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휴, 무거워”
허리춤만큼 키가 큰 이민가방을 끙끙대며 카트에 겨우 싣고 공항문을 나섰다. 덥고 습한 바람이 훅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익숙했던 한국의 공기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다. 낯선 나라,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속에 떨어졌다는 긴장감과 함께, 정신없이 두리번 대던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익숙한 미소가 보였다. 그의 미소는 햇살보다 따뜻했고, 집 보다도 편안했다. 만약 안도감이 살아있는 모습이라면, 저런 미소를 띠고 있지 않을까?
리키가 저 멀리에서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 바로 앞에 서 있었는데, 어떻게 눈까지 마주치고 몰라볼 수가 있어?”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남편.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마치고 비자를 받아 상하이에 떨어지기까지 꼬박 두 달이 걸렸다. 반가움, 미안함, 안도감, 설레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마구 뒤섞여서 소용돌이친다.
남편은 내가 어찌해 볼 새도 없이 무거운 가방을 번쩍 들고 택시 정거장에서 택시를 잡았다. 웃을 때는 꼭 어린 아이나 소년 같은데, 이럴 때는 마냥 든든하다. 공항 밖으로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낯선 사람들과 풍경. 상하이다. 순간, '아, 이제 진짜 이곳에서 살아가는 거구나' 하고 느꼈다.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의 감각으로.
택시 안에서의 풍경은 서울과 아주 달랐다. 고층 빌딩, 남쪽 도시의 느낌. 유럽과 중국풍의 건물이 섞여있는 모습이 이 도시의 다문화적인 면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느낌. 리키는 눈을 반짝이며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디자인에 관련된 얘기를 쏟아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야기 속에 섞였다. 서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말을 잇고, 우리는 두 달이라는 시간의 공백을 빠르게 메워나갔다. 한자로 가득한 간판들, 무게감 있고 고풍스러운 활자들이 줄 지어 지나갔다. 이 도시는 말하지 않아도 그 안에 오래된 것들과 새로운 것들이 함께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상하이의 첫인상은 밝고, 생동감이 있었다.
“우리 집 보면 조금 놀랄지도 몰라.”
리키가 이야기하며 멋쩍어했다. 어떤 모습일까 기대하며 다다른 아파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졌다. 아파트 밖으로 걸쳐진 긴 빨랫대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마치 홍콩영화에서 본 듯한 이국적인 풍경, 높다란 아파트 차창 밖으로 빨래가 줄줄이 걸려있었고 따뜻한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예쁘게 심어진 나무들은 길 위로 예쁜 그림자를 놓았고, 나뭇가지 위로는 이름 모를 이국적인 새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너무 멋있어!”
눈길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며 리키가 빙그레 웃었다. 나도 웃었다. 우리를 위해 먼 도시에서 최선을 다해서 보금자리를 구해준 그가 고마웠다. 집 앞에 들어설 때 경비원 아저씨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짧지만 알고 있는 중국어 “니하오” 하며 나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 기다란 복도를 따라 집에 다다랐다. 한국의 아파트 구조와는 매우 달라 이질적이지만, 또 그런 부분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공간이었다. 이런 공간에서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 어쩐지 조금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나 이 집 마음에 들어.”
나의 한마디에 그가 다시 한번 웃었다. 영화 속 인물처럼 사는 일상이 시작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짐을 풀고 우리는 가볍게 동네를 걸었다. 주말을 맞은 사람들, 감각적으로 차려입은 젊은이들,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는 연인들, 반려견과 함께 천천히 걷는 가족들. 그들 속에 우리가 있었다. 함께 카페에 들어가서 핫초코와 커피를 시키고, 눈에 띄어 예정에도 없이 들어간 서점에서 한자로 가득 찬 책을 넘겨보며 그리도 꿈꾸던 주말을 함께하고 있는 우리. 서로의 손을 이끌며 조금은 이방인처럼, 조금은 여행자처럼 우리는 나란히 함께 걷고 있었다.
그날 저녁엔 리키가 소개한 윈난 성 음식점을 찾았다. 간판도 메뉴도 모두 중국어였고, 대기번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로 불려졌다. 우리는 함께 대기석에 앉아 눈을 열심히 굴리며 식당 직원분이 언제 우리의 번호를 부를지 집중했다. 배가 고픈 나머지 서너 번은 직원에게 “지금 우리 차례가 맞나요?” 몸짓으로, 또 번역기로 물어봤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편하거나 창피하지 않았다. 우리는 낯선 것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것을 함께 마주하는 방식은 언제나 웃음이 먼저였다.
음식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맛있었다. 제일 먼저 나온 소고기튀김은 바삭하고 고소했고, 씹을 때마다 입 안에서 육즙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바나나잎에 싸여 나온 버섯 요리는 고수의 향이 깊고 놀라울 만큼 감칠맛이 넘쳤다. 이어 마지막으로 나온 매콤 새콤하게 양념된 닭고기 요리는 냉채처럼 차가웠지만 그 조화가 오히려 중독적이었다. 입 안에 감도는 향신료의 여운이, 이 도시에 정착하는 우리의 첫날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70%는 익숙하고 30%는 새로운 맛. 꼭 우리 같았다. 서로에게 점점 익숙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낯선 결을 품고 있는. 그래서 더 매력적인.
그날 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깊이 잠이 들었다.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조용했다.
그의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몸이 이완되는 그 기분. 완전한 휴식.
그 휴식 속에서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상하이에서의 삶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길을 외워야 하고, 언어를 배워야 하며, 지하철 노선을 익히고, 마트에서 음식재료들을 새로운 이름으로 익혀야 한다. 그러나 낯설고 복잡한 것들을 향한 두려움보다,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시 처음처럼 살아가고 있다.
서툴게 길을 찾고, 엉뚱한 주문을 하고, 어색한 억양으로 인사를 하고.
그러나 그 속에서 늘 함께 손을 잡고, 낯선 간판을 읽고, 도시의 냄새를 기억하며.
그렇게, 이 도시에 천천히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처음에,
리키와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