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강력한 마법
보석은 대체로 비싼 것들이 품질이 좋고 아름답다. (여기서 세팅은 따로 분리하고 보석만) 하지만 비싼 돌이 다 품질 좋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좋은 돌을 제값에 사는 것은 좋지만 나쁜 돌을 비싸게 사지 않으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또, 아름답다고 꼭 비싼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개개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취향과 가치를 한정된 자원 안에서 적절히 안배하며 어울리는 적당하고 아름다운 보석을 찾아내는 것은 흥미진진한 모험이다.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색상과 형태에 나름의 취향이 있어서, 보석시장에서 잘 팔리고 최고라고 말하는 보석보다는 개성을 가진 중하급 보석들이 더 즐거웠다. 노란색은 싫어하고 회색이나 색이 섞인 것, 이색석 등을 선호한다. (시장에서는 순색, 원색을 선호한다.) 친한 보석 친구는 노랑은 괜찮은데 회색을 싫어해서 같은 돌을 놓고도 호불호가 나뉘었다. 우리가 똑같은 돌을 가지고 구매 경쟁할 일은 절대 없었다.
착용해서 어울리는 보석도 크기도 사람과 피부톤 나이대 따라 다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보석이 커지고, 큰 보석일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고 욕심이 날 때마다 변하지 않나 싶다.
아름다운 보석이 크기까지 하면 심장을 치는 감동이 있다. 정말 머릿속이 하얘지고 너무 예쁘다 갖고 싶다. 생각밖에 안 든다.
보석에 흠집이 나서 폴리싱이나 리커팅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 중량을 확보하는 것은 좋다.(이때 주의할 것은 유색은 너무 많이 깎으면 색농도가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조건 크고 비싼 게 좋은 것은 아니다.
혹자는 되팔리는 조건에서 몇 캐럿 이상 어느 산지 등등을 말한다. 모두 매입자가 나타난다는 전재다. 당장 돈이 필요해서 비싸고 좋은 보석을 내놨지만 몇 년씩 팔리지 않기도 한다. (동네나 자주 가는 금은방 매장에서 좀처럼 자리를 바꾸지 않는 유색 세팅들을 생각해 보라.) 오늘 내놓았는데 내일 팔리기도 한다. 누가 언제 보석과 만나 주인이 될지는 모르는 거다.
때로 돈이 있어도 마음에 드는 보석이 나타나지 않고, 나타났는데 자금이 충분치 않아 놓아버려야 할 때도 있다. 보석 친구들끼리는 이걸 '석연'이라고 부른다. 돌에도 인연이 있고 만남이 있다.
잔잔 부리 준보석이나 급 낮은 보석에 많은 돈을 쓰기보다는 좋은 보석 한 개를 사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 좋은 보석 하나를 알아보기 위해서 잔잔 부리 한 것들에 수업료를 내며 관찰하고 배우지 않았을까?(나는 이미 돈을 썼으니 긍정적인 편이 났지 않을까? ㅎㅎㅎ)
할머니들의 커다란 자수정 반지, 산호반지, 왕진주 목걸이 같은 것들이 촌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큰 보석만 장바구니에 넣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혼란스럽다. 사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데일리 주얼리는 5부 안팎의 작은 피어싱과 1캐럿 근방의 가벼운 목걸이다.
젊고 체력 좋고 보석에 욕심이 많았을 때 20캐럿 토파즈도 멋지게 걸고 다녔다. 나이를 먹고 덩치가 작아지고 손가락은 뭘 끼면 아파져서 반지는 아주 잠깐씩만 끼고 데일리 귀걸이는 젊은 사람들이 쓰는 작은 피어싱들을 더 잘 활용하게 되었다.
유색 보석을 고를 때는 시장에서 최고라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색 위주로 싫어하는 색은 열외로 두고 피부색에 어울리는 것을 고르면 오래 즐겁게 잘 사용할 수 있다.
유색 보석은 사실상 재판매가 어렵다.
정말로 크고 좋은 보석은 드물고 귀하기 때문에 판매상들은 투자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살 사람이 있는 경우고, 사는 것에도 공을 들이며 진을 빼는 나 같은 사람은 파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일부 귀하고 큰 유색들은 그 돌을 취급하는 상점에서 새 제품 구매를 전제로 재 매입을 해주기도 하고, 구입처에서 재매입해 주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구입가의 절반정도 쳐준다고 들었다.(개개인 중고 거래가 낫지 않나 싶다.)
단골 상점과 협의하에 새 제품처럼 말끔히 해서 전시한 후 팔리면 상점과 이윤을 나누는 방법도 있다. 또 물가에 따라 보석값은 대부분 상승하니까 마음에 든 보석은 지금이 1년 후보다 저렴한 것은 확실하다. 다만 물가 변화와 금값의 상승률과 다른 자산들의 투자가치에 비하면 별로 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보석은 비싸고 필수품도 아니다. (물론 아름다움이 필수품인 사람들도 있다.)
보석의 아름다움은 세속적이지 않은데 속세에서 거래되는 가격을 생각하면 척박한 네덜란드 땅에서 핀 아름다운 튤립이 열광과 투기의 대상이 되었던 이상한 열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나에게도 그런 열기가 머물렀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언가.
나는 섹슈얼함 1도 없고 말도 체온도 없는 무심함 자체인 존재와 사랑에 빠졌다.
일방적인 짝사랑이다. 로맨스와의 공통점이란 금전과 애정과 정성이 듬뿍 필요하단 거다. 어쩌면 진짜 연애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다. (보통 연인과 귀한 인연과 기념일에 보석이나 귀금속이 쓰이는데, 나는 반대로 보석을 사랑하고 결혼보다는 다이아반지가 갖고 싶었고 연애는 안 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사랑했으니 이별도 했다.
몇 번이나.
나는 보석에게 한밤중에 '자니?'하고 묻는 미련 많은 구여친처럼 굴었다.
우리는 헤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사귄 적도 없다. 일방적인 나의 짝사랑이다.
이별 사유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이다. 어쩌면 많은 진짜 연인들도 그렇게 이별했을지도 모른다.
우린 헤어졌어. 다시는 만나지 말자. 행여라도 마주치지 말자.
이런 건 책도 많고 노래도 많다. 나는 정말로 보석과 다시 사랑에 빠질까 봐, 시간과 감정과 금전을 다 소진하고 가질 수 없는 욕망에 시달릴까 봐, 종로를 피해 다닌 적도 있었다. (이 문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는데, 맨뒤에 적겠다. 궁금하시면 맨 끝줄로~~)
다행히 티파니나 까르띠에 에르메스 반클리프아펠 불가리 골든듀등의 유명 브랜드와 이름도 모르는 (존재한다는 것은 풍문으로 안다) 최고급 브랜드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그럴 여윳돈이 없었다. 친구들이 간혹 선호하는 고급 주얼리 브랜드를 보여주면 열심히 구경했는데 다행히 끌리지 않았다.
그리고 최종점, 나는 돌은 좋아하는데 금속은 싫어했다.
은과 금에 대한 어릴 적의 선망은 현실의 금전가치 속에 완전히 와해되었고, 그 뒤로는 외양에 매료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금공주 은공주들에 대한 동화책을 다시 읽으면 살아날까?) 화학적 성질면에서는 아직 궁금증이 남아 있지만 탐구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갈수록 높아지는 눈은 아름답고 고가인 돌들만 들어왔다. 갖고 싶은 것을 샀다가는 황새 따르던 뱁새가 다리가 찢어져 죽을 판이었다. 보석은 보험을 들 수 없다. 가치를 환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험책에서 이 부분을 읽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분명 돈을 주고 샀고 시장에서 거래되는 캐럿단위 단가가 있는데 보험이 안된다고? 골동품이나 미술품도 안된다고 쓰여 있었다.) 내 가계 사정에 되팔기 어려운 (순금 외에) 것에 돈을 쓰는 것은 헛되었다.
나에겐 보석보다 귀한 아이와 반려와 털가족들이 있었고 보석의 영원성과 달리 그들은 수명이 있고, 나도 수명이 있었다. 돌들도 깨지고 부서지고 상처 입고 분실되며 영원하지 않지만 나보다는 오래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노안을 맞이하여 더 이상 보석의 아름다움을 전처럼 즐기기 어려워졌다.
가끔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가장 강력한 마법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