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로바이러스

좋은 사람 좋은 사이

by 최빛글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삶을 엮어가며 순간과 상황에서 많은 일들을 겪는다. 어쩌면 사건의 연속 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친척이나 지인에게 부탁을 하는 경우도, 부탁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한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건, 상호 간의 믿음과 쌓아온 정리가 크게 작용함을 알게 된다. 여기에 부탁한 일의 성패 여부가 달렸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도 딸의 둘째 아이 노로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이 같은 일을 직접 겪었다. 그로 인해, 가족의 소중함은 물론 좋은 사람과 그 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새기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언니의 든든함과 그 혜택을.

딸의 둘째 아이는 이제 갓 돌이 지났다. 이 애의 이름은 ‘현송’이고 우리 부부에겐 둘째 손녀다. 아이가 성장해 가는 시기에 따라 그렇듯, 현송이도 요즘 뭔가를 배워가며 한창 예쁜 짓을 많이 한다. 귀엽고 앙증맞다. 현송이 보다 두 살 위인 첫째 ‘현서’는 올해 다섯 살로 근처 어린이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언니 반에 다니고 있다. 학교로 보면 최고 학년인 셈이다.

자매가 같은 어린이집에 등 하원을 함께 하다 보니, 현송이는 든든한 언니가 있다고 생각한 탓인지 요즘 표정이 무척 밝다. 집에서도 현송이는 책, 장난감, 동요 기타 놀이 등에서 언니가 하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익힌다. 그러다 보니 또래 아이들보다 학습 발달이 빠르다. 이건 순전히 가족 모두가 인정하는 ‘언니, 현서의 효과’다.

아이들은 우리의 웃음이요, 삶의 양념이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 사는 아내와 내가 1년에 대여섯 번 서울에 가는 목적은 거의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다. 아이들과 있는 동안은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사는 즐거움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어느 날 자정을 넘은 2시경 아내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울렸다. 전날 저녁에 현송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는 불안한 예감과 함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격앙되어 있었다. “엄마, 현송이가 열이 심하고 계속 토해서 병원 응급실에 왔어요. 아마 입원시켜야 할 것 같아요.” 딸의 얘기를 들은 아내는 놀라면서도 흥분을 가라앉히며, “지금 애 상태는 어떻니?”하고 물었다. “일단 응급조치는 해 주셨는데, 계속 칭얼대며 우네요.” 딸은 사실을 전하며 덧붙였다. “입원하게 되면 오늘은 휴가를 얻을 수 있어 괜찮은데 내일이 문제네요.” “내일은 저도 계약 등 중요한 일이 있고, 현서 아빠(사위)는 헌팅(영화, 드라마에서 촬영할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 있어서 둘 다 시간을 낼 수 없어 큰일이에요.” 딸 부부는 드라마 제작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어 바쁠 때는 일과 중에 개인 시간을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당장 입원한 애를 돌봐줄 도우미를 구하던가, 아니면 가족 누군가가 도와줘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현서가 아플 때나 현송이를 낳았을 때도 상당 기간 딸 집에서 애를 돌보고 가사를 도와줬던 아내는 뜻밖의 일에 새삼 애가 탔다.

명절이 코앞이라 서울 가는 차표는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려오는 차표가 없어서 발이 묶일 것이다. 이리저리 궁리해 봐도 고민만 될 뿐 뾰족한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오늘은 시간을 벌어 보고 나름대로 해보겠다는 딸의 얘기를 듣고 나는 출근했다.

아내는 딸을 통해 현송이가 겨울철에 유행하는 노로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음을 알았다. 구토와 설사, 발열 및 근육통을 일으키는 전염성 바이러스의 심각성을 인식하며 아내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명절을 맞아 전해줄 물건이 있어 여동생(처제)을 불렀는데 올 때가 되었던 까닭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리고 동생이 집에 들어섰다. 아내는 동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딸의 상황도 말하게 되었다. 절박하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들은 처제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이번 설에는 우리가 서울로 가서 아들과 함께 보내기로 했거든, 하루 일찍 올라가서 내가 현송이 봐줄게.” 처제의 아들(조카)도 내 딸 부부와 비슷한 일을 하며 서울에서 지내고 있는 터이다. 아내는 번거롭고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동생의 흔쾌한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니,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조카가 실시간 검색하여 차표를 구해 주었고, 처제는 무사히 저녁 기차를 탈 수 있었다. 휴! 어려운 문제 하나가 생각지 않게 풀려갔다.

서울에 도착한 처제는 병원에 들러 1시간 정도 머물며 현송이와 얼굴을 익혔다. 이튿날이 되자, 미리 얼굴을 익힌 탓인지 현송이는 제 엄마가 없어도 처제와 함께 하루를 잘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오후에 또 일이 터졌다. 이번엔 현서가 배를 움켜쥐며 식은땀을 흘린다고 어린이집 선생님의 급한 연락이 온 것이다. 가뜩이나 바쁜 회사 일로 정신없던 딸 부부는 ‘현서 역시 전염되었음’을 직감하며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오늘은 도저히 회사 일에서 비켜 갈 여유가 없는 두 사람은 발을 동동 구르며 또 아내에게 긴급 상황을 알렸다. 아내는 불안하고 답답한 심정을 억누르며, 다시 전화기를 집어 들고 동생의 번호를 눌렀다. 현송이를 돌보느라 고생하고 있는 동생의 안부와 현송이 상태를 묻고 ‘현서의 돌발사태’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또 한 번의 급한 소식을 듣게 된 처제는 마침 오늘 오전 서울에 올라온 남편(동서)에게 다급한 사정을 설명하며 도움을 구했다. 동서는 10여 년 만에 만난 친구를 뒤로한 채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현서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거리가 좀 있어서 약 50분 정도 걸렸지만, 딸과 현서 아빠, 아내와 나는 그 시간이 마치 5시간처럼 느껴졌다.

현서는 처음 본 할아버지가 낯설고 어색해 잠시 울기도 했지만, 차츰 울음을 그치고 진정되었다. 동서는 현서를 달래 가며 약을 사 먹인 후, 현송이가 입원한 병원으로 갔다. 처제는 현송이와 함께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다 반갑게 둘을 맞이했다. 이윽고 현서는 동생을 보면서 심리적 안정을 되찾았고, 배에 통증이 가라앉자 이내 명랑해졌다. 현송이도 병원의 처방과 처제의 보살핌 덕분에 생기가 돌며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처제로부터 시간에 따라 펼쳐진 일련의 과정을 전해 들은 아내는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눈물’을 삼켰다. 현송이 입원으로 인한 보호자 문제도, 현서의 바이러스 전염 증상의 위급한 상황도 동생 가족의 도움으로 해결되었음을 고마워하면서…….


퇴근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온 딸과 현서 아빠는 몇 년 만에야 애들과 만난 느낌이었다. ‘마치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듯.’

현송이가 입원한 병원은 지하에 식당과 커피숍, 빵집과 같은 상당한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이다. 병원 내 시설을 이용하면 환자와 동행할 수 있어서 처제 부부와 딸 식구는 오랜만에 조금은 편안한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딸과 처제가 병원 로비에서 아이들과 노는 동안, 현서 아빠는 동서를 자동차로 바래다주었다.

처제 내외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 딸 부부는 현송이와 하룻밤 지내고 싶다는 처제의 배려에 또 한 번 감사하며 현서와 집으로 돌아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도 정신없고 혼란스러웠던 ‘길고 긴 현송이의 입원 둘째 날’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딸은 뼈마디가 아프고 찌뿌듯한 몸살기로 몸이 너무 무거웠다. 어젯밤에 현서가 또 한차례 배가 아프다며 우는 소동을 겪은 탓이겠거니 했지만, 느낌이 개운치 않았다. 딸은 힘든 몸을 이끌고 병원 갈 채비를 서둘렀다. 오늘부터는 명절 연휴여서 빨리 처제와 교대해 주기 위해서다.

세 식구가 병원에 도착하자 처제는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구토와 설사로 인해 밤새 거의 뜬눈으로 보낸 눈치다. 현송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겨야 하니 간호하는 사람의 감염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딸과 현서 아빠는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결국, 처제는 휴일 진료 병원에서 노로바이러스 감염판정을 받았다. 처제는 약을 먹고 수액을 투여받으며 잠을 푹 잔 다음,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비교적 빨리 회복되어 그나마 다행이야.” 아내와 나는 처제 부부에게 수고에 감사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며 후일 맛있는 식사를 약속했다.

한편 처제가 다른 병원에서 치료 중일 때, 딸은 근육통과 몸살기가 심해져 현송이를 애들 아빠에게 맡기고 현서와 집에 들어갔다. 오후가 되자 딸은 입맛이 떨어지면서 설사까지 하게 되었고, 현서는 잘 놀면서도 아직은 가끔씩 배가 아프다고 했다. 딸은 자기가 이미 감염된 것을 알고, 순간 집에 오는 길에 약국에 들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급기야 딸은 일어나고 앉을 힘도 없이 맥이 풀려버렸다. 현서의 말에 겨우 대답만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만 마시며 견디는 고통의 시간이 흐르고, 날은 어두워져 저녁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약국에 갈 힘조차 잃어버린 딸은 안 되겠다 싶어 집에 있는 약상자를 뒤져 몸살감기약을 먹었다. 약 성분이 비슷했을까? 강한 의지가 작용한 탓일까? 딸은 차츰 설사와 근육통이 잦아들고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자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은 딸은 현서와 인근 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고 처방에 따른 약을 먹은 후, 현송이 입원병원으로 갔다. 점심때는 입맛도 어느 정도 돌아와 식사도 제법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서도 이젠 배가 아프다고 칭얼대지 않았다. 병세가 한풀 꺾인 것이다.

현송이 담당 의사는 설사가 멈추진 않았지만, 몸 상태는 거의 정상이라는 소견과 함께 내일 퇴원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오후에는 처제와 동서가 병원에 들러 애들과 어울려 줬고, 저녁 식사도 함께했다. 그 둘을 배웅하고 나자, 딸은 밀려오는 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늘 밤도 애들 아빠가 현송이를 돌봐줄 수 있어 안심되자 긴장이 풀린 데다가 지금껏 너무 많은 피로가 쌓였기 때문이다. 딸은 집에 돌아가 현서를 재우며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퇴원해도 좋다는 담당 의사의 소견을 듣고서 현송이는 아빠와 함께 드디어 집으로 돌아갔다. 현서는 동생을 기쁘게 반겨 주었고 둘은 곧바로 장난감을 갖고 놀며 즐거워했다. 이를 지켜보는 딸과 현서 아빠는 활발한 아이들 모습에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하고 포근해졌다. 딸의 가족은 평온을 되찾고 소박한 웃음이 다시 넘쳐나기 시작했다.

현송이가 노로바이러스 감염으로 입원한 지 5일 만이다.

우리는 ‘노로바이러스 감염’이라는 어렵고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명랑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노로바이러스로 인해 일어난 모든 일 들은 ‘가족의 소중함’과 사람에 대한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정성을 다해 도와준 처제 가족에게 깊이 감사한다. 딸 가족을 격려하며, 이제 모두가 더 건강하고 활기찬 생활이 되길 기대한다.

<남기고 싶은 말>

⋅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 (이태백)

⋅인간의 행실은 각각 자기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괴테)

⋅훌륭한 예절과 부드러운 언사는 수많은 어려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다. (J. 벤부르 경)

⋅스스로 타인을 신용할 줄 아는 사람을 신용하라. (리카도)

⋅기쁨을 주는 가장 가치있는 재산은 덕이다. (플루타르쿠스)


눈이 가려지고 다리가 긴 괴물이야, 아빠가 물리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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