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의 좌절
신영은 할아버지의 오른손을, 지영은 왼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점점 휘청거렸고, 그때마다 아이들의 작은 몸도 함께 흔들렸다.
지영은 자꾸만 뒤로 젖혀지는 몸을 다잡기 위해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인도 위, 술에 취한 노인의 걸음과 두 어린아이의 휘청임은 어느새 낯설고 위태로운 풍경이 되어 있었다.
지영은 그렇게 도심까지 들어왔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 옆을 무심히 지나쳤다.
지영은 자꾸만 커지는 사람들의 그림자에 놀라며 할아버지 손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신영도 마찬가지였다. 아이 둘은 서로 눈빛을 맞추고, 말없이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그때, 저만치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영아!”
아빠의 목소리였다.
지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빠가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이 낯설 만큼 굳어 있었다.
지영은 안도감에 숨을 내쉬며 반가움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아빠!”
하지만 아빠의 얼굴은 웃지 않았다.
지영이 태어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분노가, 당혹이, 어딘가 파괴적인 감정이 아빠의 눈에 가득했다.
일도는 불현듯 어린 시절의 술타령과 고통이 몰려왔으며, 지금 이 시점에서 또다시
술을 마시고 아이들은 잃어버릴 뻔 한 걸 생각하니 갑자기 분노가 솟구쳤다.
“아버지, 대체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러다가 아이들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그 새를 못 참고 또 술타령인가요”
아빠가 할아버지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지영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왜 소리를 지르는지 알 수 없었고,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화낼 이유도 몰랐다.
할아버지는 횡설수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반복했다.
“내가 잘못했나… 내 새끼, 잘 보호했어, 내가 잘못했나… 목사면 다냐…”
아빠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할아버지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순간, 할아버지가 휘청이며 바닥에 넘어졌고, 아빠는 그 위에 올라타 할아버지를 흔들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소리 없는 싸움이 아니었다. 아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할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신영이 울음을 터뜨렸다.
공원에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하나둘씩 다가왔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저 구경꾼처럼 둘러서서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지영은 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빠, 아빠 하지 마요… 하지 마요, 제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아빠의 다리에 매달렸지만, 아빠는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세상의 소음이 갑자기 꺼진 듯, 지영의 귀에는 자신의 울음소리와 신영의 흐느낌만이 들렸다.
그 사이, 바닥에 누운 할아버지의 얼굴은 눈물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아빠의 눈은 더 이상 아빠의 눈이 아니었다.
지영은 떨리는 입술을 달래며, 다시 소리쳤다.
“아빠! 제발 그만해요… 제발, 우리 무서워…”
누가 신고했는지, 그새 경찰차 두 대가 공원 앞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파란 경광등이 퍼덕이며 어스름 속을 쪼갰고, 곧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다가왔다.
바람은 여전히 찬 공기를 몰고 다녔고, 그 바람 속에 울고 있는 두 아이, 쓰러진 노인, 눈이 뒤집힌 아들의 형상이 뒤엉켜 있었다.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여기저기서 애처로운 말소리가 들렸다.
"쯧쯧.. 할아버지가 어쩌다가 이런 일이…" 누군가가 탄식했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 다른 이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말세라는 탄식도 들려왔지만, 경찰이 도착한 후 상황은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흩어졌고, 현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늦가을 저녁, 도심 한복판에, 누구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장면이 박혀버린 순간이었다.
파출소에 도착한 일도는 순순히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감옥에 넣어주세요.
나는 아버지를 때렸습니다.
패륜을 저질렀고, 경찰서로 넘겨주세요. 죄를 묻는 게 맞습니다.”
경관은 그를 바라보다 말없이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중년의 경찰관이 들어왔다.
책상 너머에 앉은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일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신고는 접수됐지만, 가족 간의 문제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해야 합니다.
몇 번을 물어봐도, 아버님은 처벌을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일도는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나는 잘못했습니다. 죄를 지었고,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경찰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훈방입니다. 아이들도 있고… 오늘은 그냥 조용히 돌아가세요. 다시 이런 일 없도록 하시고요.”
일도는 힘없이 일어났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와 함께 주차장으로 나왔다.
어둠은 이미 도시 전체를 삼켜버렸고, 차 안도 차창 밖도 칠흑 같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운전석에 앉았다.
전도집회에는 가지 않았고 아니 갈 수도 없었다.
손은 핸들 위에서 멈췄고, 눈은 어딘가 공허한 곳을 향해 있었다.
마음속이 금속 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차디찬 쇳덩이가 가슴속에 쿵 박혀버린 듯했다.
모든 것이 싫어졌다.
교회도.
이 동네도.
개척도.
그 자신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차 안에는 한동안 숨소리마저 사라진 정적만 흘렀다.
아이들은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지영이 신영의 귀에 대고 살짝 속삭였다.
잠시 후, 신영이 조심스레 아빠를 불렀다.
“아빠… 집에 가자.”
목소리는 작고 떨렸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과 애정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일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위잉… 위잉…”
엔진이 깨어나며 정적을 찢었다.
차는 아주 천천히, 앞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렇게,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말도, 목적지도 없이.
단지 ‘돌아가는 길’이라는 이름의 침묵 위에 올라탄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