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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포기한 게 아니라, 나를 선택한 것이었다

by 이담록

그때 나는 집을 포기한 게 아니라, 나를 선택한 거였다.

그 선택은 계산보다 감정을 먼저 들여다본 결정이었다.

사람들은 그 선택이 아깝다고 했고, 나는 그 말에 종종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됐다. ‘아깝다’는 말은 그저 숫자에 붙는 감탄일 뿐,

감정에겐 아무런 설득도 되지 않는다는 걸.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너무도 조용하게 단 한 사람을 지키고 있었다.

미래의 나,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

그리고 지금 그 마음 덕분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삶의 선택 앞에서 숫자와 조건을 먼저 꺼낸다.

하지만 내가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건, 계약서의 줄이 아니라,

내 안에서 조용히 일렁이던 감정의 파문이었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나는 분명히 그 진동을 느꼈다. 그 진동이 말해주었다.


"여기가 네가 숨 쉴 곳이 아니라고."


그건 합리적인 판단이라기보다, 정직한 감각이었다.

그 감각을 무시하지 않기로 한 순간부터, 내 삶은 조금씩 달라졌다.

나는 여전히 집을 갖지 못했지만, 대신 매일 아침 나를 속이지 않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그 삶은 때로 불안하고, 종종 외롭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내 감정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

살고 싶은 공간보다, 살고 싶은 나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고,

집보다 삶의 리듬이 먼저 들려오는 사람이 되었다.


집을 보러 다니던 어느 날, 나는 한 집의 거실 창 앞에 섰다.

남향의 큰 창이었고, 바닥엔 따뜻한 나무 색이 깔려 있었다.

해는 좋았고, 마감재도 고급스러웠지만 그 공간에서 나는 어딘가에 초대받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좋은 공간인데도 어딘가 어색한 감정.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공간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거리였다.


모두가 말하는 '좋은 집'이 나에게도 좋은 집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돌이켜보면 참 많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정답을 고르지 않았다고 해서, 내 삶이 틀린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걸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내 감정을 다시 신뢰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었다.


나는 이제 안다. 삶은 종종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가 머무르는 공간은 벽과 바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앉아 있는 내 표정,

그리고 그 표정을 받아주는 감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지금도 때때로 불안은 찾아온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 앞에 주저앉지 않는다.

나는 이미 한 번, 나를 선택해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집은 아직 없지만, 내 마음을 담아낼 공간을 기다릴 수 있는 여유는 생겼다.

삶은 어쩌면, 그런 마음으로 지어가는 집인지도 모른다.


다음에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나는 이번에도 나를 먼저 살피고 싶다.

조건보다 감정에 귀 기울이는 사람으로, 그 선택 이후에도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 삶이 조금 덜 반짝이고, 조금 덜 편리할지라도, 그 안에 내가 웃고 있다면, 그게 나에게 가장 좋은 집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집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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