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은 이기심의 아름다운 포장지이다.]
<어쩔수가없다>의 리뷰들을 보면 유독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다.
대체로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영화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치고는 실망스럽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불호의 주된 이유는 만수(이병헌)의 살인 동기와 개연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만수는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따뜻한 심성을 지녔지만 다소 지질하고 어리석은 면도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보통 사람'인 만수가 아무리 해고를 당해 궁박한 처지로 몰렸다고 해도 어떻게 살인까지 감행할 만큼 돌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살인이 진행되는 과정도 어설프고, 심지어 형사들의 수사도 허술하게 마무리된다는 것도 불호의 주재료이다.
영화 취향은 식성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개인적이므로 '재미있다, 없다'라는 느낌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일류 셰프의 요리도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블랙 코미디를 보며 리얼리티를 엄격하게 지적하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어쩔수가없다>의 어떤 요소가 관객들의 불편한 심리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박찬욱 감독의 이전 영화들이 불편하게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번 리뷰는 만수의 진정한 살인 동기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심리를 다루어보려고 한다.
# 첫 번째 리뷰를 먼저 읽고 오시기를 추천합니다. 연결된 내용입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보통 사람'이라는 관념 아래 숨어 있는 안도감
1> '보통 사람'은 실재하는가?
2> 살인 개연성의 문제
2. '무항산, 무항심'의 박찬욱식 해설
3.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상실
1> '보통 사람'은 실재하는가?
박찬욱 감독은 개연성 질문에 대해 "리얼리티의 개념을 너무 좁게 볼 필요가 없다."라고 대답한다.
'리얼리티'란 현실, 실제를 뜻하며, 흔히 허구, 환상, 가상, 때로는 낭만에 대응되어 사용된다.
'현실'은 객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주체가 어떤 현실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리얼리티는 달라진다.
다수가 인정하는 리얼리티는 그들이 속해있다고 믿는 평균적인 보통 사람들의 세상에서 적용되는 상식을 의미한다.
너무 특수한 상황이나 비범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영화 같다. 소설 같다'라고 반응한다.
그러나 나는 현실이 늘 영화나 소설을 앞선다고 생각한다. 리얼리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범위가 넓다.
'보통'이나 '평균'이라는 말은 리얼리티를 좁히는 마법의 개념이다.
받아들이기 껄끄러운 것들은 무엇이든 '평균'의 범위 밖으로 밀어놓으면 되기 때문이다.
평균은 암암리에 선악의 범위까지 결정한다. 평균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은 선이고, 밖에 있는 것은 악이다.
"남들도 다 그래."라든지 "세상은 원래 그래."라는 말에는 평균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있다는 뜻이 숨어있다. 평균 속에 숨는 심리는 도덕적 불감증을 촉발시킨다.
그래서 선악 구도가 확실한 이야기는 언제나 인기 있다.
내가 확실히 선의 편에서 도덕적 우월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자신이 속해있다고 생각하는 평균의 범위 안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에게 쉽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한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보통 사람인 만수에게 감정이입했는데, 만수의 급발진에 공감이 확 깨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믿는 '평균'과 '보통'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부모는 자식이 최소한 평균 이하로 뒤처지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현대에는 뛰어난 것보다 평균의 범위 안에 드는 것이 더 힘들긴 하다.
예전에 어떤 대통령이 스스로 '보통 사람'이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다. 보통 사람은 권력자들이 쓰기 좋아하는 포장지이다.
두 경우에서 말하는 평균은 어떤 수치적 범위에 속하는 물질적 조건이다. 일정 수준의 대학, 직장, 자산, 가족, 취미 등으로 구성된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평균적인 조건의 포장지를 들춰보면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심연의 혼돈이 흐르고 있다.
'보통 사람'은 관념적, 수학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도 진짜 보통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평균이 전복되고 선악이 모호한 영화를 볼 때 관객은 감정이입이 깨지며 거부감을 느낀다.
영화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어둠과 혼돈을 건드리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어쩔수가없다>는 '보통 사람'이라는 관념 아래 숨어 있는 안도감을 건드리기 때문에 다 보고 나도 찝찝함이 남는다.
2> 살인 개연성의 문제
관객들은 영화에서 사이코패스라든지 사악한 사람이 살인하면 쉽게 받아들인다.
만약 만수가 부하 직원에게 갑질을 했다거나, 뭔가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는 장면이 부각되었다면 좀 더 쉽게 개연성이 확보되었을 것이다.
007이 아니라 사이코패스나 사악한 성품이 '살인 면허'처럼 작동한다.
우리는 끔찍한 범죄를 보면 그 원인에 관해 설명을 듣고 싶어 한다. 보통 사람은 그럴 리 없으므로.
그래서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이나 학대를 찾아내고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납득한다.
나는 살인의 동기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인과의 오류라고 생각한다. 영향을 미쳤겠지만 주원인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간을 쉽게 해석하려는 게으름의 발로이다.
나는 만수의 진정한 살인 동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인이라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과연 납득할 수 있는 살인 개연성이 있을까?
심지어 현실에는 묻지마 살인처럼 만수의 경우보다 훨씬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판국이다.
영화에서는 만수의 살인 동기를 완전히 이해시켜 줄 만한 결정적 원인을 제시하지 않는다.
집에 대한 과도한 애착이나 가부장적 책임감, 재취업의 좌절감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것들이 살인 동기가 되기에는 약하다.
대신에 박찬욱 감독은 만수가 살인 행각으로 가는 과정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작은 악의 씨앗이 수많은 망설임과 우연으로 중첩하면서 만개하는 과정.
만수가 선출의 잘 나가는 SNS를 보며 부러워하자, 미리(손예진)는 옆에서 "우리 남편에 비하면 영... 이 인간 벼락같은 거 안 맞나."라고 말한다.
순간 만수의 눈이 번쩍한다. 미리의 말은 만수의 마음에 작은 씨앗을 심는다.
많은 망설임과 시간이 걸렸던 첫 번째 살인은 만수가 아닌 아라에 의해 실행되지만, 만수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두 번째 살인은 만수가 직접 총을 쏘기는 했지만, 감정적 동요가 심했고 치밀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세 번째 살인에서 만수는 진정한 살인자가 된다.
만수는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차갑게 실행한다. 범죄는 점점 프로페셔널해지고 잔혹해진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서 평범함이란 겉을 싸고 있는 포장지가 평범한 것이다.
포장지 안에는 무수한 선과 악의 씨앗이 발아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환경에 따라 포장지는 종종 찢어지기도 한다. 특히 생존에 위협을 받을 때.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해고가 죽을 일인가? 어쩔 수가 없는 일인가? (물론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영화에서 여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 "다른 일 하면 되잖아. 실직이 문제가 아니라 실직을 대하는 자세가 문제야. 어쩔 수 있어."
남자들은 말한다. - "난 이거밖에 못 해. 어쩔 수가 없어."
<어쩔수가없다>의 남자들은 모두 충실한 사람들이다. 단지 가부장제의 틀 속에서 충실히 기능하다 보니, 자신들이 만드는 종이처럼 시대에 뒤처졌을 뿐이다.
남편들은 자신이 익숙한 벙커에서 나오는 대신 핑계와 합리화의 말을 되풀이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가족을 위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만수에게 집이 아무리 많은 사연을 담은 특별한 것이라 해도 그냥 집일 뿐이다. 아내의 말대로 집 팔고 좀 작은 아파트로 옮기면 된다. 자폐가 있는 시원이가 첼로를 못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직업적 능력이 있는 미리는 전업주부로 살 이유가 없다.
만수의 행보는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의 월터 화이트를 매우 닮았다.
소심하고 온화한 월터는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면서 인생이 완전히 변한다. 그는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해 마약 산업에 뛰어들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화이트' 월터는 점점 '블랙' 월터가 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가족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월터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에 비해 잘 풀리지 못한 인생에 대한 회한과 분노를 표출하고 있을 뿐이다.
만수도 마찬가지다. '화이트' 만수의 내면 깊은 곳에는 억눌린 '블랙' 만수가 잠재해 있었다.
<웰컴 투 동막골>의 많은 명대사 중 최고는 동막골에 낙오된 북한 인민군이 촌장에게 영도력의 비결을 묻는 장면이다. 진지한 질문에 촌장은 무심하게 대답한다.
"영도력의 비결? 글쎄... 머를 마이 멕여야지, 머."
2400년 전 맹자는 이 소박한 논리를 더욱 정연하게 풀어준다.
맹자는 전국시대에 여러 국가를 유세하며 다니다가, 어떻게 하면 인정(仁政)을 베풀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는 양혜왕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하였다.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무항산이유항심자, 유사위능)。
항산(안정된 생업)이 없으면서도 항심(안정되고 일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소수의 선비(士)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약민즉무항산, 인무항심)。
백성은 항산이 없으면 그로 인하여 항심도 없어지고 맙니다.
苟無恒心, 放僻邪侈, 無不爲已 (구무항심, 방벽사치, 무불위이)。
항심이 없어지면 방탕, 간사, 사악, 사치 등 못 할 짓이 없게 됩니다.
『孟子』梁惠王上-7
'항산(恒産)'은 안정된 생업이며 삶의 물질적인 외부 조건이다.
'항심(恒心)'은 안정되고 일정한 마음이며 삶의 정신적인 내부 조건이다.
항산과 항심이 결합하는 경우의 수는 다음의 네 가지이다.
①과 ②는 외부 상황에 따라 조건 지어진 평균적인 백성(民)의 마음이다.
'민심(民心)'은 조건에 따라 희로애락을 겪는 중생의 마음이다. 안정된 생업이 있으면 마음도 따라서 안정되고(유항산→유항심), 생계가 불안정하면 마음도 따라서 불안정해진다(무항산→무항심).
이것은 물질적인 외부 조건에 의해 정신적인 내부 조건이 규정되는 '소유의 삶'이다.
소유의 삶에서는 <기생충>의 기숙의 말대로 부자들은 오히려 착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맹자는 양혜왕에게 먼저 백성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나서, 그들을 격려하여 더 높은 가치의 선(善)으로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맹자에 의하면 동막골의 이장은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어쩔수가없다>는 '무항산, 무항심'에 관한 박찬욱식 우화이다.
③의 마음은 안정된 생업이 있음에도 불안정한 마음이다.
이런 상황은 인간의 심리적인 특성과 관련된다. 너무 많은 것은 없는 것과도 같이 느껴진다. 돈이 어느 정도 많으면 행복도가 올라가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돈에 대한 감각이 사라져서 행복과는 상관없게 된다.
방탕하거나 자살하는 재벌 3세와 같이 오히려 인생의 방향성을 잃게 될 수도 있다.
혹은 ②에서 갑자기 유항산이 된 경우, 소위 '졸부(猝富)'가 되어 지난날의 억눌린 분노를 표출하게 될 수도 있다.
극도의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는 사람이 드물 뿐, ③의 경우도 소유의 삶을 사는 평균적인 중생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④의 마음은 앞의 세 가지 마음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①~③의 마음은 외부 조건에 좌우되는 보통 사람의 마음이지만, ④는 외부 조건과 관계없는 마음이다.
'유항산→유항심'일 뿐 아니라, '무항산→유항심'이다. 외부 조건과 관계없이 내부 조건이 유지되는 마음은 '존재의 삶'을 통해 가능하다.
유항산일 때는 ①과 ④는 겉으로는 차이가 나지 않지만, ①은 조건이 바뀌면 바로 ②나 ③의 마음으로 변질되어 '방탕, 간사, 사악, 사치' 등 못 할 짓이 없게 된다. 그러나 ④는 언제나 변함없다.
맹자는 ④의 마음은 '선비(士)'만이 가능하니, 일반 백성에게 이런 마음을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 마음은 '수행자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자는 항산에 조건지어진 평균적인 마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는 항심을 유지할 수 있는 높은 경지를 지향한다.
'항산'은 우리의 삶에서 물질적 토대를 의미한다.
어떤 수준의 항산이 우리가 '항심'을 잃어버리는 지점인가?
어쩔 수 없이 살인도 불사하게 되는 절박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절박함의 커트라인은 다르다. 모두 자신의 기대치만큼의 불안을 부여잡고 산다.
만수는 자신이 몸 바친 직업에 대한 자부심, 가부장의 떳떳함, 중산층의 생활 수준이 커트라인이다.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순간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흘러내리듯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만수는 절박해진다.
실제로 무항산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만수는 이미 심리적으로 무항산이 되었다.
위쪽 그림에서 만수는 스스로 ②번(무항산→무항심)이라 믿었지만, 냉정히 말하면 ③번(유항산→무항심) 상황이다.
가진 것이 아직 많은 데도 본인만 절망에 빠져서, '못 할 짓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만수의 변화는 가족들도 미묘하게 변화시킨다.
아들 시원은 아버지가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 구체적으로 몰랐지만, 아버지의 불안과 절박함이 시원에게도 스며든다.
시원은 친구를 꼬드겨 핸드폰 대리점을 털었고, 그 일로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친다.
이때 만수가 자신의 범죄가 들킨 줄 알고 체념하다가 경찰이 아들을 잡으러 온 것을 알고 말을 바꾸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만수는 손바닥에 해야 할 말을 미리 적어놓을 정도로 자신감이 없고 자신을 늘 억제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살인에 하나하나 성공해 가면서 오히려 자존감을 회복한다.
<어쩔수가없다>의 최고의 명장면인 고추잠자리 씬에서 관객은 만수의 변화를 체험한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벌어지는 만수-범모-아라의 난장판 싸움씬은 만수의 브레이크가 완전히 풀려서 질주를 시작하게 됨을 알린다.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엄청난 사운드는 <겨울왕국>의 'Let It Go'만큼이나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이때부터 만수는 인간 본성에 내재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만수는 9년 동안 피해왔던 음주를 하고, 아내를 의심하고, 앓던 이를 뽑아내고 독주를 마시며 해방감을 표출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거울삼아 인격을 형성하는 법이다.
만수는 부끄러움도 없이 아들에게 위증교사를 하고, 피해 대리점주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이렇게 범죄가 대를 이어 이어진다.
만수의 아버지가 예전에 몰래 반입한 총은 만수의 범죄 도구로 이용되고, 만수는 아들의 범죄를 용인한다.
미리는 만수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침묵하여 공범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변질된 가족의 해체는 불 보듯 뻔하다.
가족을 위해 한 일들이 가족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항심'을 잃어버린 채 하는 모든 일은 항상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해도.
만수는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을 때 너무 발버둥치지 말고 멈춰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가장의 역할을 아내에게 맡기면 그렇게 자존감이 떨어져야 하는가? 만수가 미리를 의심하는 장면은 만수의 모든 지질함 중 가장 지질했다.
실직했다고 범모처럼 알코올에 빠져서 무력해질 필요는 없다. 범모가 아라의 긍정성을 조금이라도 배웠더라면 자기 파괴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개인이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문제에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래도 유연성과 긍정성을 가지고 항심을 잃지 않기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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