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의 나무는 슬픔이의 물을 머금고 성장한다.]
<메멘토>에 이어서 내친김에 기억과 관련된 영화를 하나 더 선정했다.
이번 영화는 많은 사람이 단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인생 영화로 꼽는 픽사 스튜디오의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2015)이다.
장난감들의 대서사시와 같은 <토이 스토리> 시리즈 이후 픽사의 양대 산맥은 아직까지는 <인사이드 아웃>과 <소울>임은 확실한 것 같다.
<인사이드 아웃>의 머릿속 세상이나 <소울>의 사후 세상은 소재적으로는 다소 진부하지만, 두 영화는 그 표현력만으로도 10점 만점을 주고 싶은 작품들이다.
<인사이드 아웃>은 심리학 교과서로 쓰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심리 현상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이 리뷰에서는 <인사이드 아웃>이 구현한 기억의 구조물과 다섯 감정의 상호작용, 그리고 '감정기계'로서의 존재를 치유하는 길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기쁨이와 친구들의 탄생 설화
2. 기쁨이의 나무는 슬픔이의 물을 먹고 성장한다.
3. 인간은 '감정기계'이다.
4.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법
[기쁨이의 화려한 등장 : "주인공은 나야 나!"]
<인사이드 아웃>은 11살 소녀 라일리의 내면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실질적인 주인공은 라일리의 내면 감정을 의인화한 다섯 감정이다. 이들 중 라일리가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깨어난 것은 '기쁨이(Joy)'였다.
기쁨이는 라일리의 의식에서 '불빛(spotlight)'을 받으며 등장한다.
부모는 라일리를 보며 “세상에!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로구나(Look at you. Aren’t you a bundle of little joy?)"라고 탄성을 지른다.
라일리가 태어나서 인상 깊게 경험하는 것들은 내면의 구슬 형태로 저장된다. 부모와 처음 대면하는 순간 기쁨이의 황금색 기억 구슬이 생성된다.
라일리의 정체성이 된 기쁨이는 긍정주의자이자 낙천가이며, 세상의 모든 재미있고 즐거운 경험을 추구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쁨이는 라일리와 단둘이서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곧 라일리 안에 잠자고 있던 다른 부속 유형들이 차례로 활성화된다.
우울하고 부정적인 '슬픔이(Sadness)'는 여러모로 기쁨이와 상반되는 캐릭터이다. 기쁨이가 보기에 무슨 일을 하는지 당최 이해가 안 되는 감정이다.
그리고 라일리를 온갖 위험으로부터 잘 지켜주는 '소심이(Fear)', 부정적 태도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는 '까칠이(Disgust)', 부당한 일들에 대단히 민감한 '버럭이(Anger)'가 등장한다.
이 세 명은 라일리의 내면세계에서 비중이 작은 조연급 감정이다. 주된 이야기는 기쁨이와 슬픔이가 이끌어간다.
적지 않은 관객들에게 기쁨이는 너무 나대며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해서 미운털 박힌 캐릭터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어떤 하나의 주된 성격이 강력한 독재를 하고 있다. 물론 슬픔이가 폭정을 하는 내면세계도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격 유형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양육환경에 따라 강화되거나 약화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유형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라일리의 성격은 부모의 태도로 인해 기쁨이가 과도하게 강화된 경향을 보인다.
특히 부모의 습관적인 칭찬과 격려는 기쁨이에게 반드시 긍정적 효과만 주는 것이 아니다.
"네가 잘 견뎌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네가 분위기를 밝게 해 준다."
"행복한 아이로 있어 줘서 고마워."
"(아빠 상황이 힘드니까) 아빠한테 웃어주자."
부모는 라일리에게 전형적 미국 스타일의 긍정, 행복, 기쁨을 주입한다. 이들은 본의 아니게 기쁨이에게 기쁨만 가득해야 한다는 신념을 불어넣는다.
기쁨이의 과욕은 라일리의 핵심 감정을 모두 황금색으로 만들게 된다.
그러나 기쁨이의 긍정에는 불안과 갈등, 부정적 상황을 견디지 못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강박적인 면이 있다.
라일리는 부모가 다투려는 낌새가 보이면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본능적으로 노력한다.
이삿날 이삿짐 트럭이 안 와서 부모가 기분이 상했을 때 라일리는 자신도 기분이 언짢으면서 필사적인 반응을 보인다.
엄마는 그날 밤 라일리에게 상황이 많이 안 좋았음에도 '행복한 아이(happy girl)'로 밝게 있어 줘서 고맙다고 치하한다.
아이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하려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노력하는 법이다. 라일리는 엄마의 말대로 해피걸로만 존재하려고 애쓰다 보니, 부모가 반기지 않는 슬픔이와 같은 특성은 발현하지 못하게 된다.
기쁨이는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외치며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한 명의 히로인이 독점하는 라일리의 내면세계는 점점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오행의 부조화 : 황금색 구슬의 과대 생산이 불러온 난장판]
기쁨이와 슬픔이를 제외한 나머지 감정들은 분량이 많지 않아 캐릭터가 선명하게 구축되지 않았지만, <인사이드 아웃>의 다섯 감정은 마음의 기본적인 특성을 잘 잡아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다섯이니까 자동적으로 오행(五行)이 연상되어 감정들을 하나씩 대입해 보았다. 신기하게도 각 캐릭터는 오행 에너지(목화토금수)에 찰떡같이 들어맞았다.
오행 철학은 우주 만물의 근본 특성을 직관적으로 관찰하여 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므로, 우리 내면 에너지에도 대입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기쁨이는 약동하는 성장 에너지를 상징하는 목(木) 기운이 어울린다.
목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상징이다. 인생의 과정으로 본다면 어린이, 청소년기에 해당하여, 목기(木氣)가 강한 사람들은 해맑고 순수하다.
목은 유일하게 중력을 거스르며 직진하는 생명체라서 고집도 만만치 않게 세다. 목은 주로 삶의 에너지, 추동력, 긍정성을 담당한다.
기쁨이는 외양도 목을 닮았다. 호리호리하고 길쭉한 몸매는 쭉 뻗은 나무와 같고, 머리 색깔도 목을 상징하는 푸른색이다.
슬픔이는 무기력, 우울, 잠, 무의식, 지혜를 상징하는 수(水) 기운이 어울린다.
수는 모든 것이 땅속으로 숨는 겨울의 상징이다. 인생의 노년기와 죽음에 해당하여 수기가 강한 사람들은 차분하고 성숙하다.
이들은 인생의 모든 경험을 거쳐온 지식과 지혜가 있다. 슬픔이는 내면세계의 온갖 매뉴얼을 섭렵하고, 위기 상황에서 길 안내자 역할을 한다.
물은 낮은 곳으로 가서 고여있는 속성이 있어서, 뭔가 새로움을 시도하려는 진취성은 떨어진다. 진취적인 기쁨이는 무기력한 슬픔이가 답답하기만 하다.
슬픔이의 외모도 물방울을 닮아서 동글동글하고 부드럽다.
빨간 벽돌 모양의 버럭이는 저항, 맞섬, 공격의 속성을 지닌 화(火) 기운이 어울린다.
화기(火氣)는 모든 생명이 팽창하고 발산하는 계절인 여름이며 청년기이다.
화기가 강한 사람들은 무엇이든 감추지 못하며 그 순간 확 타오른다. 기쁨이가 중앙 본부로 들어가기 위해 버럭이의 '버럭'하는 속성을 이용하여 유리창을 깨는 장면은 화 에너지를 잘 보여준다.
생각이 많고, 모든 것을 걱정하고, 준비하는 소심이는 토(土) 기운이 어울린다.
땅에는 보물이든 쓰레기든 온갖 것들이 묻혀있다. 토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조절하는 에너지이다. 토기가 강한 사람들은 현실적인 성격이며, 총무나 회계 역할에 능하다.
차도녀 스타일의 까칠이는 금(金) 기운이 어울린다. 계절적으로는 가을이며, 인생의 중장년기이다. 열매를 맺는 시기인 만큼, 쭉정이와 실한 열매를 냉정하게 골라낼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가을 서리(추상)처럼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결단하고 잘라내는 역할을 한다.
오행은 우주 만물의 활동을 다섯(五) 걸음(行)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생(相生), 상극(相剋)하는 관계를 통해 우주의 조화가 유지된다.
라일리의 내면은 기쁨이의 목 기운이 과도하여 조화가 깨진 상태이다.
기쁨이는 긍정적인 핵심 감정만 있으면 라일리가 잘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온통 황금색 구슬만 가득한 감정 본부는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작은 자극에도 휘청거리며 곧 난장판이 된다. 오행의 부조화가 초래한 결과다.
수가 부족한 목은 뿌리의 깊이가 없이 위로 확장되기만 한다. 안에 든 것 없이 밖으로만 떠벌이는 사람이다.
수생목(水生木)으로 기쁨이의 나무는 슬픔이의 물을 먹고 성장한다. 슬픔이의 지식과 지혜는 기쁨이에게 훌륭한 양식이 된다.
목이 성장하여 무성한 잎과 꽃을 피우는 것이 '목생화(木生火)' 작용이다. 목은 화를 보아야 신이 나고 보람을 느낀다. 토는 목이 뿌리를 내리고 활동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이 된다.
과도한 기쁨이의 목을 제어할 수 있는 기운은 금이다.
금이 목을 적절하게 가지치기하여 실속 있는 나무가 되도록 하는 것이 '금극목(金克木)' 작용이다. 날카로운 가위로 잘리는 아픔을 겪어야 어엿한 목으로 성장하니,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은 라일리의 '기억 구슬'이 저장되고 작동하는 방식을 공장 자동화 시스템처럼 묘사한다.
마치 라일리의 머릿속에 거대한 공장 단지가 들어서 있고, 그곳에서 작은 노동자들이 기억이라는 상품을 관리하고 있는 것 같다.
<인사이드 아웃>의 기억 구슬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핵심기억(core memory)'은 '감정 제어 본부(Emotions' Headquarters)'에서 직접 관리된다. 핵심기억은 라일리의 성격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그래서 기쁨이는 자신이 만든 황금색 핵심기억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들고 다닌다.
'장기기억(long term memory)'은 대뇌피질 모양으로 디자인한 큰 공장단지에서 관리된다. 핵심기억이 컴퓨터에 롬(ROM)이라면, 장기기억은 하드디스크(HDD)에 비유할 수 있다.
직원들이 장기간 사용되지 않은 기억을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기억들은 기억 쓰레기장으로 간다.
'잠재의식(무의식)'은 억압되고 거부된 기억들로, 지하의 깊고 음침한 곳에 숨겨져 있다.
라일리가 잠들면 '내부의 연극단(Dream Production)'이 무의식에 잠겨있는 기억들을 꿈으로 공연한다. 기쁨이는 부정적인 꿈을 긍정적인 것으로 조작하려다 또 난장판을 만든다.
핵심기억을 재료로 만들어진 '성격의 섬(islands of characters)', 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을 기차가 트랙을 도는 것으로 묘사한 '생각의 기차(train of thought)' 등은 놀라운 상상력으로 내면세계를 묘사한다.
모든 감정은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
<메멘토>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기억 상실증의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핵심기억이 파괴되면 감정의 혼란이 일어난다.
'핵심기억'은 '핵심 감정'이기도 하다. 삶의 궁극적인 모든 합류점은 감정과 느낌이다.
핵심 감정을 통해 우리는 일생 늘 같은 패턴의 경험과 관계를 반복하게 한다. 우리는 핵심 감정으로 인해 안정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핵심 감정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사이드 아웃>의 의인화된 다섯 감정이 진짜 주인공처럼 보이고, 라일리나 다른 사람들은 로봇이나 꼭두각시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진짜 주인인 내부 감정들에 의해 통제되는 '감정기계'와 같다.
"가슴 뛰는 대로 살아라", "느낌대로"와 같은 말은 멋지게 들리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감정기계에 복종하라는 말 같기도 하다.
애초에 다섯 감정은 라일리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능(function)으로 탄생했다. 각 감정이 이기적으로 자기의 영역을 넓히거나 독재하는 것은 월권이다.
우리는 이미 이성주의의 쇠퇴와 자본주의의 마케팅으로 인해 감정 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인사이드 아웃>의 교훈은 감정의 중요성이 아니라 감정들의 조화(오행의 조화)이다.
<인사이드 아웃>을 오해하면 수많은 금쪽이들이 양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사이드 아웃>은 기쁨이와 슬픔이가 감정 본부 안에서 실수로 밀려 나와서 라일리의 거대한 내면세계를 여행하는 로드 무비이기도 하다.
둘이 온갖 모험을 하며 다시 감정 본부로 돌아가는 과정은 라일리의 치유 과정이기도 하다.
기쁨이는 한동안 무익한 노력을 하다가 슬픔이에게 주도권을 넘기게 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시너지가 일어난다.
치유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것은 라일리가 어린 시절에 벽에 그리며 놀던 친구인 '빙봉'이었다.
라일리는 상상의 친구인 빙봉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노래의 힘(song force)'으로 추진되는 로켓 여행 놀이를 개발했다.
라일리가 자라면서 빙봉은 기억에서 사라져서 거대한 기억 단지의 한 구석에서 지내다가 길을 잃은 기쁨이와 슬픔이를 만나게 된다.
기쁨이와 슬픔이는 대뇌피질 모양을 한 기억 단지를 아무리 헤매어도 해답을 찾지 못했다.
상한 감정의 치유는 지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치유 과정에서 대뇌피질 안쪽의 무의식 영역인 변연계(limbic system)까지 접촉할 필요가 있다.
기쁨이는 단지 기억의 하치장쯤으로 여겼던 무의식 속에 떨어져서 그곳에 폐기된 수많은 기억 구슬들을 본다.
그곳에는 기쁨이가 몰랐던 슬픔이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구슬이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몰랐던 '다른 행성(another planet)'을 알게 된다.
변연계는 대뇌피질에게는 다른 행성이나 마찬가지다. 소통과 작동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우리가 공감하고 연민하는 것은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변연계의 공명으로 일어난다.
어린 시절 우리는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엄마와 눈 맞춤을 하면서 변연계의 공명을 경험했다.
우리는 합창할 때도 주변과 변연계의 공명을 느낀다. 음악 치유가 효과가 있는 이유이다.
변연계는 포유류와 영장류에게 발달한 사랑의 뇌이다.
기쁨이와 빙봉은 기억의 하치장에 떨어져서 라일리가 어린 시절에 빙봉과 했던 로켓 여행 놀이를 재현하여 의식으로 다시 올라온다. 이때 노래의 힘(송 포스)을 엔진으로 한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놀고 싶은 친구 누구?
로켓 타고 소리 질러!
누가 가장 최고일까?
함께 노래 부를 친구, 빙봉, 빙봉♪♬"
기쁨이와 빙봉은 사력을 다해 노래를 부르며 도약한다.
나는 이 장면을 <인사이드 아웃>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꼽고 싶다.
치유된 라일리는 여전히 기쁨이로서 살아가겠지만 이제 감정들의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웠고, <인사이드 아웃 2>에서는 더욱 섬세한 감정들도 키워나가게 된다.
쿠키로 나오는 개와 고양이의 감정 본부는 엔딩 크레디트까지 올라가야 영화가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영화 리뷰를 끝내며 한 번 더 되새긴다.
"나는 감정기계가 아니다."
"감정은 나의 주인이 아니다."
"감정은 기능이다."
"그러나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면 삶이 뿌리째 흔들릴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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