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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1 | 쇼츠 전성시대와 집단 기억상실의 관계

[기억의 외주화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일까?]

by 아닛짜

나는 복잡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방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거나, 복잡한 플롯, 많은 등장인물, 관계도가 나오는 이야기들은 지레 겁먹고 덮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몇몇 예외가 있다. 그중 하나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Memento)>(2000)이다.


<메멘토>를 처음 봤을 때는 중반까지 혼란스러웠지만 어느 순간 연결이 되었고 마지막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잡고 영화를 다시 보며 한 장면 한 장면을 분석해 보았다.

나의 남아도는 시간을 들일 가치가 충분한 영화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메멘토>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명성을 얻기 전 초기 작품이므로 저예산 독립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영화가 성취할 수 있는 경지는 제작비와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놀란 감독은 이후로도 매번 대단한 작품들을 만들어냈지만, 나에게 놀란 감독의 최고작은 언제나 <메멘토>이다.

img.jpg <메멘토(Memento)>, 크리스토퍼 놀란 각본, 감독, 2000 - 제작 20주년을 기념으로 2020년에 재개봉하였다.


<메멘토>는 단기 기억상실증(short term memory loss)을 겪고 있는 남자, 레너드 셸비(가이 피어스)의 이야기이다.

레너드는 10분 간격으로 기억이 리셋되며, 그때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나는 어디에 있지(Where am I)?"라고 자문한다.


놀란 감독은 시간과 공간을 접고 자르고 이어 붙이는 마술적 편집으로 레너드의 기이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복잡한 편집 때문에 이 놀라운 이야기를 포기한다면 매우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이번 리뷰는 <메멘토>의 편집구조를 해부하여 완전정복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한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문득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레너드 현상이 현대사회에도 만연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콘텐츠의 새로운 트렌드인 숏폼의 유행이 어떻게 집단 기억상실을 유도하는지도 이야기해보려 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기억과 사실의 이중나선'을 마법의 편집으로 구현하다.
2. 기억과 사실은 구분 가능한가?
3. 쇼츠 전성시대와 집단 기억상실의 관계
3-1> 기억 외주화의 역사
3-2> 쇼츠의 범람이 초래하는 나비효과




1. '기억과 사실의 이중나선'을 마법의 편집으로 구현하다.


<메멘토>는 레너드가 자신의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아 복수하는 평범한 스릴러 스토리이다.

시간과 공간을 뒤튼 복잡한 편집 때문에 어려운 영화처럼 보이지만, 시간을 순차적으로 재배열해서 보면 그다지 복잡할 것 없는 이야기이다.


놀란 감독이 영화를 복잡하게 꼬아 놓은 이유가 단지 마지막의 반전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까?

나는 영화를 몇 번 거듭해 보면서 편집 자체가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각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반전 장치라면 굳이 복잡한 편집 구조를 해부할 필요는 없지만, 편집 구조 자체가 주제 의식과 관련된다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그래서 '<메멘토>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본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메멘토>는 총 45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놀란 감독은 45개의 레고 블록을 짜 맞추듯이 영화를 디자인했다.

영화를 구성하는 45개의 장면을 실제 시간 순서대로 배치해서 번호를 매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시간 순서대로 재편집된 버전이 DVD에 부록으로 삽입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 김빠진 맥주처럼 재미없겠지만.


img.png 그림 1. <메멘토>의 45개 장면의 실제 시간순서


시간 흐름의 한가운데 있는 #23을 기준으로 앞쪽은 모두 흑백 화면이고, #23 이후부터는 컬러 화면이다.

놀란 감독은 이러한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조각조각 잘라서 재배열했다. 관객이 보는 영화 속 장면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img.png 그림 2. <메멘토>의 편집 순서


영화는 컬러와 흑백이 교차해서 진행되며, 흑백시간 순서대로, 컬러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순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이야기의 마지막 지점인 #45(레너드가 테디를 죽임)에서 시작하여, 중간 지점인 #23(레너드가 진실을 알게 됨)에서 끝난다.


그림 1에서 양 끝(흑백 #1과 컬러 #45)을 잡아서 말발굽처럼 휘게 하여 그림 3과 같이 만들어 보면 조금 더 입체적인 시각에서 영화를 조망할 수 있다.


img.png 그림 3. <메멘토>의 편집구조의 의미


영화에서 흑백 화면은 과거 시점을 보여주고, 컬러 화면은 현재 시점에서 진행 중인 사건을 보여준다.

과거 회상을 흑백으로 삽입하여 현재와 대비시키는 것은 일반적인 영화 기법이므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감독이 흑백과 컬러를 쓴 이유는 단지 시간의 교차 편집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영화에서 흑백의 과거는 컬러의 현재와 단절된 먼 과거가 아니다. 영화에서 흐르는 시간은 길어야 한두 달 정도이다.

쭉 연결된 시간이 #23에서부터 갑자기 컬러로 바뀌기 때문에, 관객은 단절된 시간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흑백과 컬러의 대비는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시간상의 구분이라기보다는 레너드가 하는 활동의 성격을 구분해 주는 기능을 한다.


흑백 화면은 대부분 레너드가 모텔방에 홀로 있는 장면들이다. 아내를 죽인 범인의 단서에 관해 누군가와 통화하거나, 과거의 사건(주로 새미 젠킨스 관련된 일)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레너드는 범인과 관련된 정보를 모으고, 분석·추론하고, 타인과 전화 통화하며 그 정보를 검증하는 작업을 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는 메모하거나 정말 중요한 사항은 즉석에서 몸에 문신하기도 하면서, 객관적 진실을 획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레너드는 계속 리셋되는 기억을 보완하기 위해 외부 기억 시스템을 나름대로 철저한 원칙하에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도 활성화되지 않은 시절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문신-01.png 레너드의 문신은 단기 기억상실에 대처하여 고안해 낸 외부 기억 시스템이다.


놀란 감독은 이미 복잡한 구조에 장치를 하나 더 넣는다. 흑백 화면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만, 컬러 화면은 시간이 역방향으로 흐르도록 편집한 것이다. 이것이 영화를 난해하게 하는 주범이다.


컬러 화면은 레너드가 모텔방에서 나와서 나탈리, 테디, 도드 등 주요 인물들과 만나서 얽히는 내용이다.

컬러 장면들을 역순으로 배열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감독이 관객들을 레너드와 똑같은 상황 속으로 몰아넣어 10분마다 리셋되는 기억의 백지상태를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컬러 장면들은 <메멘토>를 분석하는 영화가 아니라 체험하는 영화로 만든다.

관객은 레너드와 똑같이 눈 앞에 펼쳐진 시간, 공간, 사건을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10분마다 접하게 된다.


<메멘토>는 공포 영화이기도 하다.

실제로 매번 낯선 곳에서 영문을 모르고 깨어난다고 상상하면 정말 공포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흑백 장면들은 레너드가 '사실(facts)'을 기반으로 객관적 관점의 기억을 구축해 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컬러 장면들은 레너드가 기억이 리셋된 상태에서 주어진 제한된 상황 정보를 가지고 대충 끼워 맞춘 '해석'이며, 주관적 시점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흑백과 컬러를 교차 편집하여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해석을 서로 대비하여 보여주는 것 같지만, 영화의 끝(#23)에서 이 둘은 서로 만나서 융합한다.


그림 3에서 영화의 모든 장면이 #23에서 마치 깔때기처럼 흡수된다.

놀란 감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기억과 사실의 이중나선 구조를 마법적 편집으로 구현해 낸다.

기억과 사실, 주관과 객관, 해석과 진실, 흑백과 컬러가 만나는 모호한 지점에서 레너드의 기억의 정체가 드러난다.




2. 기억과 사실은 구분 가능한가?


우리는 기억(memory)사실(fact)을 어떻게 구분할까?


우리는 기억과 사실을 혼동하고,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버릇이 있다.

특히 자신이 감각기관을 통해 확실하게 감각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실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내가 봤어.", "내가 들었어."라는 말보다 더 확실한 사실의 증거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레너드는 기억과 사실을 엄격히 구분한다.

레너드에게 사실이란 '내 마음 밖의 세상'에서 내가 눈을 감고 있더라도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은 객관적이고 불변하며 움직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레너드는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특수한 핸디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자신의 기억을 의심한다.

레너드는 기억이란 형태, 색깔 등을 왜곡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 법정에서도 잘못된 기억이 진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신은 결코 기억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레너드는 기억과 사실을 분리하여 '내 마음 밖의 세상'만을 '사실(THE FACTS)'로 관리한다고 자부한다.


레너드는 기억의 불완전함과 주관성에 속지 않기 위해 사실을 관리하는 다양한 장치를 마련한다.

남이 쓴 것, 종이에 쓴 것은 왜곡될 수 있으나, 사진, 문신, 자신의 필체로 쓴 것은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그는 매번 낯선 시공간에서 깨어날 때마다, 항상 집(현재 머무는 곳)과 자신이 타고 있는 차, 만난 사람의 사진을 찍어놓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적인지 친구인지를 구분하여 간단히 메모한다.

그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검증 절차를 거친다. 일단 주머니 속에서 그 사람의 사진이 있으면 예전에 만난 사람이다. 사진에 쓰인 메모를 확인하고, 메모 내용과 현재의 정보가 일치하지 않으면 메모를 업데이트한다. 심지어 문신을 지우고 다시 하기도 한다.


레너드는 자기가 확신하는 정보들은 '사실(THE FACTS)'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어 넘버링하여 몸에 문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따라서 한 행동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S41-손목문신 확인(THE FACTS).png 레너드는 검증된 사실들을 손목에 '사실들(THE FACTS)'이라는 항목으로 문신한다.


레너드처럼 철저하게 기억 시스템을 관리한다면, 단기 기억상실증이 없는 일반인보다 오히려 더 정확한 사실 데이터를 갖게 될 것이다.

마치 맹인 검객처럼 핸디캡을 극복하고 최고수가 되는 것처럼.


그러나 레너드는 사실조차도 수집 단계에서 오염될 수 있음을 간과한다.

절대적인 사실이란 것은 없다. 전체 맥락을 제거한 상태에서 드러난 단편적 증거는 매우 위험한 사실이 될 수 있다.

레너드가 믿었던 '사실'자신의 욕망(의도∙기대∙지향)에 부합하도록 선택하고, 배제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과하여 가공된 것이다.


레너드의 욕망은 무엇인가?

레너드의 무의식에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고 복수심에 몰두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아내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정리한 노트는 12페이지가량이 찢겨 있고, 군데군데 지워져 있다. 불완전한 노트, 불에 탄 사진, 문신을 지운 정황 등은 정보 조작을 암시한다.


놀란 감독은 기억과 사실이 서로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영화의 마지막에 흑백과 컬러가 뒤섞이는 편집을 하였다.

관객은 마지막에 레너드가 위험한 맹인 검객이 되었음을 본다.


'기억의 속임수'에 관한 주제는 두 번째 리뷰에서 좀 더 진행하고, 여기서는 '기억 외주화'라는 주제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3. 쇼츠 전성시대와 집단 기억상실의 관계


3-1> 기억 외주화의 역사


우리와 레너드의 상황이 그다지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레너드가 문신, 메모, 사진에 자신의 기억을 위탁했다면, 우리는 스마트폰, SNS, 인터넷 공간에 기억 기능을 통째로 맡겨버렸다.

이것은 일종의 '기억 외주화'혹은 '기억 하청화'라고 할 수 있다.

레너드와는 달리 우리는 단기 기억상실증도 아니면서 단지 편리하다는 이유로 기억을 외주화를 한다.


우리는 예전에 전화번호 열 몇 개쯤은 기본적으로 외웠으나 이제는 자기 번호 외에는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과거에는 잡다한 지식이나 정보들을 외워서 '잘난 척'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무엇이든 궁금한 것은 몇 초 만에 즉각 검색 가능하다.

누구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전화번호부와 백과사전의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AI 서비스와 결합해 우리 뇌의 역할까지 대신하려 든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 외주화는 단지 현대에 일어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기억 외주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류가 최초로 기억을 외주화하기 시작한 것은 문자와 종이가 발명되면서부터이다.


문자와 기록의 반대편에는 구전과 암송 전통이 존재해 왔다.

이제 구전은 문자에 완패했지만, 인도는 문자보다 소리를 더 신성시하는 전통이 있어서 현재까지도 암송의 가치를 높이 산다.

인도의 많은 경전은 처음부터 문자화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암송 형태로 구전되어 왔다.


우리는 구전보다는 문자를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지만, 경전 암송은 사실 매우 체계적이고 정밀하게 관리되어 왔다.

생각해 보면, 필사하는 과정에서 오자, 탈자는 빈번하게 나올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필사자의 생각이 반영되어 의도적으로 수정되기도 한다.

반면 노래 가사와 같은 암송은 틀리기는 어렵다. 반복과 운율이 있는 가사는 소리 내어 암송하기에 적합하다. 그리고 매일 모여서 다 같이 합창하는데 누군가 가사나 음정, 박자가 틀리면 바로 티 나서 동료의 질타를 받게 된다.


머릿속의 암기된 경전을 종이에 옮겨 써놓은 이래로 암송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초기 경전의 내용은 갈수록 변형, 수정되고, 여러 분파로 갈라지고, 혼란해졌다.

그에 따라 대가(大家)들도 사라졌다.

방대한 경전 암송은 경전에 관한 믿음과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도뿐 아니라 조선 시대 선비들도 과거시험을 위해 수많은 경전을 통째로 암기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암기 기계는 아니었다. 남아있는 과거시험의 답안들을 보면 분량도 놀랍지만, 경전에 관한 이해와 논리, 창의력 수준도 대단했다.


한때는 암기식 교육의 폐해를 과장하고, 이해 위주 교육을 찬양하였다.

단순 암기는 불필요하며 이해와 분석력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암기와 이해는 서로 배치는 되는 것이 아니다.

암기하는 과정 자체가 이해력과 창의력의 토양이 되며, 암송 행위는 그 자체로 산란한 마음의 집중을 유도하는 수행 효과를 가진다.

백 권의 책을 암기하면 능통하게 된다.



3-2> 쇼츠의 범람이 초래하는 나비효과


암기가 사라진 현대인의 뇌는 그야말로 텅 비어 간다.

그러면 암기의 짐을 덜어낸 뇌는 사고력과 창의력이 좋아졌는가?

짧은 지식과 자극적 정보의 홍수가 텅 빈 뇌를 고속도로처럼 달리는 풍경 속에서 순간적 재치와 자가복제만이 살아남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뇌는 근본적으로 게으르다.

뇌도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울 기회를 마다하지 않는다.

뇌는 가능한 모든 상황에서 복잡한 현상들을 다각도로 고찰하기보다는 단순하고 즉각적인 답을 환영한다.

아이들이 설탕 묻힌 과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뇌는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쇼츠에 쉽게 중독된다.


언제부턴가 유튜브에 30초에서 3분 이하의 쇼츠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요즘 콘텐츠의 대세는 길이가 짧고 휘발성이 강하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몇 시간을 보아도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어떤 내용이든 짧아야 잘 팔리기 때문에, 30초 안에 점점 많은 것을 요약하여 넣는 편집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요약해도 지식이 단순화되고 파편화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단순파편화된 정보의 조각들이 범람하는 것은 점점 긴 맥락의 지루한 이야기들을 몰아낸다.

우리의 뇌는 조금만 지루해도 참지 못하는 방식으로 급격히 진화해가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영화도 쇼츠처럼 성급하게 초반에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한다. OTT로 감상하는 영화는 초반에 지루하면 바로 외면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표면적 현상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진실이 더 이상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실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늘 투박하고 긴 맥락 속에 숨어 있다.

샤이한 진실을 끌어내려면 참을성과 지루함을 견디는 여유가 필요하다.


우리의 뇌는 점점 성급해지고, 진실의 여러 단면을 가공해서 만든 수많은 가짜 진실이 우리의 뇌로 침투한다.

진실은 하나의 의견이나 개성처럼 치부된다.


쇼츠는 앞뒤 맥락이 필요 없다. 재미있으면 된다.

쇼츠에 익숙한 뇌는 조금 전에 정반대의 논리를 들었다 해도, 금방 휘발되고 새로운 논리를 흡수한다.


정치도 쇼츠화 되는 것 같다.

자신이 예전에 한 말을 뒤집고 순간의 말재주와 포장으로 일관하는 정치인들이 세력을 얻고 있다.

숏폼이 인간화된 것 같은 이런 사람들이 득세하는 것은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위기인 것은 확실하다.


레너드는 결국 자기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지긴 했지만, 적어도 진실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나는 영화를 보며 레너드가 자신의 정신 현상을 통제하는 과정이 좀 숭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너드를 비웃지 마라.

언제 우리는 레너드처럼 필사적이었는가?


레너드는 10분 단위의 리셋이었지만, 우리는 이제 3분 단위 리셋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쇼츠로 상징되는 콘텐츠의 범람은 인류의 지성과 합리성을 끝장내러 온 터미네이터인지도 모른다.


TV가 처음 나왔을 때 TV가 어떻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지에 관한 논의가 활발했다.

이제 다시 심각하게 논의해봐야 하지 않을까?


마이크 저지 감독의 <이디오크러시(Idiocracy)>는 저능아들만 남아있는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코미디 영화다.

영화의 예언처럼 지혜로운 '호모 사피엔스(Sapiens)'에서 멍청한 '호모 이디오티엔스(idiotiens)'라는 새로운 종이 탄생하는 것인가?


<메멘토>를 보며 나도 모르게 토끼굴에 빠져 암울한 미래에 관해 몽상해 보았다.

두 번째 리뷰에서는 기억이라는 것이 어떻게 자신을 속이는 거대한 사기극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메멘토 #Memento #크리스토퍼놀란 #기억 #단기기억상실 #기억외주화 #쇼츠전성시대 #이디오크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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