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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오브 킬링 #1 | '오온'의 심각한 부조화

[불교적 관점] 전도된 '상(想)'이 '수(受)'를 조작한다.

by 아닛짜

20세기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의 현대사를 보면 섬뜩한 기시감이 든다. 많은 나라가 약속이나 한 듯이 독재와 학살이라는 똑같은 전철을 밟아왔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2012)은 1965년의 인도네시아 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상식을 초월하는 캐릭터들인데, 이는 당시 인도네시아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좀 더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불행한 현대사를 간략히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인도네시아는 194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였고, 독립운동가였던 수카르노가 초대 대통령이 된다. 그가 독립운동가 경력으로 대통령이 되어 결국 부패한 독재자로 귀결된 것은 이승만과 유사하다.


수카르노의 정치적 기반은 공산당이었는데, 그 당시 공산당은 엄연한 합법 정당이었다.(당시의 공산주의는 현재 실패한 체제로 판명된 공산주의와는 그 위상이 달랐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아닌 공산주의적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군부세력과 이슬람 중심의 종교 세력이 수카르노의 반대파들이었다.


부패가 심각했던 수카르노는 1965년 9월 30일에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친위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러나 수하르토 장군이 하루 만에 쿠데타를 진압하고 수카르노를 축출한다.(이들의 이름을 잘 구분해야 한다.) 1998년까지 무려 30년간 독재를 한 수하르토는 박정희와 판박이다.


수하르토는 쿠데타를 진압하자마자 수카르노의 지지 세력인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1965년 10월부터 1966년 3월까지 반년가량 공산당원뿐 아니라 무고한 주민들까지 적게는 50만 명에서 최대 300만 명이 학살당한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었고, 희생자는 노조원, 무전 농민, 지식인, 화교 등이었다.


권력자들은 대놓고 군대를 동원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우익 불법 무장단체인 판차실라 청년회와 깡패조직인 프레만을 학살의 전면에 세웠다. 이 두 조직은 사실상 한 몸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판차실라와 프레만에서 적극적으로 학살행위를 한 가해자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가해자가 자신의 얼굴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학살자들은 과연 카메라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과거를 반성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까? 혹은 과거를 기억에서 축소하고 평범한 사람처럼 사는 모습을 보여줄까? 혹은 반성을 하면서도 당시의 상황을 합리화할까?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정도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적어도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있겠지? 그러나 나는 순진했다.


관객들은 학살자들의 뻔뻔하고 왁자지껄한 자신감과 자랑하는 듯한 태도를 보며 머리가 멍해진다. '이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 나는 이 의문에서부터 리뷰를 시작해 본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외적 요인 : 사회적 단죄의 여부
2. 내적 요인 : '수(受)'를 왜곡하는 '상(想)'의 놀음
2-1> 블랙 미러, '인간과 학살'
2-2> 오온의 심각한 부조화에 빠지다.
3. '상수멸' : '상'의 소멸이 '수'의 소멸을 이끈다.




1. 외적 요인 : 사회적 단죄의 여부


영화 속 학살자들을 보며 '인간이 아니다(非人也). 인간이길 포기한 쓰레기다.'라며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결론 내리고 돌아서면 간단하다. 그러나 이들의 면면을 보면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변연계가 망가진 사이코패스도, 소시오패스도 아니다.

주인공 격인 안와르 콩고(1937-2019)는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가족들을 챙기고, 손주들을 사랑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한 노인이다.

손자들과영화감상.png 손주들에게 자신이 나오는 영화를 자랑하고 싶은 안와르 콩고


이들의 뻔뻔한 태도는 어린아이들이 해맑고 잔인하게 벌레를 죽이는 모습이 연상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무지한 잔인성에서 탈피한다. 그러나 안와르 일당은 오히려 성인이 되어 무지성적 잔인함을 키웠다.


이들은 '희대의 연쇄살인마'와 같은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조건만 갖춰지면 번성하는 곰팡이처럼 이들에게 어떤 환경이 주어진 것이다.

학살자들에게 주어진 환경을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2012년도에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에서는 여전히 학살자들의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학살의 주역인 판차실라 청년회의 회원 수는 300만 명이나 된다. 피해자들은 숨죽이고 두려움에 떨며 증언에 나서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학살자들은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당당하게 활보하였다.

그 후 2014년에 조코위(조코 위도도)가 민주적인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 되면서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고는 한다.


별다른 직업도 없었던 안와르와 친구들은 처음에는 돈만 주면 뭐든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 프레만이 되었다. 공산주의가 뭔지도 몰랐다. 안와르는 공산주의자들이 미국 영화 상영을 막는 바람에 암표를 팔지 못했던 것에 앙심을 품는 정도였다.


이들이 학살의 한가운데 있을 당시에는 피가 피를 부르는 비이성적 광기에 지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살의 광풍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이들의 정신은 오랜 기간에 걸쳐 우호적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기괴한 형태의 합리화로 고착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펜하이머 감독은 피해자의 다큐멘터리를 찍으려 했던 애초의 계획을 방향 전환하게 된다. 피해자들이 입을 열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뷰한 수많은 가해자는 예상과 달리 자신들이 자행한 일들을 자랑스럽게 떠벌린다. 더 나아가 감독은 프레만이었던 안와르 콩고 등에게 그들의 위대한 살인 '업적'을 재현하는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안와르는 젊은 시절 영화관을 운영한 적이 있는 할리우드 영화광이기도 하여 영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영화에 나온 각종 살인 방법을 응용해 만든 자신만의 효율적인 살인 기법을 자랑하기도 한다. 안와르와 친구들은 영화의 시나리오에 참여하고 직접 가해자와 피해자의 연기도 하고, 찍은 필름을 보며 토론도 한다.

이러한 영화의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다큐멘터리를 구성한다.


"잔인한 행위들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됐다."


사회적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해자들은 '괜찮으니까 처벌받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들은 주변에 같은 죄를 저지른 동료들과 계속 어울리며 정당화의 견고한 틀 속에서 연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정당하다.', '나는 옳은 일을 했다.', '나는 영웅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라는 논리 비약까지 가능하다.

이것은 수많은 역사책에 쓰여 있는 승자의 논리이기도 하다.


안와르는 영화 제작의 목적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이게 큰 극장에서 상영되느냐 아니면 TV에 나가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보여주는 게 중요해. 역사가 이렇다는 것을.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보여줘야 해. 그래야 나중에 사람들이 기억하지. 우리가 젊은 시절에 뭘 했는지를 말이지."


이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무엇을 한지를 기록해야 하고 사람들이 알도록 역사로 남겨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들의 바람대로 이들이 저지른 행위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무의식 깊은 곳에 처박아놓은 갈 곳 없는 죄책감은 악몽으로라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안와르와 친구들은 이런 죄책감을 누구나 겪는 단순한 신경 장애로 치부하고, 요즘 유행하는 정신치료를 받아보라고 서로 권하기도 한다.

조금이나마 남은 죄책감의 뿌리는 외부로 돌려버린다.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어디서나 일어난 일이다. 우리를 비난하려면 미국의 인디언 학살부터 단죄해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자신에게 면죄부를 허용한다.


안와르는 아무런 외적인 단죄도 받지 않고 2019년에 천수를 누리고 갔다.




2. 내적 요인 : '수(受)'를 왜곡하는 '상(想)'의 놀음


2-1> 블랙 미러, '인간과 학살'


나는 <액트 오브 킬링>을 보면서 넷플릭스 시리즈인 <블랙 미러>의 에피소드 중 '인간과 학살(Men Against Fire)[S3-5]'이 떠올랐다. 이 에피소드는 세뇌된 군인을 인간병기로 사용하는 이야기이다.


신참 군인 스트라이프는 마을을 습격하는 벌레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벌레들은 선량한 시민을 습격하고 병을 옮기고 번식하는 징그러운 생명체다. 신체에 이식된 첨단 장비인 'MASS 시스템'으로 전투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시대여서, 군인들은 벌레들을 효과적으로 소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스트라이프에게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 작전하러 가면 자신이 사살하려는 존재가 징그러운 벌레가 아닌 민간인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진실은 정부에서 특정 집단을 말살하기 위해 MASS 시스템에 군인의 신경계를 조작하는 장치를 했던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군인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MASS 장비를 삽입하지 않았으니 벌레들이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과 다른 악한 집단이라고 세뇌 교육을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군인들의 무자비한 학살을 방관했다.

블랙미러S305.jpg 스트라이프는 한밤중에 악몽을 꾸고 일어나 보니, 옆에 자고 있던 동료들이 모두 똑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MASS시스템이 이미 무의식 깊이 잠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최첨단의 MASS 시스템이 없더라도 인간은 교육과 세뇌로 얼마든지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블랙미러의 마을 주민들처럼.

안와르 일당은 자신들에게 특화된 MASS 시스템 속에서 영웅의 역할을 하는 환상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셈이다.


이들이 오펜하이머 감독과 함께 만드는 영화는 자기들 마음속에 있는 MASS 시스템을 예술로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영화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초현실주의 장르에 가까워진다.

마지막 피날레는 멋진 폭포가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의 천국에서 펼쳐진다. 선녀 같은 여인들이 주변에서 춤을 추고, 안와르는 중앙에서 마치 자애로운 신처럼 팔을 벌리고 서 있다.

하이라이트는 목 졸려 죽은 피해자가 자신의 목에 걸린 전선을 풀고, 안와르에게 금메달을 걸어주며 말하는 장면이다.


"날 처형하고 천국에 보내주어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메달을 드립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피날레 뮤지컬1.png 검은 옷을 입은 안와르는 천국에서 성스러운 음악에 맞춰 춤추는 선녀들에 둘러싸여 있다. '죽음의 신'인가?
피해자의 금메달수여2.png 피해자는 자신의 타락한 영혼을 구원한 안와르에게 감사하고, 모두가 손에 손잡고, 해피엔딩이다.


그래도 용서는 받고 싶었나 보다. 곧 다가올 죽음 후에 자신의 영혼이 받을지도 모를 처벌에 대한 불안이 엔딩 장면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2-2> 오온의 심각한 부조화에 빠지다.


안와르 일당의 정신 상태를 불교식으로 설명하자면 '오온'의 부조화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전도된(거꾸로 뒤집어진) '상'에 의해 왜곡된 '수'가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형이상학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구체적인 대답을 내놨다. 인간은 오온(五蘊), 즉 다섯 개의 무더기라는 것이다. 절에 가면 늘 빠지지 않고 독경하는 <반야심경>의 '색수상행식'이 오온이다.


붓다는 깊은 명상 속에서 존재를 관찰하고 인간은 물질 현상과 정신 현상이 결합된 적집이라고 결론 내렸다. '색(色)'은 물질의 무더기이며, '수(受)-상(想)-행(行)-식(識)'은 정신의 무더기들이다.

빠알리어로는 '색'은 '루빠(rūpa)', '수'는 '웨다나(vedanā)', '상'은 '산냐(saññā)', '행'은 '상카라(saṅkhārā)', '식'은 '윈냐냐(viññāṇa)'이다.


붓다가 이렇게 오온을 말한 것은 수행의 방향성과 관련된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자아'라는 뭉뚱그려진 추상적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아'라는 가상의 존재를 찾아서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를 헤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자아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나를 조각조각 해체하여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물질은 자명하기 때문에 '색'이라는 하나의 영역에 넣었지만, 정신 현상은 복잡성을 띠기 때문에 '수, 상, 행, 식'으로 구분하였다.

'식'은 정신의 바탕이 되는 그릇이다. '행'은 모든 복합적인 심리적 행위를 망라한다. 사실 '수'와 '상'도 행에 넣을 수 있지만, 붓다는 수와 상을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따로 독립시켰다.

인간 정신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수(웨다나)와 상(산냐)이라고 할 수 있다.


수(웨다나)는 우리가 외부 대상과 접촉하면서 생겨나는 느낌이다. 웨다나는 감성, 정서보다 더 원초적인 단초가 되는 느낌이다.

감각기관이 대상에 접촉하여 발생하는 즐거움, 괴로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 가지의 느낌이 있다. 쓸쓸함, 행복감, 분노 등 우리가 생각하는 많은 느낌은 웨다나가 가공된 행(상카라)에 속한다.


웨다나는 홀로 경험되지 않는다. 반드시 상(산냐)이 함께 개입되어야 우리는 경험을 인식할 수 있다. 웨다나와 산냐가 결합하였을 때 우리는 감정, 정서를 느끼는 것이다.


상(산냐)은 대상을 개념화하고 이름을 붙여서 관념을 통해서 아는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 프레임, 가치관, 견해, 철학, 지식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 산냐이다.

진실과 동떨어진 전도(轉倒)된 산냐를 가지면 우리는 현실을 왜곡해서 느낄 수밖에 없다. 뒤집힌 산냐는 왜곡된 웨다나를 만들어낸다.


가해자들은 프레만(Freman)을 소개할 때 그 어원을 여러 번 강조하여 언급한다. "프레만은 영어의 '자유인(freeman)'에서 유래됐다."

자신들을 '서방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자유인'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산냐이다. 자유인이 퇴치하려 하는 공산당은 자유를 말살하는 악이 되고, 그들을 말살한 자유인의 행위는 자유를 위한 것이 된다.


안와르의 친구인 또 다른 학살자 아디 줄카드리는 말한다.


"사람을 죽이는 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범죄야. 그러니까 어떻게든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해. 적당한 구실을 찾아야지. 예를 들어, 누가 나한테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 물론 충분한 보상을 해준다면야 당연히 그걸 하겠지. 어떻게 생각하면 그건 잘못이 아니야. 우린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야 해. 어차피 도덕관념은 상대적인 거거든."


아디는 자기 합리화를 위한 온갖 산냐를 만들어낸다. 부분적 진실을 가져와서 선악의 상대성을 주장하고, 승자의 논리, 거시적 범죄를 말하며 그 뒤에 자신의 범죄를 숨긴다.

감성적 유형인 안와르에 비해 지적인 유형인 아디 같은 사람은 더욱 산냐에 고착되기 쉽다.


<고요한 소리>의 회주이신 활성 스님은 산냐는 세상의 온갖 헛것들을 만들어내는 작용이라고 말한다. 산냐에 의해 웨다나는 얼마든지 조작되고 해석될 수 있다. 이 세상에 산냐 놀음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생각한 것이옵니다."라는 대장금의 대사처럼 그렇게 느껴지니까 느껴진다고 여긴다.


산냐는 감각기능 자체에 개입한다. 첨단 기술로 만든 산냐라고 할 수 있는 블랙미러의 MASS 시스템을 통해 군인들의 감각기관은 평범한 사람이 악귀로 보이게 된다.

나와 똑같은 인간의 얼굴을 보며 그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바퀴벌레나 해충을 죽일 때는 가차 없다. 감각에서부터 원초적 혐오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안와르 일당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상을 보여준다. 그들은 갖가지 사치품, 보석, 한정판 희귀템을 자랑한다. 그중 감독의 시선이 한동안 머무는 것은 동물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동물 박제 컬렉션이다.

박제 사슴들.png
박제-사슴이여자고,표범이남자라고생각해봐.png
박제 동물들은 너무 생생해서 진짜 동물원처럼 보인다.


자신들의 왕국이 흐뭇한 나머지 한 친구는 박제 동물들을 구경하며 농담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재치 있음에 내심 뿌듯해한다.


"사슴이 여자고 표범이 남자라고 생각해 봐!"


이들의 감각기관에는 피해자가 표범 앞에 놓인 무기력한 사슴처럼 보였던 것이다.




3. '상수멸' : '상'의 소멸이 '수'의 소멸을 이끈다.


불교 수행은 깨달음의 실현 단계를 9단계로 구분한다. 최종 깨달음의 완성은 '상수멸(想受滅)'이다. 상(산냐)과 수(웨다나)가 모두 소멸한 단계이다. 그런데 여기서 '수상멸'이라고 안 하고 '상수멸'이라고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수가 삶의 모든 합류점이며 수행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는 상의 놀음에 의해 좌우된다.

수와 상은 피와 살 같이 동시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따로따로 소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상의 소멸 없이는 수의 소멸은 불가능하므로, 상을 앞쪽에 세운 것이다.


수를 관찰하는 실천 수행과 함께 상을 바로 세우는 바른 견해를 위한 공부가 '교학과 수행의 조화'이다.

불교는 필연적으로 '지와 행의 조화'를 강조하는 지적인 수행체계가 될 수밖에 없다.


무지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선함이 무엇인지, 왜 선을 행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지하고 선량한 이들에게는 단지 악한 일을 할 계기가 무르익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언제든 상황에 따라 악한 일도 할 수 있다.

악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무지'한 것이다.

무지한 상태의 인류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등장하는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 두 번째 리뷰에서는 <액트 오브 킬링>을 유학적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첫 번째 리뷰가 '산냐'를 중심으로 한다면, 두 번째 리뷰는 '웨다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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