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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 1

짝짓기를 거부한자, 모두 유죄

by 은림

메이든은 하얀 기둥에 얼굴을 기댔다. 뺨에 닿는 서늘함이 오싹하고 상쾌했다.


밤은 어슬렁어슬렁 언덕을 기어올랐다. 약속 시간은 더딘 듯하면서도 빠르게, 정확히 규칙적으로 오고 있었다. 메이든은 긴장을 풀기 위해 팔다리를 쭉쭉 폈다. 너무 겁먹을 필요 없다. 자격을 얻지 못하는 불능자를 제외하고 마을 처녀들 모두가 치르게 되는 시험이다. 메이든이라고 특별히 어려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긴장을 늦춰선 안 됐다. 시험의 성공률은 반반으로 결과가 매우 불확실한 모험이다.

게다가 메이든은 마을 최연소 자격자였다.


“축하해, 메이든. 이번 자격자 명단에 올랐어. 네가 최연소야.”


보름 전, 시스에게 통보를 받은 메이든은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다음 말을 듣고 바로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쟌도 최연소로 올랐어.”


“저와 쟌요?”


메이든은 귀를 의심했다. 다른 누가 함께 뽑혔어도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겠지만 하필이면 쟌이라니!


“그래. 동급생들 중에는 너희 둘 뿐이야. 축하해.”


시스는 속도 모르고 자랑스럽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메이든은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어째서 쟌이지? 걘 가슴만 큰 바보잖아.”


집에 돌아온 메이든이 혼자 벽에 대고 씩씩댔다. 그녀는 똑똑한 데다 노력파였다. 마을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쟌은 아니었다. 그 앤 아직 버찌열매를 따 먹고, 나비를 좇고, 꽃밭을 뒹굴며 수다를 떠는 게 전부인 멍청이가 아닌가.


“억울해! 억울해! 억울하다고! 그런 무뇌충과 같은 취급이라니!”


“뭐가 말이니?”


“엄마?”


메이든은 깜짝 놀랐다. 엄마가 막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메이든은 얼른 표정을 감췄다.


“소식은 들었다.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메이든은 상냥하지도 차지도 않게 마치 남인 양 엄마를 맞았다. 엄마도 새삼 많은 걸 기대하진 않았다.


“오래는 안 있으마. ‘파종’에 필요한 몇 가지를 챙겨 왔다.”


엄마가 내려놓은 바구니에는 화분과 꽃삽, 물뿌리개 등이 있었다.


“이미 다 준비했는데요.”


“……그래? 그럼 찬통만 두고 가마. 금줄 기간 동안 먹을 게 없으면 곤란할 테니까.”


“오늘 시장에 다녀온 참이었어요. 식료품은 넉넉해요.”


“여전히 준비성이 좋구나.”


“엄마가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죠.”


“그래, 그럼 아무것도 필요 없을 테니 가겠다. 뭔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아니다 당연히 없겠지.”


“조심해서 가세요.”


메이든은 엄마를 배웅하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엄마의 눈에는 딸이 문을 닫기 위해 나온 것처럼 보였다.





“주의사항은 잘 알고 있지?”


시스가 메이든과 쟌을 앉혀놓고 물었다.


“말하지 말 것, 손을 만지지 말 것, 포옹하지 말 것, 키스하지 말 것.”


둘은 앵무새처럼 지저귀었다.


“그래.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씨앗’을 받아 빠져나올 것. 이상이다.”


시스는 안심한 듯 보였다. 그때 쟌이 재빨리 물었다.


“왜 키스하면 안 되죠?”


메이든은 기가 막혔다.


“너 바보지? ‘그자들’은 괴물이야. 서쪽의 나락에서 온 흉측한 괴물. 지저분한 털투성이에 냄새 고약하고, 사납고 흉포하다고. 설마 문헌도 안 본 거니? 아니면 괴물과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 취향이 독특한 거니?”


“하지만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런 규칙이 있잖겠어?”


쟌은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고 반문했다. 메이든은 할 말을 잃었다.


“답. 치명적인 독이 있으니까. 됐니, 쟌?”


시스가 대신 대답했다.


“하지만 유혹자들이 있다면서요.”


쟌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생겼다는데, 그런 자들이라면 만져보고 싶지 않을까요?”


“어리석은 꿈 꾸지 마라, 쟌. 그건 우리를 낙오시키기 위한 미끼야. 그러니까 더 조심을 해야 해. 하지만 요 몇 년간은 유혹자를 만났다는 보고가 없으니 안심하려무나. 규칙만 잘 지키면 문제없이 ‘씨앗’을 가져올 수 있을 거다.”


“시스는 어땠어요?”


메이든은 수업을 어서 마치고 돌아가 쉬고 싶었다. 그러나 쟌 때문에 발목이 잡혀버렸다. 정말 눈치코치골치인 계집애였다.


“내 경우에도 괴물이었어. 이만 끝내자. 내일 너희는 어렵고 중요한 시험을 치러야 하니까 일찍 가서 쉬는 게 좋아. 꿀을 나눠주마. 자기 전에 먹어라. 마음이 안정되어 푹 잘 수 있을 거야.”


“네.”


쟌은 먹을 게 나오자 궁금증 따윈 금세 잊고 희희낙락하며 꿀단지를 받아 갔다.


“바보 무뇌충.”


쟌이 돌아간 뒤에 메이든이 투덜댔다.


“메이든.”


“앗, 들으셨어요?”


시스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 하나 충고하자면 이건 머리가 좋다고 잘되는 일이 아니란다.”


“그건 쟌은 성공하고 저는 실패할 거란 말씀인가요?”


“아니야, 전혀. 운이 많이 따른다는 뜻이란다. 가서 쉬렴.”


메이든은 한참 망설였다.


“만약에, ‘씨앗’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열매에서 ‘그자들’만 나오면 어쩌죠?”


결국 묻고 말았다. 쟌처럼 철없게 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실은 두려웠다. 엄마처럼 될까 봐. 메이든의 엄마는 ‘그자들’을 넷이나 낳았다. 그건 실패나 다름없는 인생이었다.


“걱정하지 마. 일단 자격을 얻었으니까 다음 시험에서 성공하면 돼.”


그러나 메이든에겐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시스도 무서웠어요?”


“그래. 하지만 성공했으니까 괜찮아. 너도 그렇게 될 거다.”


그 말에 메이든은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만 조심해, 메이든.”


“뭘?”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메이든은 시스의 입술에서 다하지 못한 말을 읽었다.


“네.”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메이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낙오자를 딱 한 번 보았다. 그녀는 뒷집의 독서가였다.

독서가는 여섯 번의 시험을 치렀고 네 명의 아이와 두 명의 ‘그자들’을 낳았다. 그녀가 낙오자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낙오자는 메이든처럼 처음 시험을 치르는 경우에나 나오지 능숙한 경력자가 저지르는 실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뒷집의 독서가는 일곱 번째 시험을 거부해 낙오자가 되었다.


메이든은 그때 낙오자가 뭔지도 몰랐었다. 그래서 독서가가 병에 걸린 거라고, 엄마 말처럼 매일 방구석에서 책만 보다가 책 곰팡이가 옮은 거라고 생각했다. 낙오가 뭔지 알게 될 때까지 메이든에게 독서가는 책 곰팡이에게 살해당한 사람이었다.





메이든은 저녁 바람에 차게 식은 손을 가슴에 넣었다. 가슴 바로 아래에 인두로 지진 듯한 새빨간 피멍이 있다. ‘자격’을 뜻하는 홍반이었다. 홍반은 시험을 통과한 후 씨앗에서 난 떡잎으로 약을 바를 때까지 계속 커지고 아플 것이다.


시간이 거의 다 됐을 텐데 서쪽 지평선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자’는 늦을 모양이다. 메이든은 빨리 끝내고 새벽 전에 집에 가고 싶어서 애가 탔다. 너무 늦는 건 좋지 않다. 해가 뜨기 전에 돌아가 파종해야 싹을 틔우기도 좋다. 하루가 지나면 씨앗이 건조해져 싹을 틔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 지금까지의 노력도 모두 헛수고가 된다.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메이든의 꿈은 일곱 명의 딸들과 그에 걸맞은 일곱 채의 집, 그리고 늙어서 시험을 치를 수 없을 때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황금이었다. 딸을 일곱쯤 거느린다면 사회에서 존경을 얻을 테고, 거기에 늙어서 필요한 황금까지 획득한다면 그야말로 최고로 성공한 인생이었다. 메이든은 절대로 엄마처럼 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엄마는 다섯 명의 아이를 가졌지만 그중 넷은 애석하게도 ‘그자들’이었고 메이든만 딸이었다. 씨앗에서 난 아이가 계집애면 후계자로 삼고, ‘그자들’이면 황금과 함께 ‘서쪽’으로 보냈다. 때문에 모녀의 살림은 언제나 빠듯했다. 궁핍한 삶에서 메이든의 유일한 위안은 독서가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독서가는 작은 단층집에 살았다. 가뜩이나 좁은데 벽마다 책으로 꽉꽉 차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집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딸을 넷이나 가진 데다가 살림도 넉넉해서 탁자에는 언제나 과자와 간식거리가 있었다. 옆집 꼬마가 놀러 와 축낸 대도 언짢아할 사람도 없고 주인은 언제나 책을 읽느라 바빴다.


메이든은 과자를 먹은 다음 옆에서 책을 읽었다. 독서가는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거나 더러운 손으로 책을 만지면 안 된다는 몇 가지 주의사항 외에는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다. 덕분에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그 집은 언제나 달콤한 황금색이었다. 햇볕이 드는 날 보얗게 떠오른 금빛 먼지 때문에 목이 꽉 잠겼지만 달콤한 과자와 오래 묵은 이야기들이 바스락대는 종이 냄새는 환각처럼 아름다웠다.



그곳에 접근 금지령이 내렸을 때, 메이든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거기 가면 안 돼.”


“왜요?”


“그 사람은 아파. 그러니까 네가 가서 귀찮게 하면 안 돼.”


메이든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원래부터 엄마는 메이든이 그 집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무시했다.


독서가는 여느 때처럼 ‘꿈의 방’에 있었다. 책이 겹겹이 가득 찬 비좁은 공간은 어른과 아이가 다리를 쭉 펴고 앉으면 꽉 차는 크기였다.


“어떻게 왔니? 너희 엄마가 못 오게 했을 텐데?”


독서가는 책에서 머리를 들었다. 메이든은 반쯤 걷힌 소매 속으로 끔찍하게 번진 홍반을 보고 놀랐다.


“피나요? 왜 그래요?”


“괜찮아. 너희 엄마가 아무 말씀 안 하시던?”


독서가는 얼른 소매를 내렸다.


“꽃을 가져왔어요.”


메이든은 붉은색과 황금색이 섞인 아름다운 꽃들을 좁은 방구석구석에 장식했다. 독서가는 놀라고도 기뻐했다.


“정말 예쁘다. 아직 꽃이 피기는 이를 텐데?”


“‘제가 동쪽 숲에서 따 온 거예요.”


“동쪽 숲?”


독서가의 안색이 변했다.


“네.”


“거기 가면 안 돼, 메이든. 아무도 말 안 해주던? 두 번 다시 가지 마라. 그 꽃은 당장……,”


독서가는 꽃병의 꽃을 버리려다가 도로 꽂았다.


“아니다. 그래, 잘 받으마. 고맙다. 대신 두 번 다시 그 숲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왜요?”


“그곳은 낙오자들의 숲이야. 네가 거기 간 걸 아시면 엄마가 화내실 거다.”


“낙오자가 뭔데요?”


메이든의 반문에 독서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메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그냥 손을 내렸다. 메이든은 그게 무척 섭섭했다.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만 가라. 어머니가 마중 나오셨어.”


메이든은 그제야 창밖에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엄마는 메이든을 불러내지도, 문을 열라고 두드리지도 않고 유령처럼 서 있었다.


독서가는 메이든을 배웅하지 않았다. 두 어른 여자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엄마는 메이든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고 갔다. 메이든은 그날 태어나서 맞은 매를 전부 합한 것의 두 배를 맞고 벽장에 갇혔다.


“흐…… 엉…….”


메이든은 장 속에서 울었지만 아파서 운 게 아니었다. 다시는 독서가와 만나지 못하리라는 걸, 그게 엄마나 벽장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이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엄마의 감시가 소홀해지자 옷걸이로 벽장 경첩을 비틀어 열고 독서가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막상 집 앞에 서자 들어가기가 망설여져 한참을 서성댔다. 창문 너머로 부엌 등잔 아래 서 있는 독서가가 보였다. 얼굴까지 번진 홍반에서 스며 나온 피가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져서 고개를 기울여 책을 넘기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독서가는 웃고 있었다. 메이든은 그 미소가 기이해서 더럭 겁이 났다.


독서가는 온몸의 홍반이 완전히 굳기 전에 마당으로 나왔다. 피껍질로 딱딱해진 시체를 집 밖으로 져 나를 수고를 덜어주려는 의도였다. 메이든은 독서가가 몸을 삐걱대며 집밖으로 나오는 걸 지켜보았다. 무서웠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당에 선 독서가는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괴괴’ 하고 울었다. 정확히 말하면 성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말라붙은 몸속에 바람이 들었다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몸부림치는 소리였다. 하지만 메이든은 독서가의 울음소리라고 생각했다.


독서가가 말라죽은 나무처럼 뻣뻣해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동쪽 숲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독서가와 무척 닮은 붉은 나무들이 즐비하게 자라고 있었다. 메이든이 꽃을 따 온 붉은 숲, 그건 낙오자들의 무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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