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적 관점] '악의 평범성'인가, '선한 마음의 씨앗'인가?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흉악한 범죄나 참상이 일어날 때마다 소환되어 곤욕을 치르는 것이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다. 실제로 현실의 많은 증거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현의 말씀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우리에게는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 속 시원한 매력으로 다가와서 이해하기 쉬운 것 같다.
<액트 오브 킬링>의 가해자들을 보면 다시금 순자가 옳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과연 그런가? 맹자는 순진했는가?
첫 번째 리뷰에서는 불교적 관점에서 가해자들의 정신 현상을 분석해 보았다.
불교의 중요한 두 개념인 '웨다나(受)'와 산냐(想)'를 가져와서, 산냐(상)가 어떻게 웨다나(수)를 왜곡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웨다나와 산냐'는 설명이 좀 필요한 개념이지만, 쉽게 말하면 불교식 '감성과 지성'이다.
첫 번째 리뷰에서는 가해자인 안와르 일당의 '산냐' 형성 과정에 집중했다면, 두 번째 리뷰에서는 '웨다나'를 중심에 두고 유학적 관점으로 분석해 보려고 한다.
# 첫 번째 리뷰를 먼저 읽고 오실 것을 추천합니다. 연결된 내용입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전국시대의 참상 속에서 맹자가 선택한 전략
2. '악의 평범성'과 '선의 연약한 씨앗'
3. 유학적 관점에서 본 '웨다나'의 본질
4. 맹자가 말하는 사단의 본질
5. 악의 물방울과 선의 물방울
맹자는 순진했는가? 그저 이론 속에 파묻힌 사람인가? 혹은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어둠에 관한 통찰이 부족했던 것일까?
맹자(BC 약 372 - BC 289)는 전대미문의 약육강식의 시대였던 전국시대(BC 476 - BC 221)를 관통하여 살았던 사람이다. 맹자가 당시 백성들의 상황을 묘사한 것을 보면 참혹하기 그지없다.
임금의 주방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도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에게는 굶주린 기색이 보이고 들에는 기아로 죽은 시체가 널려 있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짐승들을 몰아 인육을 먹게 하는 짓이다(庖有肥肉, 廏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此率獸而食人也).
인과 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짐승을 몰아 인육을 먹게 하고, 언젠가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게 할 것이다(仁義充塞, 則率獸食人, 人將相食).
『맹자』등문공(하) 8장
맹자가 순진해서 성선설을 말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맹자는 사람들의 사악한 속성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선설은 맹자가 세상을 경영하는 전략으로 제시한 것이다.
맹자는 공자의 적통임을 자부한다. 왜냐하면 맹자는 공자의 이상을 완전하게 계승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仁)을 중심으로 하는 덕치주의를 꿈꿨고, 맹자는 인을 실현하기 위한 정신적 체계를 완성했다.
후대에 와서 맹자는 바람대로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공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맹자는 공자의 추상적인 '인'을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으로 설명한다.
불인인지심은 인간으로서 차마 다른 인간에게 OO 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맹자는 유명한 적자(赤者)의 비유를 든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얼굴에 빨간기도 안 가신 어린애(적자)가 아무것도 모른 채 우물로 기어간다면, 그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황급히 뛰어가 아이를 구할 것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의 마음에는 아무런 계산이 없고, 오직 아이를 구하려는 본능적 행동만 있다.
물론 그 순간이 지나면 '아이 부모가 보상할지도 모른다'는 둥, 혹은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겠구나'는 둥, 여러 가지 계산이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구한 사람이 과거에 범죄자였을 수도 있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도 우물의 급박한 상황에서는 아이를 구하려는 충동이 일어날 것이다.
맹자는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 외에 다른 사심이 없는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있는 선한 마음의 실마리(端), 사단(四端)의 출발이다.
사단은 원초적인 느낌인 웨다나에 기초하고 있다.
맹자는 이러한 마음의 단초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보았다. 발현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
마치 누에고치에서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실을 뽑아내어 비단을 만드는 것처럼, 맹자는 인간에게서 선한 마음의 씨앗을 뽑아내서 경작하려고 했다.
<액트 오브 킬링>에서 안와르 콩고는 무자비한 학살자였으나, 그의 현재 일상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안와르는 손주들에게는 온화한 얼굴을 하는 보통 할아버지이다.
손주들이 오리를 때려서 다치게 하자 손주들을 타이르며 오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쓰다듬어 주라고 가르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무시무시한 나치 장교도 가족들과 단란한 일상을 보낸다. 우리는 흉악한 범죄자에 관해 주변 사람들이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좋은 이웃이었다고 인터뷰하는 것을 종종 접한다.
우리는 이런 이중성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맹자는 같은 현상에서 그들의 작은 선함에 주목하여 '선의 연약한 씨앗'을 끌어낸다.
맹자는 얼룩말의 검은 줄을 보는 대신 흰 바탕을 보았다.
악당들에게도 최소한 자기 자신, 자기 가족, 친구들을 향한 선한 마음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안와르가 오리를 대하는 작은 마음이 바로 '불인인지심'이다. 오리 '압(鴨)' 자를 써서 '불인압지심'이라 해야겠지만.
그러나 오리에게 차마 잔인하게 못 하는 마음이 다른 인간에게 확장되지 못한 것이 악당들의 비극이다.
『맹자』에서 제선왕이 맹자에게 질문하는 대목이 있다. 왕이 자신도 선생이 말하는 왕도정치를 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는지를 물었을 때, 맹자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며 그 근거를 이렇게 말한다.
"신이 들으니, 왕께서 대청 위에 앉아 계실 때 소를 끌고 대청 아래로 지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소를 데리고 어디로 가는가?'하고 말씀하시자, 그 사람이 '장차 흔종(종을 새로 만들었을 때 액땜을 위해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두어라. 내가 그것이 무서워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사지로 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시니,
'그럼 흔종을 그만둘까요?' 하자, 왕께서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어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맹자 』양혜왕(上) 7장
제선왕이 눈앞의 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안와르의 오리를 향한 마음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마음의 작은 실마리(端)이다.
살아있는 것이 내 눈앞에서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 인을 실천하는 것이다.
소는 안되고 양은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소는 우연히 내 눈앞에 있었고, 양은 내 눈앞에 있지 않았으니 둘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이 인지상정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의 문제이다.
그런데 왜 불쌍한 동물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백성들이 비참함에 허덕이는 것에는 눈감을 수 있는가? 왜 오리는 불쌍히 여기면서,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을 수 있는가?
맹자는 '사단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지만 단지 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맹자가 말했다. "어떤 자가 왕께 '나는 백균(3000근)을 들 수 있지만 깃털 하나는 들 수 없습니다. 나는 눈이 밝아서 추호(가늘고 미세한 털)의 끝도 볼 수 있지만 수레에 가득 실린 섶나무는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금 왕의 은혜가 짐승에게는 미치면서 공(功)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깃털 하나를 들지 못하는 것은 힘을 쓰지 않는 것이며, 수레에 가득 실린 섶나무를 보지 못하는 것은 밝은 시력을 쓰지 않는 것이며, 백성을 보호할 줄 모르는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왕도를 실행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맹자』양혜왕(上) 7장
여기서 불교와 유학의 차이가 있다.
불교는 웨다나(느낌)의 왜곡을 산냐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에, 바른 견해를 통해 바른 산냐를 가지는 것을 중시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바른 관점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팔정도의 첫 번째도 '정견(正見)'이다.
안와르 일당은 '피해자들은 죽어 마땅하며 그들을 처단한 자신들은 영웅'이라는 잘못된 산냐를 통해 잘못된 견해(邪見)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잘못된 산냐는 그들의 웨다나를 왜곡하여, 끔찍한 짓을 하고도 무감각할 수 있었다.
유학은 기본적으로 차별하는 마음이다.
반면, 묵가는 세상 모두를 공평무사하게 대하는 철저한 이상주의를 표방하였다. 공자와 맹자는 묵가를 한 목소리로 맹비난했는데, 묵가는 이성적으로는 옳은 것 같지만 인간의 감성에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장례식과 길에 죽어 있는 생판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같은 비용을 쓰는 것은 사람의 본성을 속이는 짓이라는 것이다.
공자의 '친친(親親)'은 가까이 있는 이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유학에서 왕이 백성을 직접 살피는 순행(巡幸)을 중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직접 눈으로 봐야 측은지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맹자는 차별하는 작은 마음을 확장시키는 방법으로 사단(四端)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제시한다.
사단의 마음이 수행을 통해 매일매일 축적되어 우주만큼 커진 것이 호연지기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묵가가 말하는 이상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맹자는 사단을 키우는 것을 의지의 문제로 보았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웨다나(느낌)의 작은 단초는 연약한 것이어서 그것을 키우려는 마음의 의지가 중요하다.
안와르는 오펜하이머 감독과 영화를 찍으면서 대학살 당시 자신이 했던 학살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때려죽였는데 피가 너무 많이 흘러 피비린내가 심해서, 자신이 특별한 도구를 고안했다고 말한다.
안와르는 전선으로 올가미를 만들고 그 끝에 막대기를 연결한 살인 도구를 만들었다.
전선의 한쪽 끝을 기둥에 고정시키고 희생자의 목에 올가미를 끼운 후 다른 쪽 끝의 막대기를 잡고 힘껏 끌어당겨서 손쉽게 목 졸라 죽이는 방식이다.
영화 촬영하면서 안와르는 살인하는 시범을 보이며 무의식 중에 웃는다.
그는 집에 와서 영화의 편집본을 검토하다가, 자신이 살인을 재현하며 웃고 있는 장면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진다. "저 때 웃으면 안 되었는데!"
인간의 웃음은 다양한 함의를 가진다. 즐겁고 좋아서 웃기도 하지만, 혼란스럽거나 부끄러울 때 얼버무리기 위해 웃기도 한다. 안와르는 말로는 자신의 학살 행위를 자랑했지만, 막상 재현하니 마음이 불편하여 무의식 중에 웃음으로 중화시키려 했을 수 있다.
선한 행동을 했을 때 사람의 표정은 자연스럽게 밝아지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이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마음의 법칙이다.
악한 행동을 하며 미소 짓고 편안한 마음도 가지려는 것은 물을 상류로 올려 보내려고 하는 것처럼 에너지가 많이 든다.
지금 고요하게 복식호흡을 하며 몸과 마음이 이완된 상태에서 화를 내는 실험을 해보라. 절대 화를 낼 수 없을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온몸이 긴장되어야 화를 버럭 낼 수 있는 법이다.
안와르는 자신을 자랑하고 정당화하면서도 띄엄띄엄 불편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런 걸 전부 다 잊으려고 애썼어요. 좋은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즐겁게 살려고 했지. 술도 마시고 마리화나도 피우고.. 일단 취하면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아요."
"제가 악몽을 꾸는 건 옛날에 제가 했던 일 때문이에요. 죽기 싫다는 사람들을 억지로 죽였잖아요."
<액트 오브 킬링>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와르는 뜻하지 않은 행동을 하여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안와르는 학살 당시 자신이 무수한 사람을 죽였던 옥상으로 오펜하이머 감독을 데려와서 설명한다.
"바로 여기가 우리가 잡은 사람들을 끌고 와서 고문하고 죽였던 곳입니다. 나쁜 일이란 건 알지만 그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어요."
그는 자신을 끝까지 합리화하고 방어한다. 그러다 말을 멈추고 갑자기 끔찍한 소리를 내며 구토한다. 구토하고 나서 또 말한다.
"왜 죽여야만 했냐고요?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내 양심이 그 사람들을 죽여야만 한다고 했거든요."
그는 사람을 손쉽게 죽이기 위해 고안한 전선과 포대 자루에 관해 설명하다 말고, 또 참을 수 없는 구토를 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목에 수백 번은 감았던 전선들이 마치 자신의 목에 한꺼번에 감긴 듯이 안와르는 엄청나게 구토를 하고 있다.
웨다나는 속일 수 없다. 우리가 바퀴벌레를 혐오하듯이,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끔찍한 일에 대해 일어나는 웨다나는 처리할 길이 없어 구토로 나온다.
사람들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위선을 하는 이유도 어떻게든 불편한 웨다나를 무마시켜 보려는 시도이다.
선은 말이 없고, 악은 수다스러운 이유다.
선은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지만, 악은 끊임없이 그 위에 무언가를 덮어서 악취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인인지심'은 우리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더 알려져 있다.
맹자는 측은지심과 세 가지 마음을 묶어서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을 말한다.
보통 사단을 동일한 위상의 네 가지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가의 도덕 체계는 인(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인은 불인인지심이며 측은지심이다.
맹자는 측은지심(인)을 보필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들을 추가하여 사단의 구조를 세웠다.
측은지심이 실천되고 표현되는 마음이 '수오지심(羞惡之心)'과 '사양지심(辭讓之心)'이다.
수오지심은 악을 미워하여 의로움을 행하는 '의(義)'를 말하며, 사양지심은 인의 마음이 겉으로 지극하게 표현되는 '예(禮)'를 말한다.
보통 맹자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의(義)'를 말하는데, 어디까지나 의는 인을 실천하고 구현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의'와 '예'는 인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덕목이다. 의와 예는 인의 실천이며 의지이다.
'인 없는 의'는 맹목이며, '인 없는 예'는 허례허식이다.
인을 웨다나(감성)에 속한 것으로 본다면, '시비지심(智)'은 산냐(지성)에 속한다.
'지 없는 인', 즉 올바른 가치관이 지원하지 않는 '인'은 무지성적 동정심이 될 수 있다. 이때 공자의 '친친(親親)'은 내 편 봐주기, 가족 이기주의, 따돌림과 같은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인 없는 지'는 다 타버리고 남은 재와 같은 공허이다.
공자가 말하는 '친친'은 사람의 마음에는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가족과 친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범위를 넓혀가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불교 수행은 산냐를 중시하는 지성적 수행 체계라면, 유교 수행은 웨다나를 중시하는 감성적 수행 체계라는 생각이 든다.
불교는 즐겁든 괴롭든 모든 웨다나는 결국 고(苦)이므로, 모든 웨다나에 집착을 끊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생은 감각적 즐거움을 끊는 것에서부터 높은 벽에 부딪힌다.
유교는 웨다나의 긍정적 측면을 잡아서 거기서부터 시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생은 결국 이기적인 작은 마음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영적인 삶에서 쉽게 갈 수 있는 지름길은 없다.
영화의 막바지 작업을 할 때, 안와르는 오펜하이머 감독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정말 안타까운 건... 솔직히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 했어요. 친구들은 나에게 더 잔인하게 연기하라는데, 그때 여자들과 아이들을 봤어요."
영화에서 안와르는 학살자 역할도 하고, 희생자 역할도 했다.
연기였지만 자기 눈앞에서 울부짖는 여자와 아이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안와르 : "내가 예전에 고문했던 사람도 기분이 나처럼 저랬을까요? 내가 고문한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네요. 왜냐하면 저럴 때 나란 사람의 존엄성이 파괴됐잖아요. 그리고 공포를 느꼈죠. 저 순간에. 갑자기 온갖 공포가 내 몸을 파고들었어요."
오펜하이머 감독 : "그때 고문당한 사람들은 훨씬 더 고통스러웠죠. 안와르 씨는 영화란 걸 알지만 그들은 죽는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안와르 : "내가 정말 죄를 지은 건가요? 난 수많은 사람에게 이런 짓을 했는데 그게 다 나한테 돌아오는 건가요?"
오펜하이머 감독은 다큐멘터리의 중립적인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필요한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래서 안와르의 마음에 작은 조약돌 하나가 던져지고, 그것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다 사라진다.
너무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내면에서 축적된 거대한 악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거대한 악은 한 번에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 속 조커 같은 거대악, 순수악을 상상하지만, 그런 건 없다.
작은 것에서부터 확장되는 것이다.
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서 큰 항아리를 가득 채우듯이, 조그만 악이 쌓여서 거대한 혼돈을 만들어낸다.
안와르는 자신이 일생 축적한 혼돈의 검은 밑바닥을 보고 놀란다.
살짝 엿보고 다시 뚜껑을 닫아버린 채, 그는 결국 혼돈 상태에서 자연의 부름을 받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커다란 선도 한 번에 생기는 법이 없다.
조금씩 쌓아가다 보면 점차 명료해질 뿐이다.
모든 존재가 죽기 직전에 최고의 명료한 상태에 도달하여 눈을 감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법구경>의 선과 악의 물방울 비유는 내가 늘 마음에 되새기는 구절이다.
‘그것은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악(惡)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떨어지는 물방울로도 물항아리가 차듯이
조금씩이라도 악이 축적되고 있는 어리석은 이는 언젠가 악으로 찬다.
재앙은 되지 않을 것이라 하여 작은 악(惡)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한 방울의 물은 비록 미미하더라도 점차 불어나 큰 그릇을 채우나니,
무릇 죄가 충만하다는 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쌓여 이뤄진 것이다.
‘그것은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떨어지는 물방울로도 물항아리가 차듯이
조금씩이라도 선이 축적되고 있는 현명한 이는 언젠가 선으로 찬다.
복락은 없을 것이라 하여 작은 선(善)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한 방울의 물은 비록 미미하더라도 점차 불어나 큰 그릇을 채우나니,
무릇 복이 충만하다는 것은 한 올의 실로부터 실오라기가 쌓인 것이다.
<법구경 > 121,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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