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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나무 1

여자만 나무가 되는 모계혈족

by 은림



나는 아주 작고 색다른 비밀 한 가지를 갖고 있다.

그건 내가 곧 나무가 될 것이라는 거다.

내 어머니와, 할머니, 또 먼먼 할머니처럼.






아스라하게, 아침 안개 묻은 거리를 2층 창에서 내려다본다. 어깨를 고인 창틀은 아주 오래전에 죽어 버린 나무이지만, 나는 알루미늄 새시나 플라스틱 창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체온을 느꼈다. 처음, 반짝반짝하게 발라졌었을 니스가 황폐하게 닳아빠진 창틀에는 오랜 시간의 흔적이 뒤틀림으로 남아 있었다. 그건 1mm의 오차도 없이 만들어진 인공물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얼룩처럼 퉤퉤 하게 남아 있는 나무테들을 어루만졌다. 규칙적이고 가느다란 결마다 잊혀진 세월이 기록되어 있을 자연의 기억장치. 그것은 더듬는 내 손등의 주름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나는 나무가 될 것이니까.


모계 혈통으로 이어지는 ‘나무가 되는 현상’은 ‘직계’만이나 ‘혈통 전부’에게 일어나는 식으로 어떤 ‘조건’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일종의 확률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나무가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제 슬슬 시작된 치매와 전부터 조금씩 말라붙는 다리 근육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후….”


생각이 들자 더욱 저려 오는 듯한 다리를 주무르면서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 2층을 잇는 내부 계단 마디마다 늘어선 화분에 물을 주던 참이라 손에는 걸리적거리는 게 많았다. 나는 눈앞에 남은 두 그루에 마저 물을 준 다음 허리를 폈다. 계단 중간에 걸린 네모난 창틀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거리에 나무라곤 큰길에 키재기 줄처럼 세워 놓은 가로수와 큰 집 담벼락 밖으로 삐져나온 정원수들뿐이었다. 옛날처럼 골목 어귀와 길가 어디에든 서 있을 정감 어린것들은 이제 하나도 없다. 우리 집도 뭔가를 심기엔 마당이 너무 협소해서 집안 가득한 화분들로만 대치되었다. 실은 난 화분 안에 식물을 기르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내 취향은 둘째 치고라도 땅속으로 마음껏 뻗어 들어가야 할 뿌리들을 마치 코르셋 같은 화분 안에 가두어 둔다는 것이 내심 미안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을 준 화분은 가장 최근에 놀러 왔던 배꼽 친구의 선물이다. 꽃잎 끝이 붉게 물드는 노란 장미를 피우는 화분. 자기도 올 때마다 꽃과 작은 화분을 선물로 사 오면서 나날이 늘어가는 내 수집품에 놀라워하곤 했다.


‘어머나, 화분이 또 늘었네. 이게 웬 거니? 너 집안에 수목원 차릴 거니? 늘어가는 숫자가 거의 기하급수로 구만….’


찬탄인지 핀잔인지 모를 감상을 터트리면서 친구는 문득 나를 보며 말했다.


‘…너, 혹시 외롭니?’


대답 없이 그 친구 얼굴만 말끄러미 보았던 그때처럼, 나는 창 밖의 거리만 물끄럼 한 시선으로 내다보았다. 인공적인 회색, 그 뿌연 먼지 같은 모노톤 속에 마치 톡 터진 완두콩 알처럼 선명한 녹색이 드문드문 눈을 사로잡는다. 정말 빌딩 숲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린 때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지금일 것이다. 옛날에는 그게 녹색이었는지도 느끼지 못할 만큼 무성한 나무 숲 속에 빨간 강낭콩 같은 집이 서 있었겠지. 지금과는 정 반대로.


나는 약간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두려운 것은 둘째치고 이런 속에서 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서운함으로 먼저 가슴을 할퀴었다.



어릴 때, 모든 일들이 그랬듯이 나무가 된다는 것은 단지 막연할 뿐이었다. 내 몸이 나무로 변화하는 상상은, 잠자리 발치에 섬뜩하게 덮쳐 기어올라오는 귀신 이야기 정도로만 무서웠을 뿐, 별다르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귀신 이야기가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을 때 ‘나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잊었다.


야릇하게도 그것이 다시 무서워진 것은 쉰이 다 되가는 이 나이에서다. 이제야, 정말 그것이 무언지 알 거 같기 때문이다. 어릴 때 무섭던 처녀 귀신이나 도깨비는 단지 잊혀져 가는 전설의 애처로움만 남기고, 정말 무서운 건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죽은 얼굴로 나타나는 것인 것처럼. 나무가 된다는 것도 아마 그런 형식을 따라 다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일 게다.


툭….


나는 텅 빈 물뿌리개를 가장 작은 화분 옆, 언제나의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무심코 시선이 닿은 화분 받침 안에 낯설은 긴 생물체가 꿈틀대고 있었다. 흙으로 스민 물이 흥건하게 고인 그 속을 괴로운 듯 헤집고 있는 것은 지렁이였다. 물을 너무 많이 부었는지 흙 길을 따라 밀려 나온 듯한 길고 가늘고 매끄러운 생물은 진한 분홍색이 화사했다.


“….”


나는 한참 그것을 보다가 화초에서 떨어진 마른 잎으로 건져 도로 화분에 넣었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 손을 닦았다. 문득 쳐다본 세면 거울 안의 얼굴이 내가 놀랄 정도로 창백했다.


“잔뿌리가 나오려나….”


나는 눈에 띄게 거칠어진 뺨을 더듬었다. 아직 혈관이 뿌리로 튀어나올 기미는 없었다.


‘나무가 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날 것은 확률에 달린 것이었지만 내가 확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 할머니는 나무였고, 수많은 이모들을 제치고 어머니가 나무가 되었으니 나에게도 그 피의 농도가 배는 짙을 것이다. 할머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머니가 나무가 되는 것은 열세 살 때 직접 마주했다. 그때, 난 정말 기절할 만큼 놀랐고 한동안 현실을 꿈처럼 느낄 만큼 몽롱했었다. 그냥도 사춘기라는 덫에 걸려들고 있는 참인데 그 특수한 상황은 내 어깨에 성장의 짐을 두 배로 얹어 주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마흔여덟은, 열세 살의 세배는 족히 채우고도 남는 나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쯤은 쌓이는 세월로 직접 체험했지만, 흐르는 시간은 나에게 폭넓은 경험과 지각으로 열세 살 때는 알 수 없던 많은 것들을 이해시켰고, 상상으로 막연하게만 느껴 왔던 것들에 구체적인 설명을 달아 주었다. ‘나무가 되는 사람’의 이야기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달리 생각해 보면 그건 무척이나 신비롭고 이상스런 ‘사건’ 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열세 살의 나는 이미 그것을 ‘죽는다’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 버렸다. 사람들이 때가 되면 죽는 것처럼, 나는 때가 되면 나무가 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숨이 멈추고 움직임도 멎는다. 나무도 숨 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앉는다. 그 둘은 같은 것이다. 말만 조금 다를 뿐.


후- 호륵.


녹색이 사금석처럼 박힌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서 주전자가 맑은 고음을 냈다. 나는 느긋하게 남은 부엌으로 건너가 레버를 돌려 불을 줄였다. 물이 끓는 소리를 멜로디로 대체하는 그 주전자는 빨간 에나멜 위에 은으로 선처리를 한 세련되고 조금 부담스러운 것으로, 내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때마다 생각했다. 남편은 내 취향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건 아직 철이 덜 난 막내딸의 15주년 결혼기념 선물이었다. 딸애가 오는 날이면 나는 분주하게 전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그 애가 선물한 그릇들을 꺼내어 씻고 일부는 사용한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주전자는 이제 막 물이 끓는 참에 내가 불을 줄어서 부글부글 끓는 성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식탁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가만히 가스레인지의 고른 불꽃을 응시했다. 바람이 없으므로 흔들릴 리 없는 그 파란 불꽃은 가끔 이물질이나 먼지가 타 들어갈 때만 주홍색을 발했다.


토독.


잠깐 솟아오르던 불협색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른 새파란 뾰족 울타리 틈으로 사라진다. 나는 우리네 부엌에 이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불이 사용되고 있을 때 내 어머니에게 ‘할머니 나무’ 이야기를 들었다.




줄무늬 고양이가 부뚜막 위에서 늘어진 긴 하품을 하고, 볕이 잘 드는 뒤뜰 장독대가 포근한 밤색으로 젖어 있는 나른한 봄날 오후였을 거다. 나는 전날 아버지가 새로 사다 주신 두꺼운 동화책 전질을 밤새도록 탐독하고 나서 아주 행복하고 몽롱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열린 장지문 툇마루 위로 햇살이 물결처럼 금빛 아롱졌다.


「지혜야, 할머니께 물 좀 가져다 드리렴. 날이 더워질 것 같네.」


부엌에서 한참 새참 준비 중이셨던 어머니가 칼칼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느적지근하게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중앙에는 시꺼먼 우물 대신에 닳은 흔적도 없는 반짝반짝한 높은 음자리표 모양의 펌프가 있었다.


끼익 끼익 철커덩-.


누런 놋쇠 대야에 고여 있던 물을 펌프 안에 붓고는 힘차게 손잡이를 내리눌렀다. 펌프는 새것이라 어린 손이 모자라도록 큰 손잡이가 불편했던 외엔 생각만큼 힘겹지는 않았다. 네 귀에 큰 돌을 괴어 놓은 펌프는 찌익찌익 물오르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쏴아-! 하고 소리만으로도 시원한 물줄기를 토해 냈다.

나는 빈 대야에 가득 그것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근처에서 펌프식 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우리 집을 하고 한 집을 더 꼽을 정도였다. 나머지들은 아직도 두레박질을 하면 어둠이 물보다 먼저 퍼 올려지는 깊고 음습한 우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우물에 빠진 적도 없으면서 우물을 유독 싫어했다고 어머니께 나중에 전해 들었다. 기억에도, 옆집에 놀러 가면 그 집 마당 가운데 있는 우물을 최장거리로 비켜 다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이 비록 쇠똥 냄새나는 외양간과 그 옆에 달린 인분의 짜고 메스꺼운 향내를 마주하는 재래 화장실과 아주 근접한 길이라도 말이다.


책에서 읽은, 아이 두셋은 그냥 잡아먹었음직한 깊은 우물 구덩이. 나는 너무 깊어서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소리로만 길어 올리는 그 물소리가 너무 무서웠다. 그 속엔 맑은 물이 아니라 검붉은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거 같았다. 실은 펌프관의 캄캄한 속에서 올라오는 물소리도 약간 섬뜩했지만, 그것은 좀 덜했다. 보이지 않으니까.


「끙.」


커다란 놋쇠 대야 가득한 물 짐은 여덟 살짜리 계집애에겐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받은 물의 반은 나무가 아닌 흙마당에 주어 가면서 뒤뜰까지 대야를 질질 끌고 갔다. ‘쇠그랑 쇠그랑 끼익…’하는 소리가 내 종종 이는 발소리 뒤를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줄줄줄…


장독대 옆에 서서 부엌 뒷문이 보이는 자리에 서 있는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우리 할머니 나무였다. 늙은 발등의 불거져 나온 거친 혈관 같은 그 뿌리 근처에서 힘들게 끌고 온 대야를 기울인다. 아버지가 물을 줄 때처럼 ‘철퍽’ 부서지는 시원한 소음은 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안에 빙빙 도는 대야는 개운치 않은 오줌 소리처럼 질질거리다 남은 물방울만 찔끔였다.

나는 몸을 수그려 나무뿌리에 충분히 물이 닿았는가를 살핀 다음, 촉촉이 젖은 검은 나무껍질 사이에 익사한 개미의 시체를 보다가 전날 밤에 읽은 개미와 베짱이를 기억했다. 생각의 연상 작용은 그렇게 시작되어 동화책 전집에 걸쳐진 수많은 이야기 더미로 한번 내 머릿속을 휘저은 다음, 상당히 난해하게 읽었던 ‘만드라고라’에 대한 부분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사람처럼 생겼고, 뽑을 때 소리를 지르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전부 죽어 버리기 때문에 일부러 개나 기타 동물로 하여금 뽑게 했다는 그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또렷한 이유는 다름 아닌 할머니 나무 때문이었다. 내가 사람처럼 생긴 식물 ‘만드라고라’와 ‘할머니 나무’와의 사이에서 공통점을 열심히 찾아본 것은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지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나무화’와 옛 전설인 ‘만드라고라’가 다르다는 걸 알기엔 어린 지식의 폭이 너무 좁았던 것이다.


「지혜야, 저건 그냥 사람처럼 생긴 나무가 아니라 네 할머니란다. 엄마의 엄마지. 그러니까 항상 착하고 얌전하게 인사를 하고 물을 드리렴. 그럼 착한 아이라고 선물도 주실 거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을 믿었었고, 실제로 해마다 붉어지는 가을이면 선물을 받았다. 할머니는 가시가 싸글싸글 하지만 알맹이는 고소한 밤나무였다.


「엄마! 할머니는 만드라고라야?」


한참 동안 서로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는 개미의 무리를 보다가 부엌 문가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인기척을 듣고 소리쳤다. 한창 새참 준비에 바쁘던 엄마는 황당한 표정으로 이쪽을 내다보셨다.


「만… 뭐시깽이라고? 그게 뭔데?」


「만드라고라-! 사람처럼 생긴 식물이야. 뽑을 때 소리를 지르는데 그걸 들으면 죽는데-!」


나는 여남은 발자국 떨어져 있는 부엌까지 들리도록 가능한 한 크게 소리쳐 말했다. 그러나 한창 분주한 어머니에겐 꼬마애가 앵앵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나 보다. 잠시 귀를 기울이시던 어머니는 데울 찬거리를 마저 준비해 놓고는 뒤뜰로 나와 다시 물었다.


「만드라고라가 뭔데?」


지금에 와서 내가 아이를 기르게 되니까 새삼 그때의 어머니의 인내가 존경스럽다. 나라면 논에 나가신 아버지 새참 준비로 가제나 정신없는데 어린 딸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 따윈 도저히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런 일들을 둘째 치고라도 나는 첫딸이라고 꽤나 부모님께 특별 취급을 받았던 게 틀림없다.

그 당시에 동화책 전질을 가질 수 있는 어린애라면 정말 굉장한 부잣집 애들뿐이었다. 게다가 계집아이라면 더더욱 어려웠다. 그들은 태어나서 걷고 말할 줄 알게 되면 쓰기나 읽기보다 상차림이나 설거지를 먼저 배우게 되고, 앞이나 뒤에 태어난 남자 형제의 수발과 뒷바라지를 떠 맞는다. 그렇게 대강 자라서 처녀티가 나면 또 바로 남의 사내 품으로 들어가 애 낳고 밥하고 빨래하는 소모품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부모님은 생각이 트인 분들이셨다. 나는 그것이 할머니 나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인상적이지 않은 아주 자그마한 특별한 일. 그건 사람의 시각을 혁신적으로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걸 이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거 이거.」


신발을 벗어 던지며 뒷마루로 기어올라가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솨아하게 방안 가득히 배인 새 책 냄새가 밀려 나와 가슴을 뛰게 했다. 나는 문지방에 몸을 걸치고는 팔을 있는 대로 뻗어 붉은 칠이 하나도 벗겨지지 않은 새 책을 끄집어냈다. 손끝에 닿는 매끄러운 감촉은 낡고 꺼끌한 오래된 책과는 차원이 달랐다. 책이 내 손을 떠나 어머니에게 건네지는 그 잠깐 동안에도 내 두근거림은 조금도 엷어지거나 줄어들지 않았다. 기억해 보면 철없던 연애 때보다 그때가 더 가슴이 뛰지 않았나 싶다.


어머니는 책을 받아 들면서 문지방에 함부로 걸터앉거나 밟고 넘어 다니지 말라는 주의를 잊지 않으신 다음 책장을 펼치셨다.


「만드라고라…… 만드라… 음, 만드라고라라….」


「왜 문지방에 걸터앉으면 안 돼?」


어머니는 눈으로는 책장을 훑으면서도 곁 귀로 들린 내 질문을 저버리지 않으셨다.


「문지방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의 접점이란다. 그런 곳을 함부로 밟거나 걸터앉으면 어떻게 될까?」


어머니는 언제나 반문의 형태를 취하는 대답으로 내가 상상력의 나래를 펴게 했다. 어쩌면 그건 그냥 어머니의 말버릇일지도 몰랐지만 난 늘 그 뒤를 상상했다. 문지방을 넘은 이쪽은 방이고, 저쪽은 밖이고 그 사이에 검은 공간이 있어서 죽은 사람들에게로 가는 길이 있는….


그런 식으로. 그리고 오싹하게 치밀어 오르는 푸르뎅뎅한 공포를 참느라 잠시 그대로 숨을 죽였다. 아마 내가 우물을 무서워하는 것도 이런 비슷한 상상의 연속이 기억의 찌꺼기 아래 묻혀 있는 탓일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 이거구나….」


어머니는 서양의 전설이 나온 곳에선 내 어떤 질문도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읽으시더니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덕분에 나는 어머니가 화가 나신 줄 알았다. ‘왜?’라는 표정으로 울 듯이 올려다보는 내 표정에 어머니는 생각으로 굳어 있던 얼굴을 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셨다.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어머니는 내 엄마이기도 하지만 아직 신혼의 젊은 새댁이다. 그 시절 대부분이 그러하듯 수줍고 고분고분한 새댁과는 조금 달랐지만.


「부엌으로 가자. 일하면서 얘기를 하자꾸나.」


어머니는 나를 자신의 부수물이 아닌 아이의 인격으로 존중해 주셨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것에 무척 감사하고 있다.


「이런, 불을 꺼트릴 뻔했구나.」


잠시 신경을 덜 쓴 틈에 엷은 불꽃이 불안하게 수그러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새참 밥그릇이 너무 뜨겁게 달구어져 있지 않은지, 그렇다면 조금 식도록 아궁이 옆 선반에 얹어 놓고는 뒤쪽에 쌓인 짚단을 끌어와 아궁이에 넣었다. 불쏘시개로 후벼도 불꽃은 쉽게 일지 않았다. 겨우내 잘 말린 볏단이었는데 방금 눈 쥐 오줌에라도 젖어 있었던지 매캐한 연기까지 나는 틈에서 어머니와 나는 연신 기침을 터트리며 눈을 비볐다. 가물가물 널름대던 불꽃은 다행히도 오래지 않아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 나무는 만드라고라가 아니야. 할머니 나무는 네 할머니란다. 그리고 나도 나무가 될 거고, 너도 여자애니까 때가 되면 나무가 되겠지.」


「다른 사람들도 나무가 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나무가 되는 건 엄마하고 할머니 하고 이모들하고… 지혜가 커서 딸을 낳으면 그 애들만 나무가 된단다.」


그 말에 문득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나만 나무가 된다. 옆집 영순이나 뒷집 난희 언니가 아니라 나만 나무가 된다. 그건 어린 가슴에 특별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어리지 않은 지금에도 충분한 대사건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아주아주 특별한 일이니까 말이야.」


「알았어.」


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그머니 물었다.

「아빠도 안돼?」


그 말에 엄마는 금방이라도 까르르한 웃음을 터트릴 듯 말씀하셨다.


「아빠는 괜찮아. 하지만 다른 사람 있는데서 아빠한테 말하면 안 돼.」


「응.」


나는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특별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색다른 두근거림만 기억한 채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무가 되는 내 열세 살까지.




어머니가 나무가 되기 바로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다. 그 두 가지 사실은 내 안에서 묘한 연상 작용을 일으켜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로 가려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덕택에 나는 혼자만 외따로 버려진다는 처연함까지 맛보고 있었다.


「엄마도 죽는 거야?」


그때쯤, 어머니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옆 동네에 살고 있던 이모들이 와서 살림살이를 돌보며 엄마가 나무가 될 준비를 도와주었다.


「아니야, 지혜야. 엄마는 단지 나무가 되는 거란다.」


나무가 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를 등골이 오싹할 만큼 절감한 것은 그때였다. 그동안 몇몇 사람들의 장례식을 보았지만 그 시체는 그냥 깨끗한 채로 흙에 파묻혔지 어머니처럼 혈관이 피부를 파고 나와 뿌리처럼 자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모들의 도움을 받아 매일 반나절 이상 사람보다 큰 물독에 들어가 있었다. 그 독은 이웃의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광에 놓였다. 지금의 나는 반나절을 집안 욕조에서 보내고 있지만 그때는 욕조란 게 없었으니 어머니는 많이 불편하셨을 거다.


「왜 나무가 되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지?」


어머니께 묻는 내 목소리는 앙칼지게 날이 서 있었다. 홀로 버려지는 것에 대한 반발심으로 나는 나무가 된다는 것에서 심한 모욕감마저 느꼈던 것이다. 남다른 부모님의 교육 덕에 남들보다 배는 빠르게 아이들의 문턱을 넘은 머리만 커다란 열세 살짜리는, 나무가 된다는 특별한 느낌을 내가 남과 다르다는 이질감과 비정상이라는 기분 나쁜 꼬리표로 뒤바꿀 만큼 생각이 자라 있었다. 지금 보면 그마저 어린 생각이지만.


어머니는 내 기분을 이해하고 계셨다. 그러나 대꾸해주는 표정은 예전처럼 풍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굴 근육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태였다.


「지혜야.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이것도 그냥 그런 거란다. 나무가 된다는 건 뭔가 나쁘다거나 병에 걸린 게 아니야. 그냥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우리는 나무가 되는 것뿐이란다.」


「죽는 거잖아. 나만 놔두고…」


확실히, 이른 사춘기를 겪고 있었나 보다.


「…아빠랑 가 버릴 거잖아.」


새된 목소리와 제풀에 북받친 눈물이 주렁주렁 떨어졌다. 어머니는 놀란 표정을 얼른 접어 넣으며 나를 달랬다.


「지혜야…, 지혜야….」


지친 얼굴이 더욱 쇠약해 보여서 덜컥 마음이 아팠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친 어머니께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은 오래오래 눈에 밟혔다.


「엄마는 죽는 게 아니야. 지혜야. 너만 혼자 두는 게 아니란다. 물론, 엄마는 아빠와 가까이 있고 싶어서 나무가 되는 거지만 그래도 완전히 아빠랑만 같이 있는 게 아니란다. 지혜랑 헤어지는 것도 아니야. 나무가 되는 건 죽는 거랑 다르거든.」


어머니의 호흡은 길고 느렸다. 그렇게 숨 쉬어서는 호흡이 가빠서 죽을 것 같았다.

「엄마는 나를 못 알아볼 거야. 엄마는 다 잊어버릴 거야. 말도 못 하고 서 있을 거야. 할머니 나무처럼. 땅속에 있는 아빠처럼. 그건 죽는 거야.」






............다음편에 계속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 우리 빌어먹을 공교육은 친가가 아닌 외가의 장례식에는 수업을 빼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모습을 못 뵈었고,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외할머니는 아직도 작골의 그 굽이진 흙먼지 길 사이의 이젠 흔적도 없을 기와집에 살아 계신다. <199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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