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을 때
"'인연'은 한국어지만, 이 정서나 감정은 전 세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 감정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그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 <패스트 라이브즈> 감독 셀린 송,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 SBS 기사 중 발췌
국제커플로서 우리는 늘 언어 사이를 걷는다. 공용어는 영어지만, 그것은 우리 둘 중 누구의 모국어도 아니다. 그래서일까. 때로는 사소한 대화 하나에도 작은 버블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을 다 전하려고 해도 어딘가 부드럽게 닿지 못하고 돌아 나가는 느낌.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데, 그 감정이 100%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다는 감각. 우리는 매일 그 얇은 막을 건드리며 함께 살아간다.
어느 날, 평소처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한 AI 서비스를 발견했다. 내가 한국어로 말하는 영상을 찍으면, 내 입모양까지도 자연스럽게 바꿔서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는 앱이었다. 재미 삼아 영상을 찍어보다가 리키도 함께 해보자며 따라 했고, 우리는 까르르 웃으며 영상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리키가 화면 속에서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성을 다해 내 이름을 부르고 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던 나는 예상치 못한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 말은 이미 몇 번이고 영어로 들었던 말이다. 항상 내 곁에 있고 싶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그런데 그날, 정성껏 한국어로 건넨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감정의 얇은 막이 조용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 막은, 언어의 장벽이라기엔 거창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미묘한 이질감이었다. 서로 살을 부비며 사랑을 표현할 때마다 느껴졌던 아주 얇은 투명막.
그날은 마치 그 막이 처음으로 사라지고, 마음이 마음에 닿는 듯한 순간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또 하나의 기억이 겹쳐 떠오른다. 우리가 결혼을 결심하고 리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던 날, 마침 그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다.
마음이 따뜻하신 시어머님은 그날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작은 선물을 건네시며,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카드 한 장을 내밀어주셨다. 카드에는 서툴지만 정성이 담긴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글씨가 부끄러우셨는지, 어머님은 몇 번이나 실패했다며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구글 번역기가 자꾸 잘못 번역해서 다시 써야 했다고, 그림 그리는 기분이었다고 농담도 건네셨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발음도 문법도 익숙하지 않은 그 언어 속에, 마음만은 정확하고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그 따뜻한 진심은 시어머니와 나 사이의 또 다른 얇은 막을 걷어냈고, 나는 그 순간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의사소통은 단어를 잘 고르고, 문장을 정확하고 화려하게 말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인연”이라는 단어는 한국어지만, 그 감정은 전 세계 누구나 알고 있다는 셀린 송 감독의 말처럼, 마음의 언어는 말보다 먼저 닿기도 한다.
우리는 서투른 영어로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사랑이라는 보편의 감정이다. 때로는 멀게만 느껴지고 서로에게 닿지 않을 것 같은 표현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국적도 언어도 다르지만, 서로를 향한 진심만은 같은 방향을 향해 걷고 있다는 걸 믿으며, 오늘도 우리는, 서로를 배워가고 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툴지만 진심 어린 언어,
그리고 그 마음을 깊이 이해하려는 따뜻한 시선이,
당신의 하루에도 조용히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 나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