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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계 | "지켜줄게." "가요... 어서."

[부성에 목마른 여자, 불안에 휩싸인 남자]

by 아닛짜

이모청(양조위)이 보는 왕치아즈(탕웨이)는 두려움이 없는 여자다.

왕치아즈가 보는 이모청은 책임감이 투철한 남자다.

동시에 왕치아즈는 부성에 목마른 여자이며, 이모청은 불안에 휩싸인 남자다.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결핍을 절묘하게 채워준다.

이것을 '사랑'이 아니고 무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이안 감독의 영화 <색,계(色, 戒; Lust, Caution)>(2007)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을 그린다.

영화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의 홍콩과 상해를 배경으로 한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에는 일본 괴뢰정부가 들어서고, 항일운동이 곳곳에서 거세게 타오르는 시절이다.


이모청과 왕치아즈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반대 진영을 대표한다. 이모청은 일본 괴뢰정부의 고위 관료로 소위 '한간(漢奸)'이라 불리며 멸시받는 매국노이고, 왕치아즈는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대학생이다.


그러나 거시적 시대 배경이 이들을 집어삼키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가 이들의 내면을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시대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거들었다고나 할까?

왕치아즈의 스파이 임무가 끝내 좌절되는 것은 대의보다 개인적 사랑에 굴복한다는 여자의 스테레오타입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여자 스파이의 설정이다.

<색,계>는 이런 진부한 설정들을 모두 극복해 내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이안 감독의 천의무봉의 솜씨를 새삼 느낀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동일한 지점에서 시작한다.

관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비로소 영화의 시작 장면과 같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모든 서사가 이모청과 왕치아즈가 마지막 대화를 하는 짧은 순간에 응축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모청 : "내가 지켜줄게."

왕치아즈 : "가요... 어서."


이모청과 왕치아즈가 건네는 짧은 대화를 위해 관객에게는 2시간 27분이 필요하다.

이제 이 대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리뷰를 시작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고독한 두 섬이 만나다.
2. 부성에 목마른 여자, 불안에 휩싸인 남자
2-1> 왕치아즈의 시점
2-2> 이모청의 시점
3. 색, 계 - 계를 삼켜버린 색




1. 고독한 두 섬이 만나다.


영화는 상류사회 여자들의 마작판으로 시작된다. 마작판은 마치 영화의 중요한 상징이라는 듯이 중간중간 삽입된다.

마작판.png 고위층 부인들은 온종일 마작판에 앉아서 승진, 청탁, 화장, 외모, 고급 음식점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우아한 치파오를 세련되게 빼입고, 화려한 장신구와 정교한 화장으로 모양을 낸 부인들이 둘러앉아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매니큐어로 단장한 손으로 마작패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다.

이 여자들에게 바깥세상의 전쟁과 혼란, 물자 부족은 게임 속의 설정 정도로밖에 경험되지 않는다. 바깥 상황이 아무리 심각해도 자신들은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의 일상은 마작, 쇼핑, 몸단장, 가십 등으로 점철된 다소 지루한 시간들이다.

부인들이 살고 있는 '인형의 집'을 고스란히 현재로 옮겨와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섞여있는 왕치아즈와 이모청은 인형의 집 바깥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살고 있다.

왕치아즈는 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마작판에 앉아 있지만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생각들이 가득하다.

이모청은 일본 정부에서 중국인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또 동포로부터의 암살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다.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하고 있는 두 사람은 부인들과 같은 공간에 있을 뿐 혼자만의 고독한 섬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고독한 섬에 살고 있던 이모청과 왕치아즈는 두 번의 불연속적인 만남을 가진다.

1938년 홍콩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호감이 있었으나 얼결에 헤어지고 두 번째 만남은 1941년 상해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때는 두 사람 모두 많이 변한 상태이다.


중일전쟁 발발 당시 왕치아즈는 광저우의 린징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아버지의 도움으로 좀더 안전한 홍콩으로 피난 온다.

학생시절1.png 린징대 새내기 시절의 왕치아즈는 솜털도 안 가신 햇병아리 같았다.


왕치아즈는 편입한 홍콩대에서 연극부 선배 광위민(왕리홍)을 만나고, 첫눈에 반한다.

얼결에 친구 따라 항일 연극동아리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서게 된다. 소심했던 왕치아즈는 예상외로 열연을 하며 히로인이 된다.

왕치아즈는 다소 기운 없고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소극적인 인물이었으나, 연극에 빠져들면서 처음으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연극 열연1.png
연극 열연2.png
소극적이었던 왕치아즈는 연극을 통해 내면의 열정이 깨어남을 느낀다.


연극에 대한 열정과 광위민에 대한 연모가 결합하여, 왕치아즈는 때마침 홍콩에 부임한 매국노 이모청을 처단하자는 연극부의 계획에 가담하게 된다. 왕치아즈를 내세워 미인계를 쓰는 어설픈 계획이 진행된다.

왕치아즈는 부유한 무역상의 아내인 막부인으로 위장하여 이모청의 부인에게 줄을 대는 데 성공한다.


리-왕치아즈1.png 스파이로 변신한 왕치아즈. 폭우에 다 젖을 뻔한 그녀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이모청. 두 사람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왕치아즈와 이모청 사이에는 섬씽이 있었으나, 이모청이 얼마 안 있어 상해로 발령을 받아서 가버리는 바람에 암살 계획은 허무하게 무산된다.

성 경험이 없던 왕치아즈는 이모청을 유혹하기 위해 다른 부원과 원치 않은 성관계를 하며 연습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들의 계획은 발각 안 된 것이 이상할 만큼 너무나 아마추어적이고 어설펐다.

이들을 이모청에게 소개해주었던 선배는 암살 계획을 다 알고 찾아와서 돈을 요구하며 협박한다. 동아리 부원들은 배신자를 처단한다는 마음으로 합심하여 선배를 칼로 찔러 죽인다.

왕치아즈는 두 눈 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이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왕치아즈는 모든 인연을 끊고 홍콩을 떠난다.


3년 후(1941). 왕치아즈는 상해의 이모집에 와 있다.

재혼해서 영국으로 간 아버지는 왕치아즈를 영국에 부르지 않고 대신 상해로 가서 학교에 다니라고 한다.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다.


그동안 연극부 친구들은 국민당의 우 영감 밑으로 들어가서 보다 전문적인 조직의 일원이 된다. 광위민은 왕치아즈를 찾아내어 암살 작전에 합류할 것을 권한다.

왕치아즈는 대학에 복학하였으나 흥미 없는 공부를 하고, 식량 배급으로 근근이 살아가며, 이모의 눈치를 보는 생활에 신물이 났다. 영국에 있는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기약도 없다. 그녀에게는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그녀는 조직에 들어가서 신분을 위장하고, 총기 사용을 배우고, 전문적인 스파이로 새로 태어난다.


한편, 이모청은 상해 일본 괴뢰 정부에서 승승장구하여 첩보부 장관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예전보다 더욱 마르고 예민해진 모습이다.

왕치아즈와 이모청은 숙성된 포도주의 향기가 퍼지는 것처럼 만나자마자 서로를 향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3년간 각자의 고독한 섬에서 숙성된 감정은 거칠 것 없이 직진한다.




2. 부성에 목마른 여자, 불안에 휩싸인 남자


2-1> 왕치아즈의 시점


영화에서 왕치아즈의 아버지는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왕치아즈나 이모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될 뿐, 편지 한 장 보내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내가 죽자 불안정한 중국에 딸을 남겨둔 채, 자신은 재혼하여 영국으로 가버린다.

아버지로부터 재혼한다는 편지를 받은 날, 왕치아즈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여자가 나오는 영화를 보며 서럽게 운다.

(이때 왕치아즈가 보는 영화는 1939년도에 제작된 잉그리드 버그만이 나오는 <인터멧조>라고 한다.)

왕치아즈 눈물.png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들은 날, 왕치아즈는 영화관에서 서럽게 운다.


여자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가정도 포기 못 한다는 유부남과 딸을 사랑하지만 새로운 가정이 더 소중한 아버지가 겹쳐지며, 왕치아즈는 버림받은 여자에 감정 이입하여 운다.


<색,계>는 겉으로는 스파이 스릴러지만, 왕치아즈는 카리스마 넘치는 마타하리 같은 캐릭터가 아니다. 부성에 목마른 연약한 여자일 뿐이다.


왕치아즈는 아버지의 부재를 대체하는 남자가 필요하다.


광위민의 열정적인 항일을 보고 반하였으나, 광위민은 사실 누구를 사랑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도 왕치아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대의가 더 중요하여 한 번도 왕치아즈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조직의 우두머리인 우 영감은 왕치아즈를 기본적으로 항일투쟁의 도구로 본다.

우영감은 일본에 피맺힌 원한을 가지고 있어서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거짓말이든 배신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영감은 이 임무를 마치면 왕치아즈를 영국에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진심이 아니다.

왕치아즈는 우 영감에게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대신 부쳐달라고 부탁하지만, 우 영감은 왕치아즈가 나가자 편지를 불태워버린다.


어느덧 상황이 악화되어 간부들은 급습을 당해 잡혀가고 암살 실행 계획도 불투명해진 가운데, 광위민과 왕치아즈는 어두운 영화관에서 어렵게 접선한다.


왕치아즈 : "서두르라고 해. 끝나면 떠날 수 있는 거지?"
광위민 : "글쎄... 모르겠어."
왕치아즈 : "또 사라졌어. 난징에 갔다고는 하는데 진실을 누가 알겠어. 딴 여자가 있는지도. 그제 밤에는 날 어떤 집에 데려갔었어."
광위민 : "알아. 보고 있었어."
왕치아즈 : "그런데 방에서 여자 향수 냄새가 나더라고. 최근 냄새는 아니었지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젠 모르겠어."
광위민 : "치아즈. 날 봐. 약속할게. 널 다치게 안 할 거야. 그건 내가 허락 안 해."


왕치아즈와 광위민은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왕치아즈는 자신이 이모청에게 매료되어 질투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하는데, 광위민은 단지 왕치아즈가 작전에 관한 걱정과 자신의 안위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광위민은 정말 얼굴만 잘생긴 연애 무능력자이다.

광위민은 작전 시작 후 3년이 넘은 시점에야 왕치아즈에서 고백 비슷한 것을 시도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때 왕치아즈는 이모청에게 완전히 빠져있었다.


이모청은 뱀 같은 연애 능력자이다. 이모청의 태도, 눈빛, 말투는 왕치아즈를 사로잡는다.


상해에서 왕치아즈는 우연을 가장하여 이모청의 부인과 마주친다. 부인은 매우 반가워하며 그녀를 자신의 집에 머무르라고 강권한다. 왕치아즈가 자기 방에서 짐을 정리하는데, 이모청이 불쑥 들어온다.


왕치아즈 : "사모님 선물로 담배를 가져왔어요. 장관님께 드릴 게 없네요."
이모청 : "당신이 와 준 게 선물이오."


"당신이 와 준 게 선물이오." 이모청은 무표정하게 한 마디 던지고 휙 가버린다.

방 안에 계속 맴도는 소리. 당신이 와 준 게 선물이오.. 당신이 와 준 게 선물이오.. 당신이 와 준 게 선물이오..


하루는 이모청이 왕치아즈를 두 시간 넘게 추운 차 안에서 기다리게 한다. 그리고 왕치아즈가 지쳐서 화가 날 즈음 차에 타고는 회의가 늦었다고 말할 뿐이다.

왕치아즈가 불평하자 냉랭하게 대꾸하며, 갑자기 치아즈의 턱을 잡아서 그녀의 얼굴을 자신에게 돌린다.

너무예뻐서.png 이모청은 나쁜 남자다.


왕치아즈 : "왜 그렇게 봐요?"
이모청 : "너무 예뻐서... 종일 당신만 생각했어. 창 비서가 뭐라고 떠드는 데도 입만 벙긋대는 게 보일 뿐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 당신을 볼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거든."


이모청은 이어서 자신이 저항군을 잡아서 잔인하게 심문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여자를 화나게 하면서도 설레게 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알고 있다. 왕치아즈의 마음에는 사랑과 불안이 교차한다.


우영감은 왕치아즈에게 국가, 조직,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며 모든 것을 바쳐서 이모청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강요한다. 왕치아즈는 말한다.


"뭐로 사로잡아요? 내 몸으로요? 당신은 그를 몰라요. 연기라면 그가 몇 수 위죠. 날 안을 때마다 그는 마치 뱀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어요. 내 심장까지... 나는 그를 노예처럼 받아들이고 충실히 내 역할을 다해 그의 마음을 얻어내죠. 그는 매번 내가 피를 흘리고 고통의 비명을 질러야 만족해요. 그때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죠. 그는 내 반응이 가짜가 아니란 걸 알아요. 이러다가 사로잡히는 것은 내가 되고 말 거예요."


우영감은 왕치아즈의 적나라한 감정을 더 듣기 힘들어서 외친다. "그만! 그만합시다."

왕치아즈는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두려워요. 마침내 그가 내 심장에 들어오는 순간 내내 구경만 하고 있던 당신들이 뛰어 들어와서 그의 머리를 쏴버릴까 봐."


우영감과 광위민은 이 말을 듣고도 자신들의 암살 계획이 이미 실패했음을 깨닫지 못한다.

왕치아즈의 이성은 자신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모든 의지력은 사랑 앞에서 무력해진다.


감성이 메마른 자들은 혁명도 실패한다. 혁명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모르는 자들이 사랑을 무기로 사용하려다가 필패한다.

채석장에서 총살 직전에 왕치아즈를 바라보는 광위민은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는 표정이다.



2-2> 이모청의 시점


이모청은 홍콩에서 왕치아즈와 처음으로 긴 대화를 하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한다.


이모청 : "나는 일상적인 대화에 익숙지 않아요. 내가 만나는 자들은 국가 운명 같은 거창한 얘기만 떠들죠. 하지만 그런 자들 눈에서 나는 수없이 봐왔어요."
왕치아즈 : "뭐를요?"
이모청 : "두려움. 그런데 당신은 다른 것 같아요. 두려움이 없지, 안 그래요?"
왕치아즈 : "당신은요?"
이모청 : "게다가 영리해. 마작에는 젬병이지만."


이모청은 어떻게든(옳든 그르든) 주체적으로 세상에 맞서고, 자신과 자신의 것을 지키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다.

반면 왕치아즈는 세상에 기대감 없는 사람이 풍기는 대범함이 있다. 여기에는 애정 결핍에서 비롯된 자기 비하와 체념적 수동성이 묘하게 결합하여 있다.

이런 왕치아즈는 이모청에게 '두려움 없는 여자'로 보였다.


이모청은 겉은 냉혹해 보이지만 속은 불안과 경계심으로 가득하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 무장한 채 살아왔다. 그는 암살 위험이 있는 어두운 곳을 싫어하여 영화관에도 안 간다.


영화에는 이모청의 가족은 부인 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는 부인을 존중하지만 부인에게 자신의 속내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식의 존재는 의도적으로 삭제된 것처럼 보인다.


왕치아즈는 이모청의 아내이자 딸의 위치에 들어맞는다.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유사 부녀 관계에 있는 연인이다.


홍콩에서의 짧은 섬씽 후에 3년 후 상해에서 다시 만난 왕치아즈와 이모청은 포옹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화한다.


왕치아즈 : "당신을 증오한다고 말하면 믿을 건가요?"
이모청 : "믿을 거야. 3년 전과는 달라."
왕치아즈 : "증오해요."
이모청 : "믿는다고 했잖아. 난 오랫동안 아무도 믿지 못했어. 진심을 말해봐. 믿을게."

왕치아즈 : (목을 꽉 껴안으면서) "많이 외로웠겠군요."
이모청 : (정색하며) "그 덕분에 살아있지."


이모청은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아무도 믿지 못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큼 외로웠다.

3년 전만 해도 이모청은 두려움과 경계심이 더 컸기 때문에 왕치아즈를 믿지 않았다.

그가 홍콩에서 상해로 급하게 돌아온 이유에는 왕치아즈와 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간 쌓여온 그리움과 외로움이 더 크기 때문에 그는 왕치아즈를 기꺼이 믿으려 한다.

왕치아즈는 이모청에게서 풍기는 외로움의 냄새를 바로 알아차리고, "많이 외로웠겠군요."라고 위로한다.

고위직으로 승진할수록 이모청의 불안은 극심해졌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는 감각은 24시간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첫 섹스는 이모청이 미리 마련해 놓은 들킬 위험이 없는 안전한 가옥에서 이루어진다. 이모청은 폭력적인 강간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그의 안에 차곡차곡 쌓였던 두려움과 불안이 폭발하여 폭력으로 터져 나온다.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상실한 듯 보인다.


그들의 두 번째 섹스는 다소 무계획적이며 더욱 에로틱해졌다. 이모청의 부인이 외출하긴 했지만 들킬 위험이 있는 집에서 이루어진다. 이번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다양한 체위로 긴 시간 동안 교감한다.


왕치아즈는 불안해져서 "이러다 들키겠어요."라고 말한다. 이모청은 그 말에 미소를 짓는다.

믿지 못하며 사는 고통이 조금은 해소된 편안한 미소이다.

물론 이모청은 왕치아즈를 온전히 믿지 않는다. 집 밖에는 경비원이 셰퍼드를 끌고 철통 경비를 서고 있다.


셰퍼드는 이모청의 불안한 내면을 상징하며, 왕치아즈는 셰퍼드 조련사와 같이 으르렁대는 이모청을 다독여 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모청은 일본 조계지의 술집에서 들려오는 일본 노래를 들으며 왕치아즈에게 말한다.


"노래가 꼭 쥐어짜는 것 같아. 주인 잃은 개들의 노래. 저 일본 살인귀들은 두려워하고 있어.
우리의 호시절이 다 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런 째지는 노래를 들으며 짐짓 태연한 척하고 있는 거야."


저물어가는 일본의 찢어진 날개 아래 몸담고 있는 이모청의 두려움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왕치아즈는 이모청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청춘의 봄날을 사랑하지 않으리오. 소년과 소녀는 바늘과 실이라네, 오 나의 아름다운 사랑이여, 우리는 영원히 함께하는 바늘과 실이라네."


이의 눈물.png 왕치아즈의 노래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이모청.


왕치아즈가 영화를 보며 울었던 것처럼, 이모청은 노래를 들으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왕치아즈의 노래는 두려움도 불안도 없는 아름다운 순수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3. 색, 계 - 계를 삼켜버린 색


'색(色)'이 감성, 본능, 환희, 사랑, 정열, 위험을 상징한다면, '계(戒)'는 이성, 당위, 경계, 억누름, 규율을 상징한다.

인간에게 색과 계는 늘 충돌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두 힘이다. 마치 풍선처럼 한 부분을 꽉 누르면 다른 부분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색과 계 중 어느 것이 우위에 있어야 하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색'과 '계'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 파멸이 온다.


우영감과 광위민 등의 조직원들은 항일투쟁이라는 당위의 계를 절대적 우위로 두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모청과 왕치아즈는 색과 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위태로운 게임을 했다.


계는 일종의 연극과 같다. 내가 맡은 역할에 동일시되면 계에 먹혀버린다.

왕치아즈의 계는 스파이 역할이고, 이모청의 계는 일본 앞잡이 역할이다.


왕치아즈는 항일 연극을 통해 우연히 삶의 열정을 발견했고, 그것을 애국적 스파이 역할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영 소질이 없었다.

이모청은 일본의 앞잡이라는 역할에 너무나 충실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모청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질적인 일본의 개다.

그러나 이모청은 그렇게 사악해 보이지 않는다. 양조위 배우의 눈빛 연기는 모든 악당을 사연 있는 악당으로 만든다.


왕치아즈와 이모청은 서로를 만난 후 그동안 억눌렀던 '색'에 본격적으로 물든다. '계'를 침범한 '색', 그럴수록 '색'에 제동을 거는 '계'는 영화 속에서 계속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그 긴장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이 바로 보석상에서 두 사람의 대화이다.


이모청은 심각한 표정으로 왕치아즈에게 어떤 주소로 가서 편지를 전하라는 임무를 준다. 사실 보석상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미리 주문해 놓고 깜짝 이벤트를 한 것이다.

왕치아즈는 보석상에서 보석을 고르고 손가락 치수를 재고, 며칠 후 이모청과 같이 완성된 반지를 보러 가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조직에 이 사실을 알리고 보석상에 가는 날을 암살 디데이로 잡는다.

보석상 주변에 조직원들이 쫙 깔린 가운데 이모청과 왕치아즈는 보석상에 들어가서 반지를 본다.

반지.png


왕치아즈 : "다이아몬드가 맘에 들어요?"
이모청 : "나는 다이아몬드에 관심 없어. 그걸 낀 당신 손을 보고 싶었지."
이모청 : (치아즈가 반지를 껴보고 다시 빼려 하자) "끼고 있어."
왕치아즈 : "누가 노리면 어쩌라구요."

이모청 : "내가 지켜줄게(妳跟我在一起).
왕치아즈 : "가요... 어서(快走! 走吧)."


두 사람 사이에 '계'로 위장된 '색'이 폭로되는 순간이다.

사랑의 진실이 폭로되기 위해서는 계략의 진실이 폭로될 수밖에 없다.

왕치아즈는 자신의 '계'를 폭로해야만 이모청을 살릴 수 있고, 그가 살아야만 자신의 '색'을 영원히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모청의 말은 "내가 지켜줄게."로 번역되었지만, 직역하면 "너는 나와 함께 있어."가 된다.

왕치아즈가 자신이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그의 곁에 실제로 있건 없건 간에, 이모청이 영원히 자신과 같이 있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색,계>의 왕치아즈(탕웨이)는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와 평행우주 속의 동일 인물처럼 느껴진다.


서래 : "난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벽에 내 사진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헤어질 결심>의 해준(박해일)은 강박적인 경찰이다. 살인 사건이 나면 용의자의 사진을 벽면 한가득 붙여놓고 온통 사건 생각뿐이어서 심각한 불면증을 겪고 있다.

서래는 해준의 연인이자 미결 사건의 용의자로 사라짐으로써 해준의 남은 모든 시간을 소유하려 한다.

서래가 '헤어질 결심'을 하는 진정한 이유는 완결된 완벽한 사랑을 박제하려는 욕망이다.


채석장에서 총살당할 때 왕치아즈도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를 한순간도 잊지 못할 거야. 잠잘 때도 밥 먹을 때도 매 순간 나를 떠올릴 거야.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당신을 사랑했는지, 우리의 모든 순간을 계속 곱씹어보며 살게 될 거야.'


모든 것이 끝나고 이모청은 왕치아즈가 기거하던 방에 들어가 침대를 쓰다듬으며 앉아있다.

앞으로 이모청의 모든 시간은 왕치아즈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변치 않는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히.

왕치아즈가 다녀간 이모청의 마음은 어두운 침실의 빈 침대처럼 텅 비게 될 것이다. ㅠㅠ

치아즈의 침대에 앉은 이.png 이모청은 왕치아즈의 처형을 승인하고 나서,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그녀의 침대 위에 앉는다.


왕치아즈는 이모청을 탈출시키고 암살 계획이 무산된 후, 하릴없이 걷다가 문득 인력거를 잡아탄다.


인력거꾼 : “집에 가세요(回家啊)?”
왕치아즈 : “네(欸).”


곧 거리에 체포조가 출동하여 탈출로가 막혔으나, 왕치아즈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마지막 미소.png 왕치아즈는 체포당할 것을 예감하고 옅은 미소를 짓는다.


왕치아즈는 삶에서도, 연극에서도, 스파이로서도 모두 자신이 아닌 역할을 연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리 짜인 시나리오를 연기하는 과정에서 드디어 진정한 자신이 되었고 자신의 마지막 대사를 직접 썼다. 그래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왕치아즈는 죽는 것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평온하다.

나는 중국어로 ‘집으로 돌아간다’라는 뜻의 ‘回家(회이찌아)’라는 말이 이상하게 좋다.

영화에서도 ‘집에 가자’라는 대사가 나오면 정겹게 느껴지고, 어떤 맥락에서는 감동적이기도 하다.

고생고생하며 힘들게 버텨온 주인공에게 ‘집에 가자’라고 가볍게 말을 건네는 순간 눈물이 핑 돌 때도 있다.

이제 왕치아즈가 집에 가서 편안하게 쉬었으면 좋겠다.

'집에 가자(回家吧).'


인력거 바람개비3.png 인력거 앞에 장식된 바람개비는 마치 어린시절 소풍 가는 것처럼 바람을 맞으며 뱅글뱅글 돈다. 왕치아즈의 마지막 길을 데려다주는 인력거 청년이 친절하고 명랑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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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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