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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 2

사랑에 빠진 자, 모두 유죄

by 은림


메이든은 뜨끔뜨끔한 가슴을 눌렀다. 참기 어려울 만큼 아팠다. 홍반이 아무리 성공의 자격조건이래도 메이든은 이 통증이, 불쾌감이 결코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


이를 악무느라 새어 나온 눈물에 서늘한 것이 닿았다. 메이든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그자’가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그자’는 눈물 묻은 손끝을 핥았다. 메이든은 오싹했다. 이것이 ‘그자’?


“털북숭이 괴물이라던데?”


무심결에 말해놓고 메이든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말은 ‘위험’했다. 말은 ‘마력’을 갖고 있어서 소통하게 하고, 끌어들인다. 위험 속으로.

‘그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대게는 털북숭이 상태죠. 오늘은 수염을 깎고 왔어요. 당신들이 싫어한다는 걸 아니까. 보기에 그리 나쁘진 않죠?”

“말 걸지 말아요.”

메이든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자’는 움찔했다.

“아, 규칙. 그랬죠. 너무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군요.”

‘그자’는 가까운 대리석 계단에 걸터앉았다. 메이든은 살금살금 눈치를 살폈다. 위험한 만큼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자’는 괴물도, 유혹자도 아닌, 메이든네 마을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겼지만 같은 사람이었다. 키는 나무처럼 컸지만 무척 말라서 폭력적이라거나 위압감을 주지도 않았다. 팔다리도 두 개씩이고 눈 코 입도 달렸다. 메이든은 그의 손바닥에 자기 손바닥을 마주 대보았다. 똑같이 다섯 개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는 낯익은 냄새가 났다. 바삭한 햇볕 냄새와 책 곰팡이 냄새, 독서가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메이든이 흠칫 손을 뗐다. 그제야 두 번째 수칙이 기억났다. 절대로 만지지 말 것.

“실컷 봤어요? 호기심이 많군요.”

‘그자’는 마치 야생 고양이처럼 자신을 살피는 메이든의 태도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시험, 처음이에요? 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금방 끝나니까.”

“‘씨앗’을 주세요.”

메이든은 초조해졌다. 더 이상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보채지 말아요, 꼬마 아가씨. 나도 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걸 어디 뒀더라.”

‘그자’는 몸을 구석구석 뒤져서 씨앗 주머니를 찾아냈다. 메이든은 얼른 그것을 낚아챘다. 그러나 남자가 먼저 주머니에서 씨앗을 빼냈다.

“내놔요! 안 주면 신전지기한테 이를 거예요!”

“오, 이런 성질도 급해라. 이 씨앗은 당신 거예요. 당신이 가져가 주지 않으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시들어버릴 테니까. 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당신 마을에 ‘이든’이란 여자가 있죠?”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무척 친숙한 것인데도 낯설었다. 그건 독서가의 이름이었다.

“이든을…… 알아요?”

“아는군요!”

‘그자’의 눈이 흥분으로 빛났다.

“잘 있나요, 그녀는? 좋은 여자였어요. 말이 통하는 여자였죠.”

그 말에 메이든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독서가는 말이 통해서 낙오자가 되었다. 그럼 ‘그자’와 말이 통한 메이든도 낙오자가 되는 건가?

“씨앗을 주세요.”

메이든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든에게 전해주세요. 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약속대로 내 이름을 기억하는지 물어봐 주세요.”

“그런 거 몰라요. 못 물어봐요. 씨앗이나 내놔요!”

“물어봐 줄 거라고 약속 안 하면 못 줘요.”

“이든은 죽었어요! 그녀는 낙오됐어요! 똑같은 방법으로 나도 낙오시킬 건가요? 그래요? 그럼 이제 만족하겠군요. 그녀는 당신이랑 말해서 낙오자가 됐어요. 나도 당신이랑 말했으니까 낙오자가 되겠죠!”

메이든은 울고 있었다. 너무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든이 낙오됐어요? 어째서?”

“당신이 이든의 일곱 번째 남자였나요?”

“난 여섯 번째였어요.”

그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씨앗은 가져가요. 만약에 보름까지 꽃이 피지 않으면 여기로 다시 와요. 다른 씨앗을 줄게요.”

“하지만 그건…….”

그건 규칙위반이었다. 황금나무는 대게 보름부터 한 달 사이에 꽃이 핀다. 한 달 이상 꽃을 피우지 못하면 ‘실격’이었다. 하지만 씨앗을 새로 받아 다시 시도하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메이든은 가슴이 뛰었다. 어떻게 하건 그녀에겐 이득이었다.

“괴롭혀서 미안해요. 그리고 증거는 가져갈게요.”

‘그자’는 메이든의 허리띠를 받아갔다. 평소에는 절대로 걸치지 않는 비단 허리띠는 씨앗의 대가로 준비해 둔 거였다.

“보름에 다시 만나요. 당신이 오지 않으면 성공한 걸로 알게요. 축복을.”

서쪽으로 향한 ‘그자’의 등은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메이든은 씨앗을 꼭 쥐고 숨이 턱에 닿도록 동쪽의 마을을 향해 달렸다. 내내 ‘그자’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름도 말해주지 않고서 뭘 물어보라는 거야.”

게다가 이든은 죽었다.




메이든은 집에 돌아와 바라던 시간에 씨앗을 심었다. 씨앗은 반지르르하고 통통한 게 무척 싱싱했다. 메이든은 성공을 예감했다. 싹을 틔워서 정성껏 기르면 황금열매가 열리고 그 안에서 그녀의 아이가 자라게 될 것이다. 한꺼번에 두 개가 열린다면 좋을 텐데. 메이든은 자신의 욕심에 웃음이 났다.


꽃이 피기 전까지는 정원은 외부인 출입금지였다. 메이든은 울타리에 금줄을 걸었다. 맞은편에 뿌연 유리창이 보였다. 독서가의 집이었다. 메이든은 오랫동안 거기에 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자’ 때문이 아니라 독서가가 그리워진 거라고 중얼대면서 메이든은 흙 묻은 손을 씻고 겉옷을 걸쳤다.


독서가의 집 문고리는 먼지와 습기로 바싹 말라 쪼개져 있었다. 억지로 열쇠를 넣고 돌리자 문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메이든이 도끼를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에 문이 열렸다. 오래되어 퀴퀴한 냄새가 훅 끼쳤다. 메이든은 먼지가 이는 나무 바닥을 지나 현관 옆 창과 부엌 창을 벌컥벌컥 열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조금 낡은 정도로만 변했다. 간간이 침실 앞에 어지러운 발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유품을 정리하러 온 딸들의 것이 분명했다. 메이든은 독서가가 생각나 코끝이 시큰했다. 그녀의 무심함까지 그리워졌다.


메이든은 꿈의 방으로 건너갔다. 방 앞에는 오간 흔적이 전혀 없었다. 딸들 중 누구도 독서가의 진짜 유품을 가져가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메이든은 씁쓸한 한편으로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메이든이 꿈의 방문을 열자 어두컴컴했던 집 안에 햇빛이 흘러넘쳤다. 큰 유리창에 얽힌 담쟁이가 나무 바닥에 우아한 그림자를 찍었고 먼지는 10년 전과 다름없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메이든은 시간이 되돌아오는 걸 느꼈다. 오후의 햇살과 바삭한 책 냄새가 방바닥에 눌어붙은 과거를 깨웠다. 메이든은 갓 구운 과자와 흙 향기가 도는 부드러운 녹차 냄새를 맡았다. 독서가는 기분이 좋을 때면 과자를 구웠다. 맛보다는 실험 정신이 투철한 과자였지만 메이든은 싫지 않았다.


메이든은 눈을 감고 기다렸다. 오늘은 또 어떤 이상한 과자가 나올까?

그러나 한참 동안 기다려도 독서가는 오지 않았다.


“또 태웠어요?”


메이든은 부엌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독서가는 없었다. 순간 환상이 사라지고 낡은 부엌으로 시간이 되돌아왔다. 메이든은 잠시 얼떨떨했지만 금방 현실감을 되찾았다. 독서가는 없다. 그녀는 낙오되었다. 메이든은 갑자기 겁이 났다. 중요한 시기에 좋지 않은 장소에 있다니 너무 부주의했다.


“아니야, 이든이 도와줄 거야.”


메이든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독서가는 여섯 번이나 열매를 얻었다. 그건 굉장한 성공이었다.

메이든은 어두워진 부엌에 촛불을 밝혔다. 실로 몇 년 만에 집 안을 밝히는 불이었다. 메이든은 별이 내리는 창밖을 보다가 문득 그곳이 독서가가 마지막으로 서 있던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뭘 보고 웃었던 걸까? 주위를 둘러봤지만 별다르게 짐작 가는 건 없었다. 벽에 걸린 냄비, 국자, 밀대와 누름쇠. 모든 것이 여느 부엌과 다르지 않았다.


메이든은 법랑 주전자를 꺼내 닦았다. 진흙향이 나는 값진 찻잎은 아무도 손댄 흔적이 없었다. 메이든은 깊이 묻힌 흙항아리를 꺼내 찻잎을 덜고 아궁이에 불씨를 지폈다.


아궁이 옆에는 도구 선반이 있었다. 메이든은 거기 놓인 빨간책을 집어 들었다. 부엌에 책이 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책이 상할까 염려가 대단했던 독서가답지 않았다. 메이든은 책의 앞뒤, 옆모서리를 살폈다. 제본 방식이 지금까지 봐온 것과는 달랐다. 그 책은 꿈의 방에 있는 모든 책들과도 달랐다. 메이든은 책을 펼쳤다. 첫 번째 장이 손끝에서 고동쳤다.



// 이든에게, 마일드가. 환영월력 그림자 해 여름 첫째 달 여드레 날.//


메이든은 입 안이 바싹 말랐다. 혹시? 아닐 거야. 하지만, 이게 정말 ‘그자’의 이름이라면?

메이든은 부서질 것 같은 낡은 책장을 넘겼다. 떨리는 손으로 검붉은 얼룩이 덩어리째 달라붙은 책장을 떼어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메이든은 결국 중간 부분을 포기하고 맨 뒷면을 펼쳤다.


//마일드에게,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는 이든이. 환영월력 물 해 여름 둘째 달.//


이상한 글씨였다. 삐뚤고 제멋대로 끊겨 앞장의 이름을 먼저 보지 않았다면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메이든은 그때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여름이 무르익은 저녁이었고, 이든의 몸속에 갇혀 울부짖던 바람 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피껍질로 치장한 독서가가 마당에 서 있었다.


‘나는 여섯 번째 남자였어요.’


오싹 소름이 끼쳤다. 독서가는 ‘그자’ 때문에 울었다. ‘그자’ 때문에 일곱 번째 시험을 거부했고 피껍질로 손가락이 들러붙어도 몇 번이고 책장을 넘겼다!


메이든은 타오르기 시작한 아궁이에 책을 던졌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자들’에게 마음을 주다니! 나락에서 기어 나온 괴물과 사랑을 하다니!


메이든은 독서가의 집에서 도망쳤다. 당황해서 문을 잠그는 것도 잊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메이든은 몸을 씻고 향을 피웠다. 그리고 그 집에서 묻어온 불길함이 씨앗에 미치지 않도록 빌고 또 빌었다. 녹초가 된 메이든에게 잠이 고양이 걸음처럼 다가왔다.


[이든…….]


꿈속에서 ‘그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다정하고 침착한, 기분 좋은 음성이었다.


[마일드.]


메이든은 어깨를 감아오는 ‘그자’의 팔에 기댔다. 아주 편했고 안심이 됐다. 꿈속이니까 그가 그녀를 뭐라 부르건, 그가 누구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자’가 그녀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메이든은 반쯤은 알아들었고, 반쯤은 간지러워서 웃었다.


[깔깔깔…….]


메이든은 웃음소리에 놀라 깼다. 그리고 방금 꾼 꿈을 떠올리고는 소스라쳤다. 너무나 이상한 꿈이었다.


“미쳤나 봐.”


독서가의 집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아니, 시험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다. 꿈은 그냥 꿈일 뿐,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 품의 따뜻함이, 은은한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귓가에 남아 마음이 심란했다. 메이든은 한숨을 내쉬고 화단을 돌보러 나갔다.






사흘이 지났다. 슬슬 싹이 움틀 때였다. 메이든은 아침부터 수시로 화단을 들락거리며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해가 지고 별이 떠도 화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늦을 수도 있어. 늦을 수도 있지.”


메이든은 마음을 다스렸다. 밤이 깊고 여명이 밝았다. 메이든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나흘이 가고 닷새, 엿새가 지났다. 보름이 다 되어 가는데 꽃은커녕 싹도 보이지 않았다. 메이든은 절망했다, 씨앗은 죽었다. 가슴 밑 홍반이 거세게 날뛰었다. 심장이 멎어 죽지 않으려면 신전으로 가서 실격했다고 말하고 치료제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메이든은 그러기가 싫었다. 그녀에게 쏟아질 동정이나 비웃음보다 쟌에게 뒤졌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보름까지 꽃이 피지 않으면 여기로 다시 와요. 다른 씨앗을 줄게요.’


메이든은 ‘그자’의 제안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깜짝 놀란 고양이 눈처럼 꽉 찬 달이 보였다. 메이든은 신전을 향해 달렸다. 아무 생각도, 계산도 없었다. ‘그자’만이 도와줄 수 있다는 절망적인 희망이 메이든을 뛰게 했다.


“헉헉…….”


신전에 도착하자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앞마당엔 인기척이 없었다. 벌서 왔다 간 걸까? 메이든은 슬슬 겁이 났다. ‘그자’가 약속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부터 메이든을 속인 걸지도 몰랐다. 메이든은 ‘그자’의 술수에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자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신이군요.”


그때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든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마일드가 아닌 메이든 또래의 얼굴이었다.


“서쪽 신전지기?”


‘그자’의 흰옷을 본 메이든은 더럭 겁이 났다. 신전지기는 메이든의 마을에서 한 명, ‘그자들’ 중 한 명, 이렇게 두 명이 일주일씩 교대로 나눠 맡았다. 평소라면 둘 다 도움을 주는 존재였지만 지금 메이든이 하려는 일에서는 절대로 만나면 안 되는 이들이었다.


“퇴근했어요. 좀 전에.”


서쪽 신전지기는 훌훌 제복을 벗었다. 그리고 안섶에서 씨앗 주머니를 꺼냈다.


“이걸 가지러 왔죠?”


메이든의 눈이 빛났다.


“저를 시험하시는 건가요?”


서쪽 신전지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했잖아요. 퇴근했다고. 마음이 편치 않으면 여기 둘게요. 그럼 이만.”


서쪽 신전지기는 겉옷을 싸안고 홀홀히 오솔길로 내려갔다.


“잠깐만요!”


메이든이 부르자 서쪽 신전지기가 돌아보았다.


“마일드는……요?”


메이든은 후회됐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았죠? 그가 말해주던가요?”


메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요, 그에게 전해주세요. 약속을 지켜주신 대가로 말씀드린다고. 이든이 마일드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내가 왜요? 난 신전지기인데. 그건 규칙위반이에요. 지금 무척 위험한 거 알아요? 당신의 혀가 마일드를 처형시킬 수도 있어요.”


“퇴근했다면서요.”


메이든이 씨앗 주머니를 달랑거렸다.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군요.”


서쪽 신전지기가 말했다.


“왜요?”


“그는 죽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덤덤해서 메이든은 귀를 의심했다.


“네? 어째서?”


“글쎄요. 알 수 없죠. 하지만 당신 씨앗이 죽은 것과도 관계있을 거예요. 씨앗은 주인의 생명력에 영향받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서쪽 신전지기는 이미 모든 것을 꿰고 있었다.


“서둘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동쪽의 신전지기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


서쪽 신전지기는 떠났다.


메이든은 암흑을 마주 보는 기분이었다. 자박자박 등 뒤에서 밝아오는 여명 같은 동쪽 신전지기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메이든은 얼른 숲 그늘에 숨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타고 홍반의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틀어막은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는 죽었어요.’


홍반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안 돼. 메이든, 정신 차려.”


메이든은 머리를 흔들었다.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싹을 틔우느냐 마느냐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돌아온 메이든은 새 씨앗을 심었다. 눈물 때문에 따로 물을 줄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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