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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

날 가장 제일 사랑하는

by 방구석예술가




작은 뚜껑이 열리는 시계가 있다.

파란색 꽃들이 휘감아 있는 팔찌 같은 시계.


그 시계를 꽤 자주 차는데

치마, 바지 상관없이 잘 어울린다.

둘째 아들도 그 시계를 좋아해서,

그 시계를 차는 날은 내 팔목을 만지작만지작 거린다.

20대 중반 우리 아빠가 일본에서 사다 준 시계다.


그 시계를 차고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아빠만큼 내 취향을 잘 아는 사람은 없지.'


선물이라는 것은 참 애매하기도 하지 않은가.

남을 위해 고르는 것이지만

정작 내가 아닌 '남'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다.

그 사람이 좋아할 것 같은 것을 고르지만

한 끗 차이로 취향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남편과 연애시절 생일선물로

사온 금 목걸이가

너무 촌스러워서 헤어져야겠다 마음먹기도 했었다.

남편은 '14k 금'에 초점을 맞춘 현실적 선물이었지만,

나에겐 촌스러운 디자인이 먼저 들어왔다.

나는 가격보단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중요했고, 금보다는 은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쨌든

내가 받았던 선물 중 마음에 드는 건,

모두 우리 아빠가 선물해 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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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딸인 나는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가정적인 아빠를 둔 나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친구들은 아빠보다 엄마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주변엄마들은 친정엄마와 전화통화를 자주하지만,

그 점을 이해 할 수 없다,

난 아빠와 더 친밀하다.


"크니까 엄마 얼굴이 나오네. 엄마 닮았어."


어렸을 때 내가 못생겨서 걱정했던 이모들이

이젠 엄마 닮았다며 안도섞인 칭찬의 말을 건네면


"아니요. 나 아빠 닮았는데요!!"

하곤 했다.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은 아빠와의 행복했던 기억들.

아니 내 행복한 기억은 모두 우리 아빠.

그 기억들은 몸집이 무척 커진 채로 아직도 내 속에 굴러다니며 산다.

내 자존감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나이가 먹을수록 엄마가 푸념하던 아빠의 단점이

나에게도 오롯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이구. 핏줄은 못 속이지. 너 그런 점이 꼭 아빠를 닮았어. 정말."


아빠의 단점도 좋다.

그것이 단점이 아닌 걸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아빠는 내가 20대 때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

연애를 한다는 것을 항상 부정하고 지냈다.


엄마가 전화를 걸어

당신 딸이 아이가 생겼고, 결혼할 남편감을 데려오니

이번 주 언제 저녁밥을 먹어야 한다고 했을 때,

전화를 끊고 아빠 아마 울었을 것이다.

왜냐면 나도 울었으니까.


아빠는 약속 날이 되어서

남편을 처음 마주 했을 때,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28년동안 처음 본 표정이었다.


아주 날카로운 표정.

내 소중한 딸을 누가 데려가나 하는

사자 같은 표정이었다.


아빠의 첫마디는

"자네 얼굴을 보니, 앞으로 우리 딸한테 시달려서 고생 좀 하겠네."

였다.


남편은 긴장감과 더불어

무슨 말인지 몰라 뚝딱거렸고,


나는

"착해 보인단 뜻이야."

라고 통역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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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러하는 결혼은 무척 빨리 진행되었다.

결단이 빠른 내 성격 탓도 있었고,

내가 살이 너무 쪄서, 많은 판타지를 포기해 버린 탓도 있었다.


결혼식장 음식을 미리 먹어보러 가던 날.

엄마는 왜인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가기를 거부했다.


나와 아빠는 집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결혼식장을 걸어서 가기로했다.


11월 즈음, 가을이었는데

길가에는 내 얼굴보다 더 큰 플라타너스 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아빠는 많이 슬프고

내심 섭섭했을 거다.

갑작스러운 딸의 임신과 결혼이 딸 바보 아빠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을테지.


엄마는 어떻게 만났냐. 어디서 만났냐.

오천가지정도 질문을 했었는데,


아빠는 나에게 아무런 질문도,

질타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잔뜩 떨어진 플라타너스 잎들을 발로 차며

가을을 함께 지나갔다.


"아빠는 나뭇잎 밟는 걸 정말 좋아해."

"나도. 나도 나뭇잎 발로 차면서 걷는 거 좋아해."


아빠와 나는 커다란 나뭇잎을 발로 차며 행복해했다.

우리는 담담했고, 나뭇잎 얘기밖에 하지 않았다.


내 배는 이미 조금 불러 있었다.

쌀쌀한 바람에 커다란 나뭇잎들이 뒹굴거렸다.

나와 아빠는 그 속을 같이 헤치며,

이제는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을 알았다.


많이 행복했고, 조금은 슬펐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계절이 되어

나뭇잎을 밟고 서면, 그때가 생각난다.


결혼을 하고, 남자아이 둘을 낳았지만

그럼에도 세상에서 날 제일 사랑하는 남자는

변함없이

우리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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