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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아니어도, 다짐은 될 수 있으니까

낯선 도시에서 마주한 작고 큰 현실

by 나미

오늘은 드디어 그날이다.


필라테스 센터 매니저와 약속한 날, 중국 상하이의 센터를 찾아가는 날이었다. 리키가 나와 함께 센터까지 가주기로 했고, 센터가 위치한 신톈디의 높은 빌딩 앞까지 따뜻하게 나를 배웅해 주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긴장하지 말고, 하던 대로 네 모습을 보여주고 와."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센터로 향했다. 긴장이 돼서인지 신티안디의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자꾸만 어깨가 작아지는 것 같았다.




센터는 크고 깨끗한 빌딩 안 2층에 위치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기구들이 줄지어 있었고, 화려한 전광판과 인포 데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안쪽에서는 환하게 웃는 강사들이 회원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어쩐지 한국에서 일했던 스튜디오 중 한 군데가 떠올랐다.


"오늘 한시 반에 콜린을 만나러 왔는데요."


이야기를 꺼내자, 인포 데스크에 있던 강사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여성이 서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가벼운 화장을 한 그녀에게서는 오랜 강사 생활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저는 콜린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나미예요."


그녀는 나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고, 그런 그녀의 친절함에 긴장이 약간 누그러졌다. 콜린은 나를 개인 레슨실 한쪽으로 안내했다. 다시 한번 센터 안의 고급 기구들이 눈길을 끌었다.


"상하이에 오신 지 얼마 안 되셨죠? 제임스가 당신의 이력서를 전달해 줘서 확인해 봤는데, 경력이 인상 깊어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요."


그녀가 먼저 운을 떼며 그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물었다. 나는 그동안의 경력과 경험을 설명했고, 상하이에서도 기회가 된다면 수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뜻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친절했던 그녀의 말투에 점점 현실적인 무게감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일단 상하이도 지금 그렇게 상황이 좋지는 않아요. 회원님들 대부분이 영어를 이해할 수 있지만, 여전히 영어는 제2외국어이기 때문에 중국어를 할 수 있는 강사님을 선호하시는 편이에요. 게다가 저희 센터에는 재활 목적의 회원님들이 거의 없어요."


그녀는 난색을 표했다.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영어로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강사라도 수업을 선택받기 쉽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상하이 같은 국제 도시에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회원님들이 조금이라도 있기를 기대했던 나는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제가 중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면, 기회가 더 많아질까요?"


"물론이죠. 다만 수업이 다 찰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이곳도 지금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에요.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제가 당신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병원 쪽을 더 알아볼 것 같아요. 상하이에는 필라테스 기구를 사용하는 병원들도 꽤 있어요."


그녀의 말은 현실적인 조언이었고, 고맙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이 쓰라렸다.


순간, 한국에서 경력이 부족했던 나를 믿고 결국엔 팀장 자리까지 맡겨주셨던 원장님이 떠올랐다. 스웨덴에서, 언어가 부족했던 나에게 기회를 주셨던 원장님도 생각났다. 그 사회에서 받았던 이해와 배려는, 막상 벗어나보니 더 간절하게 다가왔다. 한국이든, 스웨덴이든, 그리고 이곳 상하이든 결국 마주하는 것은 비슷했다.


내 표정에서 실망이 묻어났는지, 콜린은 덧붙였다.


"홍콩에 있는 필라테스 아시아 본부에 연락해 보세요. 선생님의 경력이라면 일반 강사보다 국제 멘토 트랙도 어울릴 것 같아요."


고마운 조언이었다. 비록 오늘 일자리를 얻진 못했지만, 그 말은 또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었다.


"계속 상하이에 계시죠? 위챗 아이디를 알려주세요. 오늘은 돌아가서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혹시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우리는 위챗을 서로 등록했고, 짧았던 상하이에서의 첫 면접은 그렇게 조용히 끝이 났다.


센터를 나서며 '언어'라는 장벽이 다시 한번 깊게 다가왔다. 기대가 있었던 만큼 아쉬움도 컸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리키에게 "면접, 잘 안 됐어."라고 말하자, 오히려 나보다 더 속상해하는 그의 얼굴에 마음이 저려왔다. 그래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신톈디의 번화한 거리를 걷는다. 멋지게 차려입고 웃으며 하루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언젠가 이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만의 삶을 그려갈 수 있기를.


오늘은 현실을 마주한 날이자, 새로운 다짐을 품은 날이다.



ChatGPT Image 2025년 4월 8일 오전 09_58_37.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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