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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머니

호상

by 방구석예술가
분홍장미와 달항아리




초등학교 2학년.

쉬는 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날 부르셨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다더구나. 지금 가방을 챙겨 집으로 가려무나."


증조할머니? 증조할머니 얼굴을 뵌 적이 있던가 싶었다.

어쨌든 학교를 빠지고 친할아버지집에 갈 수 있으니 좋았다.


친할아버지 댁은 전라북도 익산이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본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더 멀었다.

우리는 덜컹덜컹 시골길을 달려 도착했다.


마당이 정말 넓은 옛날집이었는데

온 동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증조할머니가 죽었다는 슬픔은 어디에도 없고,

마치 잔치 같았다.


머리 위에는 화려한 띠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커다란 솥에는 무언가 팔팔 끓고 있었는데

나는 아빠에게 저게 혹시 개고기 인지 물었고,

아빠는 본인의 사촌동생에게 이 말을 전하며 낄낄 웃었다.


분명 죽음은 슬픈 것인데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이상한 어색함을 느끼고 있을 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이고. 자다가 돌아가셨대. 점심도 다 먹고 낮잠 주무시다가 말이야.

호상이지 호상. 그 보다 더 좋은 호상이 어딨어."


아하. 호상이라는 것이 뭔지는 몰라도

9살인 내가 듣기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영정사진 속 증조할머니는 그야말로 흰머리의 노쇠한 할머니 모습이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 아빠의 아빠의 엄마인 거고.

그런 분이 병원도 아니고 낮잠 자다가 집에서 돌아가셨다니.

와 이보다 멋지고 평안한 죽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제가 이루어진 그 마당에서 장례도 치러졌다.

다들 엄숙히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는 우시고, 아빠도 눈물을 훔쳤다.

나는 슬프지 않았지만 아빠가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봐서 찡했다.


꽃상여는 아주 화려하고 예뻤다.

증조할머니는 그곳에 곱게 담긴 채 무덤자리까지 갔다.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은 상여를 무리 지어 따라 갔다.

동네의 좁은 흙길을 가다가 상여꾼들이 멈추어 섰다.

친할머니는 나에게 천 원짜리 몇 개를 쥐어주며 상여꾼들에게 주라고 했다.

나는 돈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 아저씨에게 돈을 내밀었다.

그러자 상여가 다시 움직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

.

.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날에 대해 종종 떠올렸다.


증조할머니, 사람들의 말소리,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던 공간,

넓은 마당, 꽃상여, 상여꾼 그리고 호상.


[호상], 그 의미도 몰랐던 단어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온 날.

그 모든 장면들이 그대로 한 편의 비디오테이프가 되어

내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나는 그 테이프를 꽤 자주 돌려보았다.


증조할머니와 말 한마디 나누어 본 적 없고 마주한 적도 없었지만,

증조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스해졌다.

목격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상상이 되었으니까.


증조할머니가 90이 넘도록 살던 어느 날.

대문 앞에서 자식들이 일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넓은 마당에서 뛰노는 강아지 밥을 챙겨 주고,

점심을 적당히 드시고, 잠깐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예쁜 꽃이불에 누워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주무시는 모습.

그렇게 평온하게 돌아가시는 모습.

분명히 웃고 계셨을 거다. 찡그릴 이유가 없으니까.

.

.

.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인생을 통달한 애늙은이처럼 팔짱을 끼고 말하곤 했다.


"에헴. 호상은 우리 증조할머니를 두고 하는 말이지.

우리 증조할머니는 점심까지 다 드시고 낮잠 자다 주무셨거든"


얼마 전 아빠 앞에서 저 대사를 했더니

아빠가 말했다.


"호상? 뭐 그렇지 호상이라 생각할 수 있지.

근데 할머니는 사실 다리를 크게 다치셨는데,

이미 나이가 많이 드신 상태라 얼마 못 사시지 않을까 싶어서

가족들이 고민하다가 다리 수술을 안 했어.

그런데 90살 넘게 장수하셔서 오랜 시간 앉아서만 지내셨지.

근 30년을 집에서만 보내신 거야.

다리가 아프셨어. 그렇게 오래 사실 줄 알았으면, 다리수술을 했을 거야."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30년이 다 되었다.

난 이제야 알았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나의 평온한 증조할머니의 인생이 부서졌다.


상상 속, 대문 앞에서 손 흔드는 할머니의 모습도 지워지고,

넓은 마당에서 강아지랑 노는 할머니의 모습도 지워졌다.

내가 상상하던 증조할머니의 모습에 창살이 죽죽 생겼다.

증조할머니에겐 감옥과도 같은 날이지 않았을까.


움직일 수 없는, 집에서만 보내는 30년의 생활은 어땠을까.

가는 길도 멀고 먼, 까마득한 시골집에서 할머니는 어떻게 아흔 해가 넘는 시간을 견뎠을까.


나는 이제 증조할머니의 장례날로 돌아간다면 펑펑 울 거다.

증조할머니가 가여워서.

그래도 갈 때는 평온하게 가셔서 다행이

애써 위로하며 펑펑 울 것 같다.


물론 큰 병치례 없이 90살 넘게 사신 건 큰 행복이 맞다.

그러나 다리가 다쳐 남은 평생을 앉아서만 지내셨다는 건 불행이 맞지 않은가.

남은 날이 30년이라는 걸 알았다면 가족들도 분명 수술을 해드렸을 텐데.

가족들에게도 일정 부분 불행이다.



인생은 양면을 지니고 있다.

누구나 인생을 살고 있으니 누구나 양면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인생을 안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핏줄이라고 내가 뻔히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친하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를 다 안다고 말하는 것.

어떤 장면을 같이 지나왔다고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착각하는 것.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리석음이다.



이제는 증조할머니 테이프가 다른 버전도 생겼다.

나는 다리가 아팠던 증조할머니의 슬픈 버전을 자주 돌려보게 되었다.


테이프 속 장면에서 증조할머니는

아픈 다리로 앉아 하염없이

꽃 핀 마당을 바라보았다.

나비가 날아다닌다.

증조할머니는 여전히 앉아 계셨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참 알 수 없다."

읇조리며 슬픔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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