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가득 찬 날엔, 마음부터 정리합니다
이유 없이 마음이 무거운 날이 있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감정이 쉽게 가라앉고, 말끝마다 예민한 반응이 툭툭 튀어나온다. 평소 같으면 흘려보냈을 말들에도 마음이 붉게 물들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날이면 내 머릿속은 쓰레기통처럼 느껴진다. 크게 상처를 받은 일은 없지만, 작고 사소한 스트레스들이 하루하루 쌓이다 보면 결국 노이즈로 가득한 머릿속이 되고 만다. 온갖 잡생각과 기분들이 뒤엉켜 있는 그 상태에서 나는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글을 쓴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도, 일단 앉아 문장을 만든다. “오늘 좀 이상했어.” “기분이 꿀꿀하다.” 그런 짧은 문장으로 시작해, 왜 그런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묻고, 대답하고, 다시 정리하다 보면, 엉켜 있던 생각들이 조금씩 빠져나온다. 마치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처럼. 감정은 정리되기 시작하고, 그 순간부터 나는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감정을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밖으로 꺼내 놓고, 조용히 마주 보는 일이다.
얼마 전에도 그런 날이 있었다. 마음이 이유 없이 불편하고, 아주 작은 일에도 반응하게 되는 날. 감정이 슬프기보다는 불안에 가까운 날이었다. 불안은 내 안에서 자꾸만 다른 감정들을 끌어들이고, 결국엔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모르게 만든다. 나는 그 감정을 글로 정리해 올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리키가 다가왔다. “방금 에세이 읽었어.”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그의 커다란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긴 속눈썹 아래로 고인 눈물이 반짝였다. 나는 그 눈물을 보며, 내가 쓴 글이 그의 마음에 닿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실 나는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능숙하지 않다. 특히 리키와는 언어도 문화도 다르기 때문에, 어떤 감정은 미처 전달되지 못하고 내 안에 쌓여만 갔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내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리키에게 나를 건네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내가 쓴 글을 천천히 번역해서 읽고, 어떤 날은 눈물 흘리며 “네가 이렇게 느끼고 있는 줄은 몰랐어.”라고 말한다. 그런 순간이 나에겐 큰 위로가 된다. 언어가 다르다는 건 표현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글은 그 벽을 천천히 넘게 도와준다.
최근에는 다시 한국 센터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중이다. 스웨덴에서 익숙했던 방식이 이곳에서는 낯설게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들려오는 피드백에 마음이 상할 때도 있다. 그런 날엔 내가 느끼는 감정을 글로 정리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말이 정말 나를 상처 입힌 걸까?’ 아니면 ‘내가 지금 불안해서 더 민감해진 걸까?’
글을 쓰며 알게 된 건, 감정은 구름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고, 나는 그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느끼는 기분은 진실하지만, 그 기분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듯 ‘나는 없다’는 말을 곱씹으며, 감정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머릿속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나를 정리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진심으로 연결되기 위해. 내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그 사람의 눈빛이 조금 더 따뜻해지는 순간, 나는 안다. 지금 이 쓰는 일이 결국은 나를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든다는 것을.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오늘도 조용히 정리되고, 따뜻하게 이어지기를.
— 나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