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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뿌듯한 하루

by 나미


‘흠, 이쯤에 있어야 하는데….’


정신없이 눈을 굴리며 쇼핑몰 안에 간판들을 읽어 내려간다. 많은 사람들, 생경한 한자로 쓰인 간판. 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벌써 4층을 몇 번째 뱅글뱅글 돌고 있다. 오늘은 헬스장에 등록하는 날. 취미가 운동인 나와 남편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떨어져도 가장 먼저 헬스장에 등록해서 운동을 한다. 나보다 두 달 정도 먼저 상하이에 도착해 여러 군데의 헬스장을 둘러본 남편은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며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너도 분명히 좋아할 거야”


운동 경력이 많고, 많은 것들을 세심하게 고려하는 남편이 골라놓았기 때문에 나는 걱정 없이 편히 가서 등록만 하면 된다.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고마운 일과는 별개로 헬스장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도통 보이지가 않는다. 지도 어플을 켜도 몰 안에서는 소용이 없는 일….


‘어찌한담…’


리키가 쉴 때 그냥 함께 올걸, 괜히 마음 급하게 먼저 왔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몰 안에 있는 작은 의자에 걸터앉은 찰나, 저 멀리 반대편에서 근육질의 남성이 자신만만한 포즈로 서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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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으로 아 저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그림 쪽으로 향했다. 사진은 철문에 붙어있었고, 철문 안쪽으로 작은 통로 같은 것이 나 있었다. 괜히 비밀스러운 느낌이 나서 미소가 지어졌다. 한국에서는 대로변 쪽에 주로 있던 헬스장이, 이곳에서는 쇼핑몰 4층, 그리고 안쪽 좁고 비밀스러운 통로를 지나야지 만날 수 있을 만큼 숨겨져 있었다.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얼굴 인식 시스템이 반겼다. 중국어로 바쁘게 이야기하는 기계 앞에서 나는 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몇 분쯤 기다렸을까,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스포츠머리의 트레이너가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준비한 챗 지피티 번역을 보여준다.


‘남편이 소개해줘서 왔는데, 헬스장 등록을 하고 싶어요. 남편의 이름은 리키예요.’


트레이너는 이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트레이너가 안내한 자리에 앉자마자 그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는지 물었다. 당황한 듯한 그는 급하게 핸드폰을 꺼낸다. 보통의 기종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 처음 보는 회사의 스마트폰이다. 그는 빠르게 타자를 이어나갔고 곧 중국어를 번역한 영문을 보여줬다.


‘영어는 잘 못하지만, 제가 남편분도 등록 도와드렸어요.’


그렇다면 조금 믿음이 간다. 어쩐지 큰 덩치에 조그만 핸드폰 타자를 두들기는 모습은 좀 재미있었지만. 그는 곧 이곳저곳으로 들어가고 누르고를 반복하고, 전자서명까지 도와줬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트레이너도 “어, 어?, 어어?” 하며 약간 원시적인 모습으로 소통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삐그덕 대며 굴러가는 바퀴처럼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등록이 끝난 후 그는 “어!” 하며 자신의 아주 작은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환영합니다. 내부 시설 안내 도와드릴게요.’


나도 웃으며 화답했다. 안쪽에 그는 샤워시설과 탈의실의 위치를 보여주며 안내를 끝마쳤다.


“씨에 씨에”


알고 있는 짧은 중국어를 뱉으며 최대한 웃음으로 감사함을 전했다. 그도 웃으며 인사했다. 뭔가 하나가 진행되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헬스장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온통 운동에 몰입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몸짓과 눈빛에서 느껴지는 열정과 진지함이 낯설지 않았다. 스웨덴에서도, 한국에서도 헬스장에 가면 언제나 마주할 수 있었던 풍경이다.


각자의 이유로 이곳에 온 사람들이, 마치 집 안 구석구석을 정성스럽게 쓸고 닦는 것처럼 자기 몸을 다듬고 있었다. 좋은 음식으로 몸을 채우고, 다시 같은 시간에 이곳을 찾아, 수도승처럼 묵묵히 수련을 이어가는 사람들. 그 꾸준함과 고요한 집중 속에서 나 역시 조금씩 이 공간에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운동에 몰입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나도 오랜만에 기구를 사용하며 내 몸의 감각을 하나하나 되살렸다. 무게를 더하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때로는 스트레칭하듯 느리게, 때로는 강하게, 파워풀하게 근육을 쥐어짜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찌뿌둥하고 안개 낀 듯했던 머릿속이 점점 맑아졌다. 등록할 때까지만 해도 ‘낯선 도시의 헬스장’이라는 생각이 강했지만, 어느새 나는 이 공간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열심히 운동에 몰입하고 있을 때쯤,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타오바오에서 주문한 물건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으니 역시 중국어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부하오이쓰. 워 부스 쭝꿔런. 워 쭝웬 부하오. (죄송해요. 저는 중국 사람이 아니에요. 중국어를 잘 못해요.)”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문장이다. 배달원은 “어?” 하고 잠시 멈추더니, 짧은 설명을 덧붙이고는 곧 “오케이”라며 전화를 끊는다. 모든 것이 낯선 와중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는 걸까. 운동을 마치고 헬스장을 나설 때, 뭔가 작지만 단단한 자신감이 마음속에서 톡 하고 올라온다.


별일은 아니었지만, 오늘도 이곳에 조금 더 익숙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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