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낙오자 3 (완결)

소녀가 소녀를 사랑할 때

by 은림


“어머, 메이든! 축하해! 시험은 어땠어? 씨앗은 잘 크고 있어?”


메이든이 오랜만에 신작로로 나가자 참새 떼가 몰려들었다. 메이든은 적당히 대답했다.


“그렇지 뭐.”


메이든은 이 패거리와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들은 너무 수다스럽고 감상적이며 안일했다. 개중에 지금 떠들고 있는 이오가 특히 그랬다. 그녀는 상대가 꺼리는지 아닌지 알아챌 눈치조차 없었다.


“참, 들었어, 들었어?”


“뭘?”


“쟌의 열매는 쌍둥이래.”


메이든은 질투와 모욕감을 삼켰다.


“그래? 축하할 일이네.”


“마침 저쪽에 있으니까 같이 가서 축하해 주자. 굉장하지 뭐야? 동갑내기 중에서 두 사람이나 최연소로 시험에 들었는데, 하나는 쌍둥이라니! 우리 연배는 다들 굉장해! 분명히 다들 성공할 거야!”


메이든은 ‘두 사람’의 성과가 어떻게 ‘또래 전체’의 성공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짜증이 나서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개화가 늦었다며? 실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날씨가 너무 좋지? 분명 멋진 열매를 맺을 거야. 축하해.”


쟌은 분홍색의 통통한 뺨을 빛내며 소녀들 속에서 여왕님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열매를 화분이 아니라 배에서 키운 듯 허리둘레가 엄청났다. 마음이 편해서 희희낙락 뒹굴어댔을 게 분명했다. 메이든은 뱃속이 꿈틀댔다.


“쌍둥이라며, 축하해.”


“고마워. 네 열매도 분명 크고 멋질 거야. 넌 나보다 훨씬 똑똑하잖니.”


쟌은 웃으며 화답했다. 메이든은 그 미소가 너무나도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어쩐지 ‘흥, 똑똑한 체하더니, 봐라. 내가 훨씬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장 보고 오는 길이야? 무거워 보인다. 좀 앉지 그래? 가는 길까지는 들어 다 줄게.”


이오가 권했다. 메이든은 수다쟁이들 사이에 끼고 싶은 맘이 조금도 없었지만 이미 참새 떼가 빙 둘러싸서 빠져나갈 구석도 없었다. 그들은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단순한 목적만으로도 퍽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메이든은 다른 때도 좀 그래 보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고마워…….”


결국 메이든은 쟌과 함께 앉았다.


“정말로 끔찍한 괴물이야? 너도 잡아먹힐 뻔했어?”


메이든은 영문을 몰랐다. 이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쟌은 잡아먹힐 뻔했다는데?”


“뭐?”


메이든이 쟌을 돌아보았다. 쟌이 가볍게 헛기침했다. 메이든은 그녀의 허풍에 어이가 없었지만 쟌처럼 평범한 애가 참새 떼의 여왕이 되려면 다른 수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소문 들었어?”


이오가 말을 꺼냈다.


“무슨 소문?”


“이번에 뽑힌 ‘서쪽’ 신전지기 말이야. 우리랑 동갑이래.”


“뭐어?”


소녀들은 깜짝 놀랐다.


“거짓말! 신전지기는 노친네들만 하는 거 아냐? 어떻게 그렇게 돼?”


“몰라. 신의 은총을 받았다나 뭐라나? 게다가…….”


이오는 목소리를 낮췄다.


“굉장히 근사하게 생겼대. 털북숭이도 아니고.”


소녀들은 나직이 환호했다. 메이든은 누구를 얘기하는지 금방 알았다.


“와아……. 내 상대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어머, 무슨 소리야. 낙오자가 되면 어쩌려고.”


“그건 싫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쁜 게 좋잖아? 그리고 낙오자랑 예쁜 거랑은 관련 없대. 알아?”


“뭘?”


“이번에 죽은 베베 말이야.”


“베베? 옆 마을의 베베?”


“그래, 낙오된 거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게다가 상대였던 ‘그자’는 대머리에 뚱보였대.”


“어쩜! 말도 안 돼! 낙오자가 되는 것도 모자라 그런 엉터리와? 믿을 수 없어! 바보 아냐?”


“그러니까, 낙오자가 되는 건 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자들’ 때문에 미래의 행복을 차버리고 끔찍하게 말라죽겠어? 안 그래, 메이든?”


이오가 물었다. 메이든은 마일드와 독서가를 생각하느라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아, 뭐라고?”


“얘는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어? 아무튼 서쪽 신전지기가 말이야…….”


소녀들의 화제가 서쪽 신전지기로 모아졌다.


“무슨 얘기 중이야?”


한발 늦게 나타난 더브가 소녀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 서쪽 신전지기 얘기. 털도 없고 꽤 근사하게 생겼대.”


이오가 냉큼 말했다.


“아, 그거 진짜야. 나, 직접 봤어.”


더브의 대답에 소녀들이 환호했다.


“오오오! 정말? 어땠어? 정말로 예뻐?”


“응, 어리더라. ‘그자들’을 안 닮고 우리를 닮았어. 예쁘다고 말하긴 그렇고. 독특하던데.”


“어떻게 봤어?”


메이든이 물었다. 괜히 으스대고 싶은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더브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자정 미사에서. 우리 신전지기가 아팠나 봐. 대신 나왔던 거지. 나를 보더니 웃더라.”


순간, 메이든은 가슴이 빠각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오도 샘이 났는지 볼을 잔뜩 부풀렸다.


“거짓말! 왜 너를 보고 웃냐?”


“미사 때 나 빼고 다 어른이었거든.”


“조심해, 더브. 그러다 낙오자 되는 거 아냐?”


쟌이 말했다. 더브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 쳤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신전지기한테? 말도 안 되지. 안 그래 메이든?”


“아, 미안 못 들었어. 딴생각하느라.”


실은 정확히 듣고 있었다.


“메이든, 아까부터 왜 그리 맹해?”


이오가 추궁했다.


“씨앗이 걱정되나 보지. 나도 그랬는걸.”


쟌이 너그럽게 웃었다. 메이든은 그들이 뭐라고 하건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


“더브 그 얘기 좀 더 해봐. 서쪽 신전지기가 또 미사에 나올까? 우리 보러 가지 않을래?”


이오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자정미사였는데? 나도 할머니 모시고 가느라 간 거였어.”


“허락받으면 되지.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아하실걸?”


“그래 볼까? 그럼 갈 사람?”


“나!”


“앗, 난 갈래.”


“나도 궁금해.”


여기저기서 손바닥이 보였다. 손을 들지 않은 건 쟌과 메이든뿐이었다. 쟌은 열매 두 개를 돌보느라 바쁘니 당연했고 메이든도 같은 핑계를 댔다.


“그만 갈게.”


“나도 같이 가.”


쟌도 따라 일어섰다.

한적한 오솔길을 걸으며 쟌이 말했다.


“메이든. 너 창백한데 괜찮아?”


“응?”


“아까부터 계속 굳은 얼굴이었다고. 네가 그 애들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지만 그렇게 티 낼 필요는 없잖아? 이오는 계속 네 눈치만 보면서 말하더라. 원래 걔가 말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네가 그렇게 조용히 있으니까 어색해서 더 그랬던 거야. 알아?”


“응.”


실은 몰랐다. 그리고 쟌이 이런 식의 얘길 할 수 있는 애란 것도 몰랐다.


“뭐랄까. 너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난 시험 덕분에 좀 편해졌어. 다들 알고, 나도 인정하다시피, 나 감정적이잖아. 엄마가 무척 걱정하셨거든. 나 같은 애가 ‘그자들’의 마수에 걸리기 딱 좋다고. 그런데 막상 대해보니 그렇지도 않던걸. 각오를 단단히 해서일까? 아무튼 결과가 좋으니 다 좋은 거겠지만.”


메이든은 묻지도 않은 얘길 조잘대는 쟌이 짜증스러워서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홍반이 욱신대서 신경이 온통 그쪽에 쏠렸다.


“서쪽 신전지기, 실은 나도 봤어. 금줄 기간에 외출하면 야단맞으니까 숨기고 있었는데 너무 답답했거든. 새벽 산책 삼아 신전 쪽으로 갔는데, 서쪽 신전지기가 있더라고. 한눈에 알겠던걸. 이건 비밀인데…… 무척 친절한 사람이더라.”


순간 메이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쟌이 ‘그날’ 신전에 왔을까? 메이든은 곁눈질로 쟌의 안색을 살폈다. 쟌은 평소처럼 태평했다. 하지만 저 계집애는 꿍꿍이를 숨기고도 멍청한 얼굴을 할지도 모른다. 메이든은 숨이 막혔다.


“뭘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랑은 아무 상관없으니까 그만 좀 떠들래?”


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메이든, 너 이상해. 왜 그렇게 곤두서 있어? 씨앗 때문이야?”


“다 알면서!”


메이든은 휙 쏘아버리고는 후회했다.


“뭘 말이야?”


쟌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피곤해서 그래. 내버려 둬.”


메이든은 시장바구니를 빼앗듯이 돌려받고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돌아와 문고리를 걸자마자 벽에 기대 주저앉은 메이든은 머리를 싸쥐었다. 쟌은 아무것도 모른다. 메이든은 성공적으로 열매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도 뭔가가 석연치 않았다.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쯤은 얼마든지 눈감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전해줘요.’


‘마일드는 죽었어요.’


메이든은 욱신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서 쉬고 싶었다. 그때 공교롭게도 엄마가 찾아왔다.


“메이든, 안에 있니? 엄마다.”


메이든은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문을 열었다.


“어쩐 일이세요?”


“잠깐 들어가마.”


메이든이 물러서자 엄마가 등 뒤의 문을 닫았다.


“‘그 집’ 열쇠, 네가 갖고 있니?”


메이든은 엄마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고 조금 놀랐다. 엄마의 입에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을 얘기였다.


“아뇨?”


독서가의 집 열쇠는 언제나 그 집 계단 아래 있었다. 최근에 메이든이 문을 열 때도 거기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오면서 어디에 두었더라?


“왜요?”


메이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찌 됐던 그녀의 소유니 마음대로 들락거려도 되지만 아직 엄마 앞에선 움츠러들었다.


“서쪽 신전지기가 찾아오셨다. 네가 없을 때. 그 집에 용건이 있다 하셨어. 주인이 없으니 내가 대신 집으로 안내했지. 잠겨 있을 줄 알았는데, 열려 있더라. 걱정했는데 별거 아닌 모양이구나.”


“신전지기가 그 집에 왜요?”


“그야 나는 모르지. 그분들의 일이니까.”


메이든은 한참을 생각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긴? 그분들 일에 내가 뭘 어쨌겠니?”


메이든은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어쩐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튼, 별일 없는 거면 됐다. 집은 항상 잠가둬라. 아무리 네 거라지만, 그 집 자식들이 보기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네.”


엄마는 떠났다. 메이든은 문을 닫았다. 그때 좁은 문틈을 비집고 시커먼 그림자가 뛰어들어 왔다. 메이든은 깜짝 놀랐다.


“신전지기?”


믿을 수 없지만 정말로 서쪽 신전지기였다.


“‘그 책’ 당신이 갖고 있죠?”


메이든은 어리둥절했다.


“책이라뇨?”


“마일드가 이든에게 준 빨간 책이요. 그 집에 있어야 하는데 없었어요.”


“전 그 집에서 아무것도 갖고 나오지 않았어요.”


사실이다. 그때 너무 놀라서 열쇠도 잊고 나왔다.


“어쩐다…….”


서쪽 신전지기가 바지 자락에 손을 비볐다. 등잔 불빛이 그리 밝지 않은데도 바지 천에 밴 땀얼룩이 똑똑히 보였다.


“어떤 책인데요?”


메이든은 그가 약간 불쌍해졌다.


“마일드가 직접 쓴 책이에요. 빨간 양장본인데 굉장히 오래된 거라 낡아서 너덜너덜하죠. 그의 유품이에요.”


신전지기의 목소리는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마일드의 죽음을 전할 때도 그런 목소리였다. 메이든은 그가 너무나 슬프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는 걸 알았다.


“부엌에서 본 것 같아요.”


메이든이 미간을 문질렀다.


“경황없이 나와서 어디에 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집에 있을 거예요. 가져오지 않았으니까.”


신전지기는 발길을 돌렸다.


“잠깐요.”


메이든은 등잔을 챙겨 들었다.


“밖이 어두워요.”


“고마워요.”


신전지기가 손을 내밀자 메이든이 등잔을 들고 앞장섰다.


“같이 가죠.”


신전지기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메이든은 모른 척했다.

그들은 어둠을 되짚어서 독서가의 집에 다다랐다. 집 안에 들어간 메이든은 빛이 새 나가지 않도록 창문과 커튼을 꼭꼭 닫았다. 그리고 부엌을 뒤지기 시작했다.


“화덕 근처에서 봤어요.”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책 같은 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박동이 거세지는 신전지기의 심장만큼 메이든도 애가 탔다.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달리 옮겨둔 기억도 없었다.

그때 메이든의 소매 끝에 주전자 주둥이가 걸려 엎어졌다. 땡그랑!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바싹 마른 녹차 잎이 우수수 쏟아졌다. 메이든은 흠칫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미안해요…….”


메이든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뭐가요?”


“그 책, 제가…… 아궁이에 넣었어요. 일부러 그런 건…….”


신전지기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비좁은 아궁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잠시 뒤적이는 소리와 풀풀 날리는 재가 화덕 틈새로 삐져나왔다. 그리고 한참 동안 조용했다. 메이든은 그의 등이 들먹이는 걸 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복도로 나갔다. 좀 있다가 얼굴의 재를 대강 닦아낸 신전지기가 나왔다.


“찾았어요?”


“아뇨.”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신전지기였다.


“됐어요. 그만 가죠.”


“미안해요. 제가…….”


“아녜요.”


신전지기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제가 괜한 욕심을 부렸던 거죠. 그건 마일드가 이든한테 선물한 거였어요. 이제 영원히 그녀 게 됐군요.”


둘은 말없이 집을 나왔다. 메이든은 현관문을 잠갔다.


“동쪽 숲에…… 데려가 줄 수 있어요?”


불쑥 신전지기가 부탁했다. 메이든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침착해. 그는 신전지기다.


“혼자 가셔도 되잖아요? 당신은 신전지기니까.”


“이든의 무덤을 아는 건 당신이잖아요.”


메이든은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둘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걸었다. 숲에 들어서자 어둠이 그들을 바싹 뒤쫓았다. 앞장선 서쪽 신전지기의 등과, 반쯤 가려진 작은 등잔만이 메이든이 볼 수 있는 전부여서 나락을 향해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신전지기의 등에서 배어난 엷은 땀냄새가 현실을 일깨웠다. 메이든은 그 냄새가 별로 싫지 않았다.


“어디쯤이죠?”


숲에 들어서자 신전지기가 소매 속에 숨겼던 등잔을 꺼냈다. 순간 숲 전체가 거대한 등불처럼 타올랐다. 메이든은 숨을 멈췄다. 서로 가지를 얽은 붉은 나무들의 모습이 경이로우면서도 소름 끼쳤다.


“이쪽이에요.”


메이든은 독서가의 나무로 신전지기를 안내했다. 10년이 넘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신전지기는 독서가의 나무 옆에 작은 구덩이를 파더니 뭔가를 심었다.


“그게 뭐예요?”


“마일드의 재예요. 그는 먼지가 되어 죽었죠.”


메이든은 ‘그자들’이 어떻게 죽는지 몰랐기에 재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신전지기는 흙을 덮고 땅을 토닥였다.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했으니까 같이 있는 게 좋겠죠.”


“그 말…… 신전지기답지 않아요.”


“알아요.”


신전지기가 웃었다. 메이든은 불쑥 가슴이 저렸다.


“가죠.”


신전지기가 앞장섰다. 둘은 마을 어귀에서 헤어졌다.

메이든은 서쪽으로 사라지는 신전지기의 뒷모습을 오래, 아주 오래 지켜보았다.





“흑…….”


집에 돌아온 메이든은 갑갑해진 가슴받이를 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홍반에서 배어 나온 피가 흥건히 배어 있었다. 메이든은 와락 겁이 났다.


“약 바를 시기가 지나서일 거야…….”


메이든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두 번째 씨앗의 떡잎이 떨어지길 기다리느라 아직까지 약을 바르지 못한 탓이다. 약만 바르면 홍반은 사라질 것이다. 메이든은 서둘러 화단에 떨어진 떡잎을 개어 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홍반 주위에 넓게 발랐다. 피는 이미 멈춰서 딱딱하게 딱지가 앉아 있었다. 메이든은 안도했다.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다.


짓이겨진 풀잎에서 나는 시원한 향기가 통증을 가라앉혀 주었다. 메이든은 오랜만에 편히 잤다.





메이든은 두 그루의 나무를 보고 있었다. 한 그루는 동쪽 끝, 다른 한 그루는 서쪽 끝으로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땅속 깊은 곳에서 뿌리가 맞닿아 있었다. 두 나무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바람이 목소리를 전했다. 가끔은 시냇물이, 가끔은 나비가, 새가,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둘의 대화를 전했다. 나무들은 꿈의 방에 있는 책을 얘기하고 있었다. 서쪽 나무는 그 방을 꼭 구경하고 싶다고 했고, 동쪽 나무는 언젠가는 볼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연인들이 속삭인다.


‘안 돼요, 이든! 마일드를 만나면 안 돼. 당신은 낙오될 거야!’


이든은 이미 낙오자였지만 메이든은 깨닫지 못했다.


‘그자에게서 떨어져요! 제발요.’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잎이 피지 않는 나뭇가지들이 부스럭댔다.


‘괜찮아, 메이든. 난 어떤 성공보다도 지금이 최고로 행복하단다. 너도 행복해지렴.’


‘이든!’


마일드와 이든은 사라졌다. 주변은 발 디딜 곳도 찾을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메이든은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그때 포근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서쪽 신전지기가 웃고 있었다.



“……이든, 메이든, 일어났어?”


메이든은 쟌이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은 새벽의 푸른 기운으로 가득했다. 무슨 꿈을 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따스하고 편안했던 느낌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메이든은 기분 좋게 몸을 일으키다가 맨살에 닿는 질척한 느낌에 흠칫했다


“으앗!”


손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메이든! 괜찮니?”


쟌이 허락도 없이 쿵쾅대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메이든은 간신히 기어가 침실 문을 걸어 잠갔다.


“괜찮아. 쥐가 나왔어.”


“저런! 잡아줄까?”


“됐어. 도망갔어.”


“뭐 좀 도와줘? 내가 물이라도 갖다 줄까?”


“괜찮아. 그리고 나 속옷 차림이거든.”


문 너머의 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방해했니?”


“응.”


“미안해. 다음에 다시 올게.”


잠시 후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메이든은 문고리에 매달려 훌쩍였다.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침대부터 마룻바닥까지 죽죽 그어진 핏자국이 난무했다. 그 핏길은 바닥에서 다리로, 무릎으로, 납작한 배로, 그리고 가슴으로 이어져 있었다. 홍반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메이든은 자기가 낙오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흐흑…….”


메이든은 소리 죽여 울었다. 이런 때 어째서 ‘그자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신전지기라 병을 고칠 수 있어서일 거야. 메이든은 변명했다. 그러나 낙오는 신전지기도 고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메이든은 눈을 감았다. 조롱과 비난 속에서 끌려 나가는 붉은 몸뚱이가 보였다. 그녀는 독서가처럼은 할 수 없었다. 우스꽝스러운 이오나 쟌의 동정을 받을 순 없다.


메이든은 바닥을 더듬었다. 약을 만들 때 쓴 도구 상자가 근처에 있었다. 안에 든 작고 날카로운 칼을 쥐자 피에 젖어 미끌미끌한 손에 선뜩한 한기가 들었다. 메이든은 심호흡했다.


“난 낙오자 따윈 되지 않아.”


메이든은 작은 칼로 목을 찔렀다. 독서가의 웃음이 떠올랐다. 메이든도 웃고 있었다.




집을 나서면서 쟌은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불길한 기분에 발이 떨어지질 안았다.

쟌은 얼마쯤 가다가 뒤돌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이 없었다. 쟌은 바깥문을 걸어 잠그고 열쇠통에서 열쇠를 찾아 메이든의 침실 문을 열었다. 작은 몸뚱이가 소리 없이 문을 따라 쏟아졌다. 이미 숨은 없었다.


쟌은 피가 옮겨 묻지 않게 옷을 모두 벗고, 부엌에서 물을 떠다가 문과 바닥의 핏자국을 말끔히 씻어냈다. 메이든의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깨끗한 침대에 누운 메이든은 잠자는 듯했다. 목에 난 칼자국은 깊지만 작아서 머리카락으로 감추자 보이지 않았다. 피 묻은 옷과 시트를 허브와 함께 태워 집 안의 피 냄새를 말끔히 없앤 쟌은 처음처럼 옷을 입고 조용히 집을 나왔다. 새벽이라서 인적이 없었다.


쟌은 마당을 지나치다 갓 꽃피기 시작한 연두색 나무를 보았다. 삐죽이 내밀어진 꽃잎은 신전지기의 눈처럼 파란 하늘색이었다. 쟌은 화단에 물을 주고 떠났다.



keyword
이전 04화낙오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