없다. 불굴의 '굳은 의지'로 다져진 할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손을 놓은 지 3년 이 되던 해인 1987년 2월, 할아버지는 82세에 먼 곳으로 떠났다.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산업화시대까지 슬기롭고 역동적으로 산 곡절 많은 인생역정이 막을 내렸다.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다복한 가정을 이뤄냈다.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집안으로 성장시켰으며, 본인 자신도 널리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 특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삶의 지혜들을 가르쳐주었다. 그의 인생은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모범적 삶'이었고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집 앞 작은 언덕 위에 꼿꼿이 서서 농사일로 사람을 불러대거나 자식과 손자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머리를 쓰다듬고 귀를 만지며, 긴 수염의 얼굴을 내 얼굴에 비벼 주던 할아버지!

하늘에 별이 총총한 까만 밤, 할아버지별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둘 헤아렸다. 이내 혼자 중얼거리듯 불러보았다. “할아버지, 부디 다른 세상에서는 할머니와 오붓이 평안하시고 행복하세요” 대답은 뭉클한 가슴에서 메아리쳐 울렸다. 코끝이 찡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아버지가 살면서 흘렸을 수많은 슬픔과 기쁨의 눈물을, 오늘은 내가 '그리움의 눈물'로 훔쳤다. 유난히 그분이, 그분이 무척 그리워지는 밤이다.

< 남기고 싶은 말/살아있는 할아버지 말씀 >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할아버지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잤다. 잠자리에서 들려주시던 가르침의 말씀은 평생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고,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있다. 그것은 예절과 도리, 할아버지와 윗대 조상님에 대한 말씀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몇 가지만 정리해 보았다. 모두가 아는 평범한 얘기일 수 있으나 생활 속에 실천하고 행동 양식으로 습관화하기엔 쉽지 않다.


먼저 ‘식사예절’ 부분이다. 음식을 먹는 중엔 말을 삼가고 음식물이 입 밖으로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반찬은 위에서부터 먹고 뒤적거리지 않도록 하고, 지나치게 쩝쩝거리거나 후루룩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한다. 밥을 남길 때는 뒷사람을 생각해 깨끗이 먹고 정리해줘야 한다.

식사량은 적게, 약간 부족한 듯 먹어야 건강하다. 학이 천 년을 사는데 위의 7할만 채운다고 한다.

윗사람을 존중하고 집안 조상과 어른을 모시는 것은 사람의 기본 ‘도리’이니 소홀함이 없도록 한다. 길거리에서 어른을 만난 경우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안부를 묻고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한다, 실내에서는 절을 하여 예를 갖춘다. 특히 친구나 친척 집을 방문했을 때는 반드시 어른들께 절을 해야 한다.

‘몸가짐’을 바로 한다. 옷은 단정하고 깨끗해야 하며, 몸은 자주 씻어 청결히 한다. 소금은 치아를 소독해 주니 양치는 소금으로 하는 것이 좋다. 신체는 부모와 조상이 내린 것이고, 자기 몸이 있어야 세상이 있는 것이니 ‘건강 돌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걸음’을 걸을 땐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어야 한다.

‘술’에는 장사 없다. 어떤 경우에도 취하여 실수하지 말고, 과음하지 않도록 특히 경계한다.


‘말’은 항상 조심스럽게 하고 정중히 하여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되, 경우에 따라선 옳은 일에는 강하고 힘 있는 말투도 필요하다. 같은 말을 여러 번 얘기하지 않고, 아무리 화가 나도 욕설은 절대 삼가도록 한다.

‘나라’ 없는 국민은 생각할 수 없다. 국가가 필요해 나를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야 한다. 따라서 사내는 군대를 다녀와야 하고 그와 더불어 여성은 아이들과 가정을 잘 돌봐야 하는 것이 ‘기본적 역할’이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 ‘사람은 사람과 살아가는 것’이니 한 개를 받으면 한 개 이상을 줄 수 있도록 애써야 하고, 줄 때는 받을 걸 생각하지 말고 건네야 한다. 또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야 그것이 복이 되어 돌아온다. ‘이웃과 사람’을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하늘에 떠오른 무지개를 보며 희망을 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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