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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2 | 가장 거대한 사기극은 자신을 속이는 것

[레너드는 진실 대신 끝없는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by 아닛짜

<메멘토>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복수라는 기이한 플롯을 가지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다.


첫 번째 리뷰에서는 영화의 복잡한 편집구조를 해부하고, 기억과 사실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기억 외주화의 시대가 가져올 결말에 관해 아포칼립스적 상상을 해보았다.

두 번째 리뷰는 기억이라는 것이 어떻게 자신을 속이는 거대한 사기극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 첫 번째 리뷰를 먼저 읽고 오실 것을 추천합니다. 연결된 내용입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레너드의 문신은 자기 정체성의 설계도이다.
1-1> 기억은 존재의 핵심이다.
1-2> 레너드의 문신 구조는 '성격의 감옥'과 같다.
2. 새미는 레너드의 삭제된 정체성이다.
2-1> 레너드는 왜 새미 젠킨스라는 인물을 창조했을까?
2-2> 새미가 레너드라는 증거들
3. 레너드는 진실 대신 끝없는 복수를 선택했다.




1. 레너드의 문신은 자기 정체성의 설계도이다.


1-1> 기억은 존재의 핵심이다.


현실에서 기억상실증 환자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기억상실증은 많은 영화와 소설의 단골 테마이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은 혼란스러워하며 어떻게든 과거 기억의 퍼즐을 맞추려고 발버둥 친다.

기억이라는 것이 우리 존재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정신 현상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우리 존재의 핵심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겪는 많은 고통의 근원이기도 하다.

살다 보면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을 갖게 된다.

<메멘토>의 레너드도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려 애쓰지만, 동시에 아내와 관련된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고 싶어 한다.

그는 아내가 남긴 소품들(빗, 테디베어, 책 등)을 태우며 아내를 잊으려고 시도한다.

그러면서, "전에도 이렇게 아내를 잊으려 물건을 태웠겠지?"라고 중얼거린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사랑에 관한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기억을 제거하는 서비스를 받는다.


두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기억 제거를 여러 번 반복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뇌의 기억을 지워도 더 깊은 무의식에서는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각인되어 계속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기억을 좋아하든 싫어하든지 관계없이 인간은 기억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왜 인간은 이렇게 기억에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지금 일어나는 경험만으로 매우 행복해 보이는데 말이다.


인간 진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뇌의 발달 과정을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모든 동물은 '동물(動物)'이라는 이름 그대로 '움직이는 물건'이다. 먹이를 구하고, 위험한 적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식물(植物)'과 다르게 동물은 '행위(行爲)'가 생존을 결정한다.

한순간의 잘못된 행동은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전략적 행위는 아주 중요하다.


행위의 전략은 동물마다 다르게 진화됐는데, 인간은 날카로운 발톱이나 강인한 근육 대신 뇌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한다.

초창기의 뇌는 단순 행위를 제어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으나, 점차 외부의 자극을 감각하고 인식하여 그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행위를 정교화시킨다.


'인식'과 '행동' 사이에는 점차 더욱 정교한 기능들이 부가된다.

외부 자극을 지각할 때 생생한 '느낌'이 같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 느낌에 의존해 행위를 결정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독사를 봤을 때 동시에 혐오의 느낌이 일어난다면, 아무 느낌이 없을 때보다 도망가는 속도가 확실히 빨라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현재에 더욱 정교하게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뇌는 이렇게 진화를 거듭하며 '감정'이라는 대단한 발명품을 내놓았다. 감정행동을 일으키는 트리거이다.


감정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과거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는 특성이 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접했을 때 자동적으로 과거의 비슷한 기억들이 시냅스에서 일어나며, '좋다, 싫다, 즐겁다, 슬프다, 사랑스럽다, 역겹다'와 같은 감정의 분별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현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제대로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며, 그에 따른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삶의 나침반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기억을 잃은 사람의 눈빛과 표정이 감정이 없는 백지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에서, 라일리의 의인화된 내면 감정인 '기쁨이(Joy)'는 라일리의 핵심기억 구슬을 잃어버리자 "핵심기억이 없으면 라일리는 더 이상 지금의 라일리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정체성은 기억으로부터 나온다.

물론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며, 수많은 일을 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충분히 연속된 시간과 공간을 이질감 없이 연결하는 '기억의 사슬'이 있으므로, 우리는 존재의 동일성과 안정감을 느낀다.


10분간의 연속된 기억만이 가능한 레너드는 이를테면 '10분의 수명을 가진 존재'이다.

그가 10분 동안 필사적으로 이전 기억을 복원하려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다.


레너드는 10분마다 리셋되는 기억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억시스템을 온몸에 구축하였다.

그는 확실하게 검증된 증거를 찾을 때마다 자신의 몸에 문신으로 새겨 넣는다.

문신 자체는 확고부동한 진실이며, 문신의 내용을 전제로 다른 모든 것들을 검증하고 현재의 행동 방침을 세운다.

레너드에게 문신은 기억 그 자체이며 '삶을 이끄는 헌법'이다.



1-2> 레너드의 문신 구조는 '성격의 감옥'과 같다.


레너드의 문신 구조는 그의 성격(에고) 구조를 대체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부터 자신을 세상에서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성격이라는 정신 구조물을 만들어간다.

태어나서 성장한다는 것, 즉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자신과 세상을 구분하는 '성격의 감옥'을 주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생 성격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감옥'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썼다.


# '성격의 감옥'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세요.


기억은 성격의 감옥을 구성하는 벽돌들을 붙여주는 아교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기억이 없으면 성격도 와해된다.

레너드에게 기억의 설계도인 문신 구조는 그의 정체성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레너드는 온몸에 문신을 새겼는데, 그 중요성에 따라 문신의 위치와 크기를 구조적으로 설계했다.

거울로 봤을 때 똑바로 보이도록 글자를 반대 방향으로 썼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보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래서 레너드는 기억이 리셋될 때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직관적으로 재설정할 수 있었다.

문신-01.png 레너드의 문신은 성격 구조를 지탱하는 설계도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쇄골 아래쪽에는 목걸이 모양으로 이렇게 새겨져 있다.


"John G. raped and murdered my wife." (존 지는 내 아내를 강간하고 살해했다.)


이 문장은 레너드의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대전제이다.

이것은 절대 버릴 수 없는 프로도의 반지처럼 삶의 '절대 목걸이' 같은 것이다.

레너드는 10분마다 아내가 살해되었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일깨우며 절대 목걸이의 위력을 확인한다.


성격의 감옥을 지탱하고 있는 근본 뿌리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기초로 모든 욕망이 일어나며 그에 따른 감정과 태도가 형성된다. 어떤 두려움과 욕망인가에 따라 성격 구조가 달라지는 것이다.


레너드는 아내가 살해된 충격으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그 후로 경험하는 어떤 것도 기억으로 축적하지 못한다.

그가 유일하게 잡고 있는 삶의 끈은 범인이 아내를 죽였을 때의 공포에 기반한 복수심이다.


가슴 중앙을 가로질러 관통하는 가장 큰 문신은 삶의 원대한 목표이다.


"Find him and kill him." (그를 찾아서 죽여라.)


쇄골 아래쪽의 문신이 사실을 기술하는 서술형 문장이라면, 가슴 문신은 그 사실에 기초하여 행동을 촉구하는 명령형 문장이다.


아내가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두려움과 복수해야겠다는 욕망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두려움은 욕망과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으며, 원숭이가 뺏길세라 소중하게 꼭 쥐고 있는 바나나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나나를 놓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점에서는 레너드와 다르지 않다.


양쪽 팔에는 복수 외길을 위한 세부적인 행동 방침이 새겨져 있다.


"She is gone. Time still passes." (그녀는 갔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시간은 계속 흐르기 때문에 한시도 낭비하지 않고 목표에만 전력을 다하라.


"Consider the source. Memory is treachery." (소스를 고려해라. 기억은 배반한다.)

매번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하라. 의심은 더욱 확고한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복부에는 피라미드 같은 구조물이 새겨져 있다.

img.png 복부에 새겨진 문신은 삶의 물질적, 관계적 기반이다.


머리가 삶의 중앙 본부라면, 복부는 삶의 에너지를 관장하는 본부이다.

모든 행동의 근원은 복부에서 나온다. 뱃심, 즉 배짱이 있어야 거침없는 행동이 가능하다.
복부에는 삶의 물질적 기반인 '집(House)'과 '차(Car)', 관계적 기반인 '친구(Friend)'와 '적(Foe)'이 위치한다.

레너드에게는 기억의 대체물인 '사진(photograph)'이 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토대로서 가장 하부에 놓인다.

기억의 연속성을 위해 레너드는 리셋될 때마다 집과 차, 친구와 적을 계속 확인하고 구분한다.

사진은 레너드에게 일종의 집 계약서이자 차 키이자 지인들의 신분증이 되는 것이다.




2. 새미는 레너드의 삭제된 정체성이다.


2-1> 레너드는 왜 새미 젠킨스라는 인물을 창조했을까?


레너드는 손등에 "Remember Sammy Jankins. (세미 젠킨스를 기억하라.)"라는 글귀를 문신하고, 손을 씻을 때마다 바라보고,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새미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다.


레너드가 들려주는 새미의 이야기는 이렇다.

새미는 레너드처럼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는데, 보험금을 받기 위해 보험회사로부터 테스트를 받게 된다. 레너드는 보험사기 검사관으로 이 사건을 맡게 된다.

테스트의 내용은 새미에게 탁자 위에 무작위로 놓인 여러 물체 중 하나를 집도록 하는 것인데, 일부 물체에는 전기가 통하도록 미리 설치해 놓았다.

img.png 새미는 진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인지, 심리적 증상인지를 테스트받는다.


이 테스트의 전제는 만약 물리적 뇌 손상(=단기 기억상실증)이라면 테스트를 여러 번 하게 되면, 기억을 못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전기가 통하는 물체를 피하게 될 것이라는 가정이다.

시간관념이 없는 동물도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위험은 육체적으로 기억하고, 본능적으로 회피한다.

동물에게는 인간처럼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관념이 없다. 그래서 동물의 기억은 이를테면 단기 기억상실에 걸린 것처럼 휘발된다.


만약 새미가 진짜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면, 동물들처럼 육체적으로 기억하여 전기가 통하는 물체를 여러 번 겪은 후에는 집지 않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새미의 기억상실은 심리적인 것이 된다.

늘 그렇듯 보험 약관에는 뇌 손상으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증만 된다고 아주 작은 글씨로 써놓았을 것이다.

세미는 계속 전기가 통하는 물체를 반복적으로 집어서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한다.

결과는 아주 비참했다. 보험금도 타지 못했고, 세미는 아내에게 인슐린 주사를 과다하게 놓아서 죽게 만든다.


레너드는 자신이 어리석은 새미와는 다르다고 강조했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23)에서 레너드와 새미가 동일 인물이었음이 밝혀진다.

레너드는 왜 자신의 이야기와 똑같은 새미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었을까?


레너드의 기억과 달리 그의 아내는 범인에게 공격받았을 때 바로 죽지 않았다. 레너드는 그 사건의 충격으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보험 검사관의 테스트를 받은 것은 바로 레너드 자신이다.

레너드의 아내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는데, 레너드가 진짜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는 검사관의 말을 믿고, 레너드를 테스트하기 위해 그에게 인슐린 주사를 맡긴다.

레너드는 주사를 좀 전에 놓은 사실을 기억 못 하고 계속 주사하여 결국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레너드는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자신의 정체성에서 새미라는 가상의 인물을 떼어내고, 아내를 공격한 범인인 존 지가 아내를 무참히 살해했다고 기억을 조작한다.

그리고 죄책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존 지를 향한 복수심에 삶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레너드의 복수를 도와준 테디는 타락한 형사였다. 레너드가 존 지를 찾아서 죽이고 나서도 수사기록까지 조작하며 계속 존 지를 찾으려 하자, 테디는 레너드를 자신의 하수인으로 이용하기로 작정한다.

J로 시작하는 이름과 G로 시작하는 성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널렸다. 테디는 자신이 추적하는 범죄자 중 J.G라는 이니셜을 가진 사람들을 레너드의 희생양으로 몰아준다.


두 사람의 어둠의 공조는 한동안 만족스럽게 진행되었다.

레너드에 의해 여러 J.G들이 처단되었고, 영화에서 죽은 마약상 지미 그랜츠도 J.G라고 이름 지어준 부모를 원망해야 했다.

테디는 레너드가 살아갈 이유를 제공했고, 레너드는 복수를 이뤘을 때마다 만족했다.

img.png 사진 속의 레너드는 복수 후에 기쁜 표정을 짓고 있다. 테디는 레너드에게 복수 대상을 계속 제공했고, 레너드에게 살아갈 이유를 줬다.



2-2> 새미가 레너드라는 증거들


레너드는 자신을 담당했던 보험조사관의 아이덴티티를 차용하여 자신이 새미 젠킨스의 사건을 조사한 보험조사관이었다고 주장한다.


레너드의 회상 장면에서 새미는 도형을 집는 테스트를 받을 때 코웃음을 치며 "나 이래 봬도 회계사(CPA)야"라고 말한다.

아마도 레너드의 원래 직업은 회계사였을 것이다. 기억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메모나 사진 등의 증거를 철저하게 수집하는 행동을 보면 꼼꼼한 회계사였을지도 모른다.


잠깐 스치듯이 지나가는 한 컷이라 눈치채기는 어렵지만, 놀란 감독은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남겼다.

레너드의 기억 속에서 새미는 아내를 죽이고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새미가 병원의 휴게실에서 의자에 앉아있는 장면 바로 다음에 새미의 자리에 레너드가 앉아있는 장면이 스치듯 지나간다.

새미가 정신병원의 휴게실에 앉아있는 장면
img.png 좀 전에 새미가 앉아있던 똑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레너드. 레너드가 새미라는 증거를 숨겨놓은 편집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영화를 보면서 레너드가 왜 지미를 죽일 때 지미의 옷으로 갈아입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옷을 입고 그 사람의 차를 타며 그 사람 행세를 한다는 것은 의심받기 쉬운 행동인데도 말이다.

레너드는 아내를 지키지 못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정작 죽이고 싶은 것은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미의 고급스러운 옷과 차를 보자 충동적으로 그의 옷을 벗겨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갈아입었는지도 모르겠다.

'존 지'들을 죽일 때마다 그들의 옷으로 갈아입고 자기 자신이 존 지가 되어 단죄하는 의식을 치렀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내를 죽인 범인은 자신이니까.




3. 레너드는 진실 대신 끝없는 복수를 선택했다.


불교에는 '수념(隨念, anussati)'라는 집중명상 기법이 있다.

수념은 '명상 대상을 계속해서(anu-) 생각하기(sati)'이다.

다른 기억을 배제하고 우선적으로 자신의 명상 주제를 계속해서 마음에 떠올리는 것이다.


'기억'은 산스끄리뜨어로 '스므리띠(smṛti)'이며, 불교 경전어인 빠알리어로는 '사띠(sati)'이다.

사띠는 불교 수행에서 아주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사띠는 주로 '마음챙김' 또는 '알아차림'이라고 번역되지만, 사띠의 원뜻이 기억이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명상할 때 사띠의 역할은 이리저리 방황하는 마음을 명상 대상에게 향하도록 챙기는 것이다.

막상 명상을 하면 마음은 원숭이처럼 뛰어다니며 사띠가 전혀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띠가 잘 기능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이순간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억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여 자신의 기억을 단속해야 한다.


레너드가 수시로 몸의 문신을 보는 것은 날마다 '문신 수념'을 수행하는 것과 유사하다. 레너드의 문신은 그가 기억해야 할 일종의 명상 주제를 제시한다.


마음은 대상을 필요로 하며 대상을 향해 기우는 성질이 있다.

마음의 유일한 특징은 대상을 갖는다는 것이다.

레너드는 자신의 마음의 대상을 복수로 정했고, 그의 마음은 매일 복수를 향해 기울었다.

그리고 복수심은 레너드에게 매우 강렬한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집중 명상과 세뇌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바른 견해에 기반하지 않은 명상은 세뇌와 차이가 없다.


레너드는 오랜 기간 복수심으로 세뇌된 상태라서, 테디가 자신에게 한 짓과 자신이 저지를 살인 행각의 전모를 알게 되었으나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며 멈추려 해도 멈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레너드의 마지막 대사(장면 #23에서)는 진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자신의 거짓된 기억시스템을 유지할 것이며, 또 다른 존 지를 찾아서 복수할 것임을 암시한다.


"내 마음 밖의 세상을 믿어야 한다.
기억은 못 할지라도 내 행동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눈을 감고 있어도 세상은 존재한다는 걸 믿어야 한다.
믿을 수 있을까? 존재하겠지? …
(잠시 눈을 감고 운전하다가 눈을 뜨며) 존재하는군.

현재의 나를 알려면 기억이 필요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여긴 어디더라? (Now where was I?)"


레너드가 채택하기로 결심한 사실(=내 마음 밖의 세상)은 테디가 다음 존 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테디의 본명도 공교롭게 존 겜멀이다. 레너드는 테디의 사진 뒷장에 메모("He is the one. Kill him.")를 하고, 테디의 차 번호("THE FACT6: License Number SC1371U")를 몸에 문신한다.

다음 순간 기억이 리셋되면 레너드는 자신의 메모와 문신을 보고 의심 없이 테디를 처단할 것이다.

레너드는 진실 대신 복수를 선택했다.


레너드는 영화의 시작 전에 이미 진범을 찾아 복수했고 그 후에도 여러 명의 존 지를 찾아 죽였으며, 영화 속에서 지미와 테디를 죽였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또 다른 존 지를 찾아내어 복수할 것이다.

관객은 이 끝없는 반복 과정 중 지미와 테디의 사례만을 보았을 뿐이다.

맹목적인 복수만이 레너드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고, 그가 스스로 이 시스템을 멈출 가능성은 없다.


명상 수행은 집중된 마음의 힘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고자 함이다.

그러나 맹목적인 집중은 오히려 진실을 적극적으로 가리는 역할을 한다.

두려움과 욕망은 맹목적인 삶의 주범이다.

두려움과 욕망으로 지어진 성격의 감옥은 레너드가 복수 사이클에 갇혀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근본 뿌리가 되는 두려움을 직시하지 못한 채 그 위에 우거진 수풀 속에서 헤맨다.

수풀은 아무리 쳐내도 뿌리가 살아있는 한 계속 자랄 것이다.

레너드가 존 지를 죽여도, 또 다른 존 지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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