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비로소 괜찮았던 마음
마음보다 먼저 떠오른 사람들
선택을 앞두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내가 아니라 남들이었다.
‘이 결정을 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이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해도 괜찮은 걸까?’
마치 내 삶의 방향이
나의 확신이 아니라
세상의 반응으로 결정되는 것 같았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에 낯설지 않았다.
나는 늘
내 삶을 스스로 살면서도,
내 선택을 누군가에게 검열받고 있었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기준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사회가 기대하는 ‘납득 가능한 사람’이
되어 있으려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설명은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내 선택을 자주 설명했다.
이유를 물어보지 않아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도
나는 스스로 해명하듯 말했다.
“지금 안 산 건, 타이밍이 좀 애매해서.”
“그냥 아직 확신이 안 들어서.”
“불안하긴 했는데, 언젠가 기회는 또 올 테니까.”
이 말들은 얼핏 타인을 위한 말 같지만,
사실은 내 마음을
내가 스스로 설득하려는 말이었다.
내 선택이 흔들릴까 두려웠고,
남들이 이해하지 않으면
정당하지 않은 결정처럼 느껴졌다.
나는 설명 없이 버티는 용기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설명을 곁들였다.
내 마음을, 내 감정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포장했다.
흐릿한 감정과 명확한 세계
세상은 명확하다.
기회는 이때뿐이고,
수치는 뚜렷하고,
결정은 빨라야 이득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그렇게 움직이고,
뉴스와 영상과 글들이
매일같이 그 확신을 반복한다.
그에 비해 내 감정은 늘 흐릿했다.
“왠지 아닌 것 같아서.”
“지금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조금 더 생각하고 싶어서.”
이유라고 하기엔 부족하고,
논리라고 하기엔 흐물거리는
그 감정들을 사람들 앞에 내보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감정에
논리를 덧붙였고,
느낌에
설명을 입혔다.
그렇게 해야만
조금이라도 ‘납득 가능한 선택’이 될 것 같았으니까.
감정에 설명이 필요한 사회
우리는 감정보다 논리가 앞서는 세상에 살고 있다.
‘느낌’보다는 ‘데이터’,
‘이해’보다는 ‘이유’가 먼저 설명되어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설명한다.
기분이 왜 나쁜지,
불안이 왜 시작됐는지,
선택을 왜 미뤘는지.
하지만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걸까?
단지 피곤해서,
마음이 꺼려져서,
직감이 그만하라고 말해서 멈춘 결정을
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그 질문에 오래 머물렀고,
답을 찾기보다
그 감정을 인정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느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
요즘의 나는 연습하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연습을.
“이건 내가 느끼는 것이니까.”
“남이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나는 이렇게 느꼈고,
그것이면 충분해.”
이렇게 말하는 법을
내 안에서 만들어가고 있다.
내 선택이 누군가의 납득을 얻지 못해도,
나 스스로는
그 선택에 단단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사실을
자꾸만 되새기며,
감정이 선택의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나 자신에게 허락하고 있다.
삶의 노트
> 선택엔 때때로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설명이
납득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감정으로 선택한 나를
내가 먼저 인정하는 것,
그게 내 삶의 방향을
‘남’이 아닌 ‘나’로 돌려놓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