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는 감정이 부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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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우산
그중에 유난히도 아끼는 우산이 있음이 좋다
생일선물 명목으로 엄마가 사준 우산
우산 끝자락을 땅에 질질 끌며
우비를 입고 놀이터에 놀러 나가던 꼬맹이는
어느새 커서 한 우산 끝자락을 사수하려
애쓰는 어른이 되었다
땅에 닿을까 때가 묻을까
물티슈 꺼내 들고 빗물을 닦아내는 폼이
익숙해진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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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향수를 한 움큼 뿌리고
내가 좋아하는 하늘색 옷을 입고
내가 좋아하는 베이지색 우산을 쓰고
내가 좋아하는 템포로 내리는 빗소리가 좋다
은은하게 뒷덜미에서 나는 향에
은은하게 섞여오는 빗냄새의 온도가
은은하도록 따뜻하게 느껴진다
거기에, 빗소리를 막지 않을
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은은한 노래 한 자락 추가.
행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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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에 웅덩이가 생기면
공간에는 감정이 부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시멘트를 붓고서
차마 굳기 전에 밟아버려 발자국이 남은 길
그 위로 빗물이 자리 잡고서 좀처럼 떠나질 않는다
마치 오지도 않은 겨울의 눈사람이
미래에서 잠시 왔다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만 같다
눈사람의 잔해는
서있던 발자국으로,
녹아내린 물로 남아 여기에 있다
발자국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감정이 부여되었다
.
횡단보도의 작은 홈을 따라 생긴
작은 웅덩이를 피해 정류장에 도착하면
마치 그런 나를 놀리듯이
커다랗고 깊은 웅덩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풍채가 웅장한 버스가 도착하고
액셀을 밟아 출발할 때마다
잔뜩 움츠려든 고양이처럼
경계태세를 갖추고 웅덩이를 빤히,
우산을 쥔 손바닥에 힘이 가득 들어간다
물이 가득한 무게를 받고 튀어올라 덮칠 것만 같다
과거에 한번 버스에 튀어 오른 물세례를
뒤집어 쓴 적이 있어 그런가,
정류장에 고인 웅덩이에는
자연스럽게 두려움이란 감정이 부여되었다
.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 웅덩이에도
분명 행복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생명을 다한 나뭇잎의 마지막을
어느 한 곳에서 마무리하지 않도록
최대한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띄워주고 있던
웅덩이의 마음씨가 참 고왔다
고운 마음씨를 보고 있자니
또 행복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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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순간 또한 행복이었다
만석인 버스에 앉아 글을 쓰는데
왼쪽 창 밖엔 비가 오고
오른쪽 시야엔 사람이 가득했다
이어폰엔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글에 온전히 집중했던 그 시간
비에 젖어버린 양말에
속상해하며 일진을 탓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세상엔 행복이 많고
그에 집중하면 다른 불행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이 또한 낭만이라고까지
생각이 드는 경험이 하나 둘 많아진다면
그게 바로 내 성격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된다
지금의 내가 이미 그런 사람임에
또 감사하고 행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