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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남는 건 선택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by 이담록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아무도 없던 골목,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공기.
나는 그 사이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계약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계산대로라면 맞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내 안은 오래도록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아쉬움이 아니라, 묘한 어긋남에서 오는 감정이었다.
정확하게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
그런데 분명히 '이게 아닌데'라는 신호가 있었다.

아파트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며칠을 들락날락했던 복도, 거실에서 마주쳤던 낯선 햇빛,
그 집에서 나는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었다.
익숙한 얼굴을 데려가 보기도 했고,
커튼을 친 채 소파에 앉아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거기 닿지 않았다.
사람 없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가도 여전히 공허한 공간이었다.
감정이 안착하지 않는 집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도 그 감정은 잊히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몇 번이나 사라고 했지만
감정은 한 번도 그곳을 집이라 불러준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말을 외면했다.
시장 분위기, 거래량, 실거래가 흐름 같은 말들이
오히려 내 감정을 밀어냈다.
주변의 조언, 익숙한 분석표, 전문가들의 말에 나를 덮어두고 있었다.
마치 지금 느끼는 감정은 사치처럼,
지금 내리는 결정이 전부인 것처럼.
그건 무의식의 외면이었다.

결정을 접은 그날 밤,
나는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를 생각했다.
그 집을 포기한 게 아니라,
사실은 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내려놓았다는 걸,
조금 늦게 알았다.
포기라는 말 안에는 언제나 선택하지 않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 단어가 위안으로 다가왔다.
지키지 못한 게 아니라,
지켜낸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밤이었다.

우리는 늘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싶어 한다.
좋은 조건, 빠른 결정, 후회 없는 선택.
그 모든 과정에서 정작 빠지는 건
‘지금의 나’였다.
좋은 선택이라는 말에는 늘 기준이 따라붙는다.
그 기준은 언제나 타인의 언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부합한 선택은,
대체로 낯선 내가 살아가야 하는 공간이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어느 동, 몇 평, 몇 년 차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열고,
어떤 리듬으로 하루를 살고 싶은지였다.
그 마음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바라보는 풍경,
저녁을 해 먹는 부엌의 조도,
그 작은 장면들이 나를 구성한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에서 너무 작았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집을 고르는 순간에도 사람은 감정을 입힌다.
채광을 보며 기분을 떠올리고,
주방의 동선을 보며 삶의 방식을 그려본다.
창문을 열어 바람을 느껴보는 순간,
나는 그 공간에서의 내 표정을 떠올린다.
삶은 결국 반복이고,
그 반복의 무늬가 감정의 결을 만든다.
그 결이 고르지 않으면,
공간은 아무리 좋아도 나에게는 낯설게 남는다.

그런데 그 집에서의 나는,
유난히 말이 없고 웃음이 적었다.
평면도는 좋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건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지우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잘 꾸며진 인테리어 속에서 불편한 마음을 마주한 순간,
나는 그곳이 아닌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동산 앱을 지우고 나서도
오래도록 흔들리는 마음이 남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택을 후회한 게 아니라
그 선택을 할 때 감정을 무시했던 나를 돌아봤던 것이다.
그 후회는 사건이 아니라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나를 지워가며 만든 선택은,
결국 나에게 가장 불편한 기억으로 남았다.

무언가를 선택하고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면,
그건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합이 맞지 않았던 거라는 걸,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우리는 늘 이유를 찾지만,
가끔은 이유보다 감정이 먼저일 수도 있다.
그걸 인정하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조금 덜 미안해도 괜찮아졌다.

누군가는 그걸 미련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날, 그 집, 그 햇빛 아래 있었던 나를.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 나의 마음을.
그건 회피가 아니라, 이해였다.
감정이라는 언어로 말하지 못했던 선택을,
이제야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다.

집은 조건으로 고를 수 있지만,
삶은 감정으로 쌓인다.
내가 고르려던 건 집이었지만,
실은 집 안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삶을 상상하지 못한 공간은,
결국 내 삶이 될 수 없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가끔 후회가 고개를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때 네 마음은 어땠니?’
‘정말 그 공간이 너에게 다정했니?’
그 물음에 선뜻 ‘응’이라고 대답할 수 없기에,
그 선택은 여전히 잘했다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은 후회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지켜준 작은 근거가 된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감정은 남는다.
그 감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리고 그걸 기억하는 나는,
조금은 더 괜찮아지고 있다.
그날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건 집이 아니라, 나였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나를,
지금은 조금 더 믿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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