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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 #1 | '고속 죽음'으로 가는 여정

[절망편] "이제는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by 아닛짜

많은 소설가들이 소설을 시작하는 첫 문장을 고심하여 쓴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소설의 첫 문장, 영화의 첫 장면을 설레는 맘으로 유심히 보게 되었다. 리뷰를 쓰는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 브런치북 연재를 처음 시작하며 설레는 맘으로 어떤 영화를 첫 번째로 할까 생각해 보았다. 큰 고민 없이 바로 답이 나왔다. <토리노의 말>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토리노의 말'이 성대 근처까지 올라온다. 그러나 실제로 추천한 적은 별로 없다. 실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토리노의 말>은 결코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내 의식 속에 있는 영화 서랍의 위 칸에 늘 놓여있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영화다.


헝가리 영화계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벨라 타르(Bela Tarr) 감독의 <토리노의 말(The Turin Horse)>(2011)은 철학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읽는 것이 가능함을 알려 준다.


'시청'이라는 것이 '독서'를 대체할 수 없으며, 둘은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영화를 보는 것은 감각적으로 압도되어 영화 안에 수동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라면, 인쇄된 글자뿐인 책을 읽는 것은 독자가 텍스트 사이의 공간을 통해 자기의 내적 현실로 재창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토리노의 말>은 영화도 독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영화에 있는 모호하고 심심한 시간과 공간들은 관객의 자유도를 높인다. 영화에 나오는 많은 상징을 통해 여러 해석, 심지어 상반된 해석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토리노의 말>에 관해 관객들과 평론가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니체의 철학 사상을 도입하기도 하고, 기독교 신학의 구도로 이해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에 '죽음' '지루함'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해해보려고 한다. (리뷰 #1은 죽음을 주제로, #2는 지루함을 주제로 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고속 죽음'으로 가는 과정
1-1> 니체의 낙타, 사자, 어린아이는 하나다.
1-2> 6일간의 '고속 죽음'의 체험
2.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실패한다.




1. '고속 죽음'으로 가는 과정


1-1> 니체의 낙타, 사자, 어린아이는 하나다.


검은 화면에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목소리는 뜬금없이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말년 일화를 소개한다.

1889년 1월 3일. 산책하던 니체는 마부가 말을 사정없이 채찍질하는 것을 본다. 그럼에도 꿈쩍 않는 말을 지켜보던 니체는, 갑자기 말에게 달려가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통곡하기 시작한다. 그는 침대에 이틀을 꼬박 누워있다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말한다.


그 후, 니체는 발작을 일으켜 10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니체의 발작과 죽음에 대한 일화를 듣고 관객은 영화에서 니체와 관련된 무엇이 나올 것을 기대하게 되지만, 영화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말(馬)'에게 시선을 돌린다. 마부가 거칠게 채찍질하던 말은 어떻게 됐을까? 이 물음에서 영화가 출발한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 나오는 말과 마부가 니체의 일화에 등장했던 그 말과 마부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니체는 말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했음이 틀림없다.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보통 사람을 넘어서는 사람, 즉 '초인'이다. 초인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며 자신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니체는 초인에 도달하는 과정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에 비유한다.


낙타는 등에 짐을 짊어지고 사회가 요구하는 책무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순응하는 존재이다. 잠들어 있고 무뎌져 있는 낙타에게서 떠오르는 것이 사자다. 사자는 짐을 집어던지고 기존의 가치, 관습, 체계를 부정하는 저항하는 존재이다. 포효하는 사자는 자유를 갈망하며 모든 억압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파괴와 혁명은 기존 체계를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사자는 낙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의식 성장의 최고봉은 어린아이다. 어린아이는 순종하지도 반항하지도 않는 순수한 존재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무지하고 약한 존재가 아니다. 낙타에서 사자를 거쳐서 도달한 도(道)의 존재다. 단지 경험이 부족하여 순수한 어린아이는 시간이 지나면 낙타가 될 뿐이다.

오쇼-rebirth.png 오쇼 타로의 구름 10번은 니체의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세 단계 의식 변화과정을 모티프로 한다.


초인을 추구했던 니체는 왜 낙타를 닮은 마차 끄는 말에게 감정이입을 했을까?


인간 본성에는 낙타, 사자, 어린아이가 공존하고 있을 뿐, 결국 본성을 초극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솔로몬 왕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고 말한 것처럼, 니체는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 인간은 결국 가련한 낙타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년에 절절하게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1-2> 6일간의 '고속 죽음'의 체험


영화는 아버지, 딸, 그리고 말의 6일간의 시간을 따라간다. 1일부터 5일까지는 각각 6개의 쇼트, 마지막 6일째는 1개 쇼트만으로 구성되어 롱쇼트의 진수를 보여주는 영화다.


세 존재는 6일 동안 조금씩 확실하게 쇠락해 가지만, 그 원인에 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태어나서(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다(死). 이 사실에 대한 어떤 설명도 그 원인을 명쾌하게 밝히지 못한다.


늙고 병드는 것은 죽음의 과정이기 때문에 '늙음, 병듦(老病)'은 '죽음(死)'에 포함된다. 따라서 '생로병사'는 '생사'로 요약할 수 있다.


나고 죽는 것은 우주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모든 존재는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생사(生死)'의 그물에서 절대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물 속에서 혹자는 자신만만하고, 혹자는 고통스럽고, 혹자는 낙천적이거나 비관적일 수는 있겠지만, 모두 동일 운명이다.


<토리노의 말>은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처럼 생로병사를 빠르게 돌리기로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는 세 존재의 '사(死)'의 과정을 지극히 정적이고 느린 템포로 진행하면서도, 관객이 6일간의 '고속 죽음'을 체험하게 한다.


영화는 다양한 상징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들을 생사의 그물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보려고 한다.



끊임없이 부는 바람


분량만으로 본다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광풍은 하루하루 거세게 불어오고, 바람을 막아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관객은 내레이션 후 바로 이어지는 첫 장면에서 거세게 불어오는 광풍을 맞아가며 앞으로 힘들게 나아가는 말과 마부를 한참 동안 보게 된다. 이들은 황량한 벌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집에 도착한다. 집에 있던 딸은 얼른 나와 이들이 각자의 안식처로 들어가는 것을 도와준다. 말은 마구를 벗겨서 마구간에 집어넣고, 마차를 옆의 창고에 밀어 넣고, 몸이 불편한 아버지가 실내복을 입는 것을 도와준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이들 삶의 전부이다.

2.말-부녀-운명공동체.png 말과 아버지, 딸은 각자의 역할은 다르지만 생사의 그물에 갇힌 운명 공동체이다.


광풍은 한 방향으로만 분다. 오로지 병듦과 늙음과 죽음의 방향으로만 분다. 부녀와 말은 이 바람의 흐름에 저항할 길이 없다.


옛사람들이 읊은 '탄로가(歎老歌)'는 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관한 체념과 달관을 함축하고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없네.
저근듯 빌어다가 머리우에 불리우고자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 우탁(禹倬)의 탄로가 -


고려 시대의 우탁이 말한 봄바람은 백발을 녹여주는 희망의 바람이지만, 영화 속의 광풍은 늙음의 길을 재촉하는 절망의 바람이다.



좁은 집과 창문


<토리노의 말>은 영화라기보다는 연극과 같다. 인물들은 연극 무대처럼 한정된 공간에서만 움직인다.


영화에서 말과 아버지와 딸은 감옥 속의 죄수처럼 보인다. 말은 눈 옆에 가리개가 있어 시야는 좁아져 있고, 온몸은 마차에 묶인 채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좁고 어두운 마구간이 기다리고 있다. 부녀도 좁고 칙칙한 집 안에 갇혀있다.


작은 집 안에서도 할 일은 많다. 식사 준비, 빨래, 바느질, 장작 패기, 우물 길어오기, 화덕 관리..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노동과 움직임이다. 집 밖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한 번 나가려면 있는 옷을 모두 껴입고 나가야 한다.


아버지와 딸은 감옥 같은 집안에서 각자 할 일을 마치고 나면 창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본다.

5.창을 내다보는 딸.png
6.밥먹고 창밖을보는 아버지.png
딸과 아버지가 창문을 통해 밖을 우두커니 보는 모습은 세상에 대한 고립을 말해준다.


창은 보통 안에서 밖을 보는 통로이며, 내부와 외부의 공기가 소통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한 번도 창문이 열리지 않는다. 창밖에는 황량한 풍경과 돌풍뿐이어서, 이들에게 집은 지긋지긋한 바람에서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은신처이다.


집과 창문은 우리가 자신을 지키는 자아 경계(ego boundary)를 상징한다. 에고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창문을 닫아걸면 에고의 집에 갇혀버리기 때문에 감옥이 되기도 한다.



음식과 식욕


영화의 첫 대사는 딸이 아버지에게 "식사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대사는 아버지가 딸에게 "먹어라, 먹어야만 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는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생을 이어가는 것은 식욕이다. 먹는 행위는 죽음을 지연시키고 잊게 한다.


한국 사람들은 서로에게 "식사하셨어요?"라는 인사말을 하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런 풍습이 단지 전쟁과 가난의 곤궁한 시기를 거쳤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상대방의 식사를 살피는 것은 상대방의 '노병사'를 염려하는 것이다.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인간에 관한 연민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10.식사테이블.png 부녀의 식사 메뉴는 삶은 감자와 소금뿐이다. 살기 위해 먹을 수 밖에 없다.


영화에서 식사 장면은 다섯 번 나온다. 첫 번째 날은 아버지가 감자를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다. 이렇게 '뜨거운 감자'를 맨손으로 잘 다루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날이 가면 갈수록 식욕이 떨어지며, 다섯 번째 날에는 반만 먹고 일어난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을 비하하고 사람이란 자고로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녀가 살기 위해 간신히 먹는 모습을 보면, '먹기 위해 사는 것'이야말로 풍요롭고 축복받은 상황이라고 느껴진다.


물과 불이 모두 사라진 마지막 날에는 감자를 삶지도 못한다. 등불을 켜지 못한 어두운 실내에서 부녀는 생감자를 앞에 두고 있다. 한편, 어두운 마구간에서 말은 둘째 날부터 갑자기 여물을 먹지 않고 일체의 움직임을 거부한다.



술, 악마의 선물


술은 생존에 필수품이 아니며 만들기도 어려운 사치품이다. 술을 만들 때 곡식도 많이 들어서 예전에는 흉년에 술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형편이 곤궁해도 술을 마신다. 오히려 형편이 어려울수록 더 집착한다.


술은 악마가 인간에게 베푼 선물이라고 한다. 부녀에게도 술은 음식보다도 귀중하다. 아버지는 아침마다 의식처럼 약술을 한 잔씩 마신다. 아버지는 이삿짐을 싸면서도 딸에게 술을 꼭 챙기라고 몇 번이나 말한다. 다섯째 날 아침에는 술을 연거푸 마시다가 아예 병째 마셔버린다. 이웃 남자가 멀리서 찾아와서 술 한 병을 달라고 할 정도로 술은 필멸의 존재들을 위로하는 사실상 '필수품'이다.



물과 불의 멸실


이제 술이 문제가 아니다. 생명의 본질인 물(水)과 불(火)이 갑자기 사라진다. 넷째 날에 우물이 바닥을 드러낸다. 전날까지 가득했던 물은 온데간데없다. 다섯째 날에는 등잔에 불이 꺼진다. 기름이 가득 있는데도 심지에 불이 붙지 않는다.

12.말라버린 우물.png 우물이 하루아침에 말라버렸다. 물이 없는 이곳은 이제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음양의 결합에 의해 생명은 탄생하고 지속한다. 음을 대표하는 물과 양을 대표하는 불은 생명의 필수요소다. 어린 시절에는 물과 불이 존재 전체에 흘러넘친다. 그러나 나이 들어갈수록 체내의 물과 불을 잃어간다. 세포가 탈수되어 쭈글쭈글해지고, 몸의 온기가 사라지는 것은 노인의 특징이다. 노인이 추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죽음의 냄새를 맡기 때문일 것이다.


부녀는 우물이 말라버리자 위기감을 느끼고 이사를 준비한다. 짐을 마차에 올리고 우울증에 빠진 말을 마차 뒤에 묶고, 딸이 앞서서 마차를 끌고 집을 나선다. 그렇게 이들은 화면을 빠져나간다.

한참 후에 이들은 다시 관객의 시야로 돌아온다. '노병사 앞에서는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부녀는 집에 돌아와서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등잔의 불씨마저 꺼져버린다. 이들은 유일한 식량인 생감자를 앞에 두고 식탁에 앉아 있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진다. 이제 완전히 암흑이 되었다.


혹자는 <토리노의 말>이 창세기를 뒤집어서 만든 영화라고도 한다. 기독교의 신은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고 하였고, 여섯째 날에는 인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인간이 먼저 나오고, 마지막 날에는 빛이 꺼지며 카오스로 끝난다.




2.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실패한다.


마지막 불씨마저 꺼지자 부녀는 혼란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딸 : "왜 이런 거죠?"

아버지 :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딸 : "불씨도 꺼졌어요."

아버지 : "내일 다시 해 보자."


알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해결책은 '일단 자고 내일 다시 생각해 보는 것' 뿐이다. 회피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안녕을 위한 최고의 해결책이다.


생로병사는 인간으로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니체와 같은 명석한 사람이라 해도 늙음, 병듦, 죽음의 우주적 폭격 앞에서는 모든 현란한 이론들이 빛을 잃는다.


그래도 인간은 어떻게든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철학, 문화, 종교, 예술 작품, 건축물, 우주선, 무기, 전쟁 등이 탄생했다.




둘째 날에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이웃 남자가 술을 얻으러 부녀를 방문한다.

아버지가 예의상 "어떻게 돼 가나?"라고 묻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파멸을 향해 가네. 모든 것은 파멸하고 타락하게 마련이니까. 무슨 큰 재앙이 벌어져서가 아니라 인간의 순수한 본성에서 비롯된 걸세. 인간이 자초한 심판이야. ...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 그들이 가진 게 모두 비열하고 교만한 싸움 끝에 얻은 것이니 다 나빠지는 거야. 그들이 무엇을 만지든 만지는 것마다 모두 나빠지거든.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그런 식으로 해왔지. 몇 세기 동안 이렇게 해왔지. 끊임없는 반복.

그러니 탁월하고 위대하며 고귀한 이들이라면 어떤 싸움에도 가담해선 안 되는 거지. 승리자들이 매복공격으로 이 땅을 지배한 이후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네. 설사 뭔가를 숨긴다 해도 모든 것은 그들의 손아귀에 있거든. ...

하늘은 물론이고 우리의 꿈조차도 그들의 손아귀에 있어. 순간도, 자연도, 무한한 침묵도 그들의 것이야. 영원한 생명조차도. 알겠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네. 그러니 위대한 자, 탁월한 자들은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네."


이 남자의 말은 일견 그럴듯하기도 하고, 니체의 자라투스트라식 말투를 연상시킨다. 혹은 20세기말에 유행한 각종 휴거론, 종말론 등을 설파한 사이비 종교가 연상되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개똥철학을 설파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 사람을 함부로 도발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말한다. "그만 가보게. 다 헛소리로군." 남자는 집을 나와서 몇 걸음도 가기 전에 얻은 술병을 꺼내 연거푸 마신다. 그는 결국 탁월한 자가 아닌 술주정뱅이였을 뿐이다.

7.둘째날 손님.png
7-1.창밖에서 술마시는 남자.png
남자는 세상의 타락에 관해 열변을 토하지만, 집을 나오자마자 세상 따위는 다 잊고 병나발을 분다.


이제 종국으로 치달아간다. 영화의 첫 장면과 동일하게 어두운 화면 밖에서 내레이션이 깔린다.


"두 부녀가 잠자리에 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눕는 소리와 담요를 끌어당기는 소리도 들린다. 그들의 숨소리도 들린다. 오직 숨소리뿐이다. 밖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폭풍이 멈췄다. 죽음 같은 정적이 집안에 내려앉는다."


폭풍이 왜 몰려왔는지, 왜 멈췄는지 알 수 없다. 단지 멈출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두 번째 리뷰에서는 '지루함'을 주제로, 생로병사의 문제를 다룬다. 첫 번째 리뷰가 '절망편'이라면 두 번째 리뷰는 '희망편'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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