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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꼭 먹고 다녀.

삶을 다시 쓰는 중입니다 – 기본부터 천천히

by 나미

“밥은 꼭 먹고 다녀.”


리키는 이 말을 진지하게, 자주 한다.
처음엔 단순한 잔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함께 산 지 1년이 넘은 지금은,

그 말이 우리가 하루를 잘 살아내기 위한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원칙이라는 걸 안다.




나는 오랫동안 루틴을 세우는 걸 좋아했다.

다이어리에 하루 일정을 쪼개고,

하고 싶은 일을 정리해 두고,

작은 성취에 체크 표시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때의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루틴 속에 정작 나를 돌보는 시간은 빠져 있곤 했다.


언어 공부, 영상 편집, 업무 관련 스터디…

늘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고,

그걸 끝내야 비로소 밥을 먹거나 샤워를 하거나,

산책을 나가곤 했다.

내 몸은 점점 피로해지고, 감정은 점점 예민해졌다.


어느 날은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 날은 꼭 아침을 거르거나,

물을 하루 종일 거의 마시지 않았거나,

아무 이유 없이 눅눅한 기분이 들었는데 샤워를 하루 미뤘던 날이었다.


그런 나에게 리키는 늘 말하곤 했다.


“일은 그다음이야. 밥부터 먹자.”




리키는 식사 시간에 정말 진지하다.


스페인에서는 하루 세끼 외에도 merienda라고 불리는 간식 시간이 있을 정도로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음식을 먹는 일이 아니라, 하루의 리듬을 만드는 기본값이다.

학교에서도 점심 전 샌드위치를 먹는 시간이 따로 있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식사 시간의 중요성을 배우며 자란다.


시댁에 머물렀을 때에도 그랬다.

모두가 모여 저녁을 먹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중요했다.

누군가 그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먼저 식사를 하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하고,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는 그 시간은 리키의 가족에게,

그리고 그가 자란 문화 안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헷갈렸다.

왜 꼭 다 같이 먹어야 하지? 왜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거지?

하지만 어느새 나도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고,

무심히 흘려보냈던 나의 끼니 시간들이 떠올랐다.




어느 날, 일을 하느라 점심을 거른 적이 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컴퓨터만 보다 보니 무기력해졌고, 식욕도 없었다.

그때 리키가 조용히 물었다.


“오늘 밥은 먹었어?”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아, 별로 안 배고파.”


리키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 먹어야 해.”


그날 우리는 간단한 토스트를 구워 먹었고, 리키가 좋아하는 하몽을 곁들였다.

따뜻한 음식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이 천천히 풀리는 걸 느꼈다.

식사는 생존을 위한 행위일 뿐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의 나는 루틴을 다르게 짠다.

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영양가 있는 세끼를 챙겨 먹고,

30분 산책하고, 샤워하고, 빨래를 개고, 청소를 한다.

그 후에야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쓴다.


공부와 업무는 중요하지만,

내가 잘 살아 있는 것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


인터넷에는 ‘건강한 생활습관’과 ‘자기 관리’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방법들이 유행처럼 쏟아졌다가 이내 흘러간다.


그렇지만, 나에게 맞지 않는 루틴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내 삶을 지치게 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꼭 나를 향한 어떤 자책이 기다리고 있다.

야식으로 폭식하거나, 몸에 해로운 걸 알면서도 탄산음료나 술을 들이붓거나,

의미 없이 밤을 새워버리거나.


좋은 하루를 위한 루틴은 거창하지 않다.

그저 나를 따뜻하게 돌보는 작은 기본들로 충분하다.

물 마시기, 햇볕 쬐기, 씻기, 따뜻한 밥 한 끼.

이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야말로 하루를 살아내는 핵심이다.


리키는 오늘도 말할 것이다.


“밥은 꼭 먹고 다녀.”


그리고 나는 오늘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것이 우리가 하루를 잘 살아내는 가장 간단한 비밀이니까.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고 단순한 것들이, 결국은 나를 더 잘 살아가게 해주는 기본이었습니다.
당신의 하루도 따뜻한 햇살과 포근한 식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응원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 나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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