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보다 여유를 택한 사람들
"스페인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났었어. 하루 동안 공항, 은행 등등 기반시설 등 모든 것이 마비되고, 전기, 인터넷, 냉장고, 와이파이, 아무것도 안 되는 상황이었대."
어느 날 저녁, 리키가 조용히 건넨 이야기였다. 그의 말투는 늘 그렇듯 담담했다. 나는 문득 멈칫했다. 상상해 보았다. 전국적인 정전이라니. 이건 단순히 전구가 꺼지는 문제가 아니다. 뉴스 속에서 본 적 있는 장면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채웠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휴대폰 불빛에 의지한 사람들,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SNS를 타고 확산되고, 누군가는 불안을 퍼뜨리고, 누군가는 음모론을 제기한다. 혹시 누군가의 소행일까? 어떤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나라가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아닐까?
이런 장면들은 내가 뉴스를 통해, 혹은 영화 속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위기 상황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전기가 없다는 건 단순한 정전이 아니라, 연결의 단절이었다. 와이파이가 끊기고, 냉장고가 작동되지 않고, 온 나라 전체가 마비된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키운다. 나는 그런 상상 속에서 그날의 스페인을 그려보았다.
리키는 나의 생각도 공감해 주었지만, 그 이면의 다른 모습들도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사람들은 당황했고 불평했지만, 이내 바깥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소파에 파묻혀 불안에 잠식되기보다, 현재를 즐기는 쪽을 택했다고 한다. 골목마다 기타를 들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고, 이웃들과 더 많이 눈을 마주쳤다고 했다. 카드놀이를 하고, 작은 광장에서 춤을 추고, 맥주를 마시고,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날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은 전기가 언제 돌아올지가 아니었어. 냉장고에 있던 맥주가 미지근해질까 봐 마트에 빨리 다녀와야겠다는 거였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지금 내가 상상하고 있던 것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날을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전기가 나가자, 행복이 들어왔다."
나는 순간 그 말에 멍해졌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니.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니. 정말 가능할까?
우리의 많은 시간은 ‘잇는 ‘ 데에 쓰인다. 휴대폰을 붙들고, 알림을 확인하고,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우리는 산다. 그런데, 정말 그 연결이 우리를 진짜 이어주는 걸까? 아니면 어둠 속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웃는 그 순간이야말로, 진짜 연결의 순간은 아닐까?
그날 밤 나는 혼자 조용히 상상해 보았다. 하루쯤, 우리 모두의 와이파이가 꺼진다면 어떨까? 뉴스도, 알림도, 이메일도 닿지 않는 그런 하루.
그 하루는 상상 속 이야기이지만, 모니터와 핸드폰 대신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고 현재를 사는 것은 언제든 실현 가능한 오늘일 수도 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아도 서로가 닿을 수 있는 시간.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깊게 서로를 바라보는 밤.
그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연결인지도 모른다.
불이 꺼졌을 때 비로소 켜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 삶의 진짜 빛은,
연결과 이야기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에 머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나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