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을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건 구조도, 평면도도 아니었다.
그 공간 안에 앉아 있던 나의 표정,
그 표정이 만들어내던 하루의 공기.
그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공간은 사진으로 남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 머물렀던 감정이, 공기처럼 몸에 스며든다.
그 공기가 불편했는지, 아니었는지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 공간은 내게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집을 포기한 게 아니라,
나는 어떤 삶을 포기했는지를 오래 생각했다.
좋은 위치, 괜찮은 조건, 빠른 거래,
모든 것이 ‘합리적’이라 불릴 수 있었지만,
그 안에 있던 나는 늘 어딘가 멈춰 있는 사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 순간부터,
나는 한 발짝도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인지보다,
지금 사야 하는 공간인지만을 고민하고 있었다.
계산은 맞았지만, 리듬이 맞지 않았다.
그 집은 정돈된 공간이었지만,
내가 살아갈 자리는 허전하게 비어 있었다.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집은 결국 내 것이 되지 못했다.
모든 조건이 잘 맞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점점 작아졌다.
살고 싶은 느낌이 아니라,
살아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가 먼저 밀려왔다.
사람들은 '사는 곳'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제 안다.
사는 '곳'보다 더 중요한 건,
그곳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다.
살 수 있는 공간과 살아지는 공간은 분명 다르다.
눈앞의 집이 아니라, 일상의 조각들이 내게 맞아야 했다.
그게 아니면 결국 공간 안에 나는 없게 된다.
햇살이 들 때 무슨 기분이 드는지,
퇴근 후 문을 열 때 어떤 숨이 나오는지,
혼자 밥을 먹을 때 불을 켜는 위치가 편한지.
이 모든 감각들이 삶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들을 고려하지 않은 집은
편리할 수는 있어도 편안하지는 않았다.
그런 차이가 결국 집을 오래도록 견디게도,
어느 날 불현듯 떠나게도 만든다.
그런데도 나는 숫자와 조건을 따라갔다.
합리적인 판단이라 불리는 것에 기대어,
내 감정은 조용히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모든 사람이 인정할 선택이면,
그 삶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하지만 나만 빠진 합리 속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감각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 선택이 틀렸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그 선택이 내 삶을 편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사람이 머무를 수는 있지만, 살아갈 수 없는 공간.
내가 떠난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보다,
감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걸
그 공간을 통해 배웠다.
집은 어떤 선택보다 일상의 밀도로 이어진다.
하루의 기분, 계절의 결, 관계의 온도.
그 집에서 나는 어떤 나였는지를 묻지 않으면,
결국 나는 자꾸만 낯선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고른 것이 나를 낯설게 만든다면,
그건 단지 실패가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멀어졌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나는 나를 중심으로 두기로 했다.
공간이 나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이 공간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그 믿음은 아직 완성된 삶을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나를 속이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그 중심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게 언젠가는 어떤 공간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게 해줄 것 같아서.
무언가를 선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진짜로 감당하고 싶은 삶을 기다렸던 것.
그 기다림은 때때로 외롭고 조급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다들 빨리 떠나가는 사이,
나는 잠시 멈춰 서 있었을 뿐이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지금도 어쩌면 완벽한 집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먼저 그려보는 일이,
무엇보다 먼저라는 걸.
집은 배경이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은 전부 나 자신이다.
그 기준을 되찾은 지금,
어디든 조금 더 나를 담은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 삶이 조금 덜 반짝이고,
조금 덜 편리할지라도.
그 안에 내가 웃고 있다면,
그게 나에게 가장 좋은 집이다.
그 웃음 하나면,
결국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
다음에는 그런 집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집에서의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나답게 살아가고 있기를 바란다.
그런 하루들이 쌓였을 때,
비로소 나는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