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편] "삶과 죽음은 하나다. 두려움에 압도되지 말지어다."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음(老), 병듦(病), 죽음(死)의 과정에 진입하게 된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노병사'의 과정은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떨어지듯이 한순간도 멈춤 없이 진행된다.
1편에서 <토리노의 말>의 6일간을 '고속 죽음'의 과정으로 보았다. 생사(生死)의 그물에 걸린 존재들은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그 노력은 결국 실패한다. 니체가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라고 고백하듯이.
첫 번째 글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절망편'이지만, 두 번째 글은 일종의 '희망편'이다. <토리노의 말>이 구현해 낸 '지루함'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통해서 삶과 죽음을 대하는 관점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 이 글을 읽기 전에 첫 번째 리뷰를 먼저 읽고 오시기를 추천합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지루함은 인류 최후의 적이다.
1-1> 영화처럼 지루함을 '편집'하세요.
1-2> 지루함은 죽음의 두려움을 퍼올린다.
2. '지루함 수행'은 인류 최후의 희망이다.
2-1> 삶과 죽음은 하나다. 두려움에 압도되지 말지어다.
2-2> 오억 년 버튼을 누를 것인가?
2-3> '사식(四食)의 단속'은 지루함을 직면하는 수행이다.
1-1> 영화처럼 지루함을 '편집'하세요.
벨라 타르의 영화에는 부가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토리노의 말>은 대부분 롱쇼트로 이루어져서, 전체 쇼트 수는 31개에 불과하다. 영화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가끔 삽입되는 내레이션과 몇 마디 짤막한 대화와 끊임없이 부는 바람 소리와 단조로운 음악 한 곡뿐이다.
기존의 상업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지루함과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OTT로 보고 있다면 당장 종료 버튼을 누르고,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추천 리스트를 훑으며 흥미를 끄는 다른 영화를 찾게 될 것이다.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가 재미있고 편한 이유는 영화와 나 사이에 안전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수십 명이 죽어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다. 사람이 낙엽처럼 날아가고, 대규모 파괴가 자행되는 액션 영화는 '손에 땀을 쥐는', '눈을 뗄 수 없는' 영화라고 홍보된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울고 웃으며 몰입했다 해도 극장을 나서면 그 감정은 금세 휘발되어 버린다. 우리가 실제 살아가며 겪는 감정과 영화에서 제공하는 감정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현실이 우리가 실제로 겪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은 영화의 편집 방식과도 관련된다.
누군가가 아침에 일어나서 옷 입고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차를 타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는 모든 순간을 그대로 필름에 담아 상영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출근할 때는 기본적으로 한두 시간이 소요되지만, 영화에서는 불과 몇 초 만에 모든 일이 가능하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이 한 컷 나오고, 어느새 외출복을 입은 주인공이 지하철 안으로 순간 이동한다. 다음 순간 주인공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식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영화처럼 활동과 활동 사이의 무의미한 시공간을 편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에서는 순간 이동이 불가능하며, 빠르게 재생할 수도 없다.
'어떤 시선으로 시공간을 매끄럽게 도약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영화의 성격을 규정한다. 같은 이야기라도 무슨 장면을 넣고 뺄 것인가, 장면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 그래서 영화를 '편집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러면 '영화처럼 사는 인생'은 매우 근사하고 환상적일까? 특별한 사건과 이벤트, 강렬한 감정과 액션이 압축적으로 제시된 가상현실 속에서 산다면 오히려 숨 돌릴 틈도 없는 심각한 ADHD 증상을 겪지 않을까?
삶에서 '지루한 부분들'을 다 편집해내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사건과 이벤트만 남는다. 배경을 지워버린 그림에서 앙상하고 빈약한 실루엣만 남는 것처럼.
그러나 <토리노의 말>은 정반대의 편집 전략을 취한다. 첫 장면부터 노쇠한 말이 휘청휘청 걸어서 집에 오기까지의 모든 시간을 롱테이크로 그대로 보여준다. 인물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입는 것, 물을 길어오는 것, 식사하는 것,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 것을 실제와 같은 속도로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꼼짝없이 주인공의 실제 현실 속에 갇혀서 같이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달아날 여지가 없다. 영화는 감정을 적절히 '컷'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지루함과 불편함이 일어난다.
1-2> 지루함은 죽음의 두려움을 퍼올린다.
우리의 실제 삶은 대부분 길고 긴 반복과 지루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삶은 빨리 감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삶을 사건(event)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영화처럼 삶을 바라본다. 영화 산업을 '꿈의 공장'이라고 하는 이유도 우리가 삶을 영화처럼 자유자재로 편집하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번잡한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나면, TV나 핸드폰으로 다시 정신을 최대한 번잡하게 해야 잠이 오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왜 이벤트와 이벤트 사이의 시공간을 못 견뎌하는가?
주변의 소음과 불빛이 가라앉고 고요해지면 우리가 무의식 속에 눌러놓았던 것들이 올라온다. 거부하고 미뤄두었던 개인감정뿐 아니라 가장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인류 공통의 '절망의 소용돌이'가 솟아오른다. 죽음이야말로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이기에 절망의 소용돌이다.
이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직접적인 두려움과 절망이 아니라 '지루함'이다. 지루함은 지금 이 순간을 못 견뎌하고 빨리 또 다른 활동과 자극으로 넘어가기를 원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지루함의 장판을 들춰내면 두려움과 절망이 숨어있다.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지칭하는 다양한 용어들이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와 지식에 초점을 둔 현생 인류를 지칭한다. 도구를 만드는 인간인 '호모 파베르', 경제적 인간인 '호모 에코노미쿠스', 신과 같은 존재로 진화한 인간인 '호모 데우스'까지 인간의 별명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호이징가(J. Huizinga)가 말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유희의 인간이다. 놀이, 레저, 향락, 소비 등을 포함한 모든 정신적 창조 활동을 특징으로 한다. 시간적, 금전적 여유와 함께 지루함이 넘쳐나는 현대인에게 어울리는 자질이다.
호모 사피엔스부터 호모 루덴스까지 내용은 다르지만 '활동 지향적'(심하게 말하면 '행위 중독')이라는 면에서 보면 차이가 없다.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활동은 지루함을 원동력으로 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지루함이 지금처럼 문제 되지는 않았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해야 할 활동이 이미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생존을 위한 고된 노동에서 점차 해방되자, 인간은 여가라는 것에 눈 뜨게 되었다. 그렇다고 인류가 그 '남는 시간'을 진짜 '여유롭게' 보내지는 않았다. 수많은 오락거리를 만들어 냈고, 라디오와 TV를 지나서,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지루함은 완전한 사망 선고를 받았다. 현대의 많은 사람이 노동과 여가의 황금비율(일명 '워라벨')을 즐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노동과 여가를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차이는 단 하나이다. 돈을 받고 하는 행위는 '노동'이고, 돈을 내고 하는 행위는 '여가'이다.
사실 인류는 한 번도 지루함을 대면해 본 적이 없다. 지루함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재미있는 활동들로 지루함을 덮었을 뿐이다. 그래서 지루함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공포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성공적!
2-1> 삶과 죽음은 하나다. 두려움에 압도되지 말지어다.
<토리노의 말>은 6일간의 죽음의 여정이다. 수비학(數秘學)적 관점에서 보면 6은 인간을 뜻한다. 최초의 여성수인 2와 최초의 남성수인 3이 결합하여 6이 된다(2 X 3 = 6).
남성(▽)과 여성(△)이 포개진 형태를 표현하는 '육각형의 별'은 남녀가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였음을 의미한다. 동양철학으로 말하자면, 음(陰)과 양(陽)의 결합이다.
음과 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이해하는 것이 동양철학의 핵심 관문이다. 여성은 음이고 남성은 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적인 분류일 뿐이다. '순양', '순음'은 가상적 개념이다. 여성 안에 남성(아니무스)이 있고, 남성 안에 여성(아니마)이 있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음양이 역동적으로 공존함으로써 생명력을 가진다. 생명의 특성은 '변화(變化)'이기 때문이다. 동일 속성으로만 이루어진 순양과 순음은 변화할 수 없다.
음양의 개념은 본래 하나의 언덕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현상에서 착안하여 나왔다. 햇빛이 비치는 면이 양(양달)이고 햇빛이 닿지 않는 면이 음(응달)이다. 양달과 응달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래서 음과 양의 본질은 하나의 '태극(太極)'으로 수렴한다. 태극은 음과 양의 상대적, 역동적, 상보적 속성을 상징한다.
탄생과 성장이 양이라면 늙음과 죽음은 음이다. 우리는 탄생과 성장, 늙음과 죽음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는 선형적 시간 개념에 익숙하다. 그러나 음양 이론에 의하면 삶과 죽음, 성장과 늙음은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 몸에서는 탄생과 죽음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죽은 세포가 피부 각질로 끊임없이 떨어져 나가고, 대략 3개월이 지나면 내 몸의 모든 세포는 새롭게 대체된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한 생각이 탄생하고 사라지는 것도 작은 '생사'다. 불교에 의하면, 정신은 물질보다 최소 7배 빠르게 움직인다.
우리 우주도 빅뱅으로 탄생하여 점점 죽어가는 과정에 있다. 2500년 전의 불교 경전에서는 이미 빅뱅과 비슷한 개념이 있었고, 심지어 크고 작은 우주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이 무수히 반복되어 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떨어진 각질을 애석해하거나 손톱을 깎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숲에 쌓인 낙엽을 보며 울지 않는다. 나라는 한 개체의 삶과 죽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인간은 추론과 분석이라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통찰을 한다. 그렇지만 두렵다. 공포는 가라앉지 않고 지루함은 여전히 견디기 어렵다.
"근원적 두려움의 완전한 극복은 오직 명상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올바른 방법으로 수행하는 수행자는 두려움이 없다. 적어도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는다.
2-2> 오억 년 버튼을 누를 것인가?
AI 시대를 맞이하며 인간의 고유 속성이라고 생각했던 창의성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단순한 여가 선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시간이 처치곤란한 상태로 갈 수 있다. AI가 모든 복잡한 활동을 도맡아 하고, 인간이 개나 고양이처럼 할 일 없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
은퇴자들은 알 것이다. "취미활동도 하루 이틀이지." 바야흐로 '지루함'이 인류 최후의 적이 될 수 있음이 분명해졌다. 특히 영화 같은 삶을 지향하는 활동 중심의 가치관 하에서는 더욱 그렇다.
인터넷에서 한창 유행하던 질문이 있었다. 예전에 나온 일본 만화에서 유래한 '오억 년 버튼'이라는 질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누르면 100만 엔을 주는 버튼이 있는데, 버튼을 누르면 어디론가 워프해서 그곳에서 오억 년을 보내야 한다. 그곳은 오락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죽거나 잠자는 등 의식을 잃는 행위도 불가능하다. 그냥 극한의 지루함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오억 년이 끝나는 순간 정신은 원래 몸으로 돌아오고 그동안의 기억은 사라진다. 버튼을 누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순간에 돈을 벌었다는 사실만 남게 된다. 당신은 버튼을 누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과 논쟁이 있다. 가장 끔찍한 것은 본체가 돈을 받는 재미에 빠져서 버튼을 마우스 클릭하듯이 연타하는 장면이다.
이 이야기가 다시금 흥한 이유는 인류가 당면한 지루함의 공포를 풍자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의 논쟁 속에 있는 공통점은 모두 오억 년의 시간을 고문이라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버튼 속의 세계가 명상을 위한 최적의 장소와 시간처럼 느껴져서 한 번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동굴이나 감옥에 관한 은밀한 로망이 있었다. 고립된 곳에서 외부 감각 자극을 차단한 폐관 수행자. 혹은 수십 년간 산속 동굴에서 홀로 무예를 연마하는 무협지 주인공. 지루함이라는 거대한 적을 무찌른 승리자!
2-3> '사식(四食)의 단속'은 지루함을 직면하는 수행이다.
인류가 당면한 지루함(=오억 년 버튼)은 오히려 정신적 도약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지루함 수행'은 오직 인간만이 가능한 활동이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수행 방법이 망라된 불교에서 보면, 지루함 수행은 '사식(四食)의 단속'과 비슷하다. '사식'은 빠알리어 '아하라(āhāra)'를 번역한 말인데, 인간의 육체적, 감각적, 정신적 먹거리를 말한다. 본격적인 좌선을 하기 위해서 사식 단속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첫 번째 사식인 '단식(段食)'은 덩어리진 음식이다. 단식은 거친 물질적 음식뿐 아니라 감각기관에 흡수되는 미세한 음식을 포함한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눈, 귀, 코, 혀, 몸으로 침투하는 미세한 단식이다. 현대인이 하루 평균 11시간 정도 사용한다는 디지털 기기는 대표적 단식이다.
지루함은 인류 최후의 적이 될 수도 있고, 인류 최후의 보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구 방위대의 사명을 띠고 지루함이 희망으로 느껴질 때까지 앞으로도 <토리노의 말>을 여러 번 더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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