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버리지 못한 채 잡고 있는 배는 무엇인가?]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2012)는 야생 동물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스케치하며 나른하게 시작한다.
기린, 코끼리, 홍학, 원숭이, 얼룩말, 나무늘보부터 하이에나와 벵골 호랑이까지.
자장가처럼 부드러운 허밍이 깔리며 동물들의 한가로운 일상이 묘사되는 가운데 관객들은 인공적인 조형물과 여물통, 철창을 보며 이곳이 동물원임을 알게 된다.
캐나다에 사는 인도인 피신 몰리토 파텔(파이)은 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가 : "그럼 동물원에서 자라셨어요?"
파이 : "태어나고 자랐죠.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 폰디체리에서 아버지 소유의 동물원에 벵골 왕도마뱀을 살펴보러 와있던 파충류 학자가 내가 태어나는 것을 도와줬죠."
파이는 동물들과 함께 태어나고 성장했다. 동물들은 파이의 의식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분리된 격막 없이 자연스럽게 공존했다.
파이의 어린 시절은 동물원의 철창 속 동물들처럼 평화롭지만 한계가 뚜렷한 혼란의 시기였다.
앞으로 펼쳐지는 파이의 모험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며, 이는 영적 성장을 위한 수행 과정과 닮아있다.
이안 감독은 관객도 이 여정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도록 환상적인 마법을 부린다.
이 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이름을 찾는 신비로운 여정
1> 동물과 신의 중간에 낀 존재의 숙명
2> 진정한 이름을 찾는 모험
2. 영적 자유를 찾기 위한 수행의 조건
3. 믿음은 수행의 원동력
1> 동물과 신의 중간에 낀 존재의 숙명
<라이프 오브 파이>는 파이의 육체적, 심리적, 영적인 여정을 보여주는 성장 영화이다. 관객은 파이와 함께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우주의 모든 존재 가운데 인간만의 가장 큰 특성은 '동물과 신의 중간에 낀 이중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동물처럼 프로그램된 본능을 서슴없이 발현하지도 못하고, 신처럼 고귀한 마음을 전적으로 유지하지도 못한다.
본능과 영성 사이에서 혼란과 의심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자 특권이다.
파이의 어린 시절은 이러한 인간의 이중성이 혼란스럽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파이는 남다른 아이였다. 무엇보다 열렬하게 신을 사랑했다.
자그마치 3천3백만의 신을 포용하는 힌두교의 만신전에서 그는 다양한 신을 만나게 된다.
어떤 신은 슈퍼히어로처럼 숭배했고, 어떤 신은 소개팅으로 만난 연인처럼 매료되었다.
크리슈나 신을 섬기다가 성당에서 성호를 긋는 것은 파이에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파이는 한편으로는 동물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어느 날 파이는 리처드 파커라는 이상한 이름의 벵골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려고 철창 안에 손을 집어넣는 위험천만한 짓을 한다.
그에게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으니, 노발대발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파이 : "나는 그에게 인사하고 싶었어요..."
아버지 : "호랑이가 친구인 줄 알아? 짐승이지 친구가 아냐!!!"
파이 : "동물한테도 영혼이 있어요. 눈을 보면 알아요..."
아버지는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아들에게 눈물 쏙 빠지는 참교육을 시전한다.
가련한 염소를 호랑이 앞에 묶어놓고, 호랑이가 가차 없이 희생 제물을 물어가는 모습을 파이가 똑똑히 보게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파이의 순진하고 낭만적인 어린 시절은 종말을 고한다. 마치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밝음과 어둠의 두 세계에서 벗어난 것처럼.
동물들은 '자아'라는 선명한 자각이 없기 때문에 '자유'에 대한 자각도 없다.
동물원의 동물은 갇혀있다는 자각조차 없으며, 아쉬움도 없이 자신의 본성을 잃어간다.
오히려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안락한 보살핌을 받으며 오히려 야생 상태보다 수명이 길어지기도 한다.
인간은 철창 밖에서 동물을 관찰하면서 무의식적인 동질감을 느낀다.
'나도 혹시 갇혀서 관찰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을 안고 우리는 <트루먼 쑈>를 공감하며 본다.
트루먼이 한 도시처럼 꾸민 거대한 세트장에 갇혀 있는 것처럼, 인간은 지구에서 사실상 한 발짝도 못 나간다는 점에서 '지구 동물원'에 갇혀 있는 셈이다.
동물과 신의 넓은 스펙트럼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은 자유에 대해서도 이중 감정을 가진다.
자유를 빼앗기면 목숨 바쳐 자유를 추구하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한다.
인간의 타협점은 물리적 감옥보다 더 견고한 정신적 감옥을 만들고, 그 안에 갇혀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안전하지만 무의미하게.
2> 진정한 이름을 찾는 모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은 이름에 집착하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다. '이름 붙이기'는 인간의 또 다른 특징이다.
동물과 신의 광활한 영역에서 길을 잃기 쉬운 인간에게 이름은 자신의 영역을 한정하는 지시자와 같다.
이름은 자신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동물과 신은 자신의 영역이 본래 확실하여 정체성 혼란이 없다. 그들에게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반려동물들에게도 이름을 붙이지만, 동물에게는 이름이 주인이 자기를 부를 때 쓰는 표식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파이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파이의 원래 이름인 '피신(Piscine)'은 삼촌 마마지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파리의 한 수영장에서 유래했다. 이 수영장은 너무 깨끗하여 물을 그대로 마셔도 될 정도였으나, '피신'이라는 이름은 '피싱(Pissing)'으로 발음되어 놀림당하기 일쑤였다.
더 이상 놀림감이 되기 싫었던 피신은 새 학기가 시작되자 자신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가 아이들과 교사들에게 '파이(π)'라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각인시킨 방법은 획기적이었다.
종교에 입문하는 사람이나 출가한 수행자는 관례적으로 사제나 스승에게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새로운 이름은 이제부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는 상징이다.
나의 의지가 반영된 새로운 이름은 내 삶의 지향점을 온전히 담고 있기 때문에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받은 이름보다 중요하다.
파이에게 부모가 지어준 '피신'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파이'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단지 놀림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피신'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아름다워도 수영장이라는 틀에 갇힌 물이며, 용도가 정해진 죽은 물이다.
'파이(π)'는 반복되는 규칙이 없는 무한소수이다. 논리가 없기 때문에 예측할 수도 없다.
피신은 질서 정연하지만 명확한 한계가 있는 세계를 상징하고, 파이는 혼란스럽지만 한계가 없는 세계를 상징한다. 피신이 작은 밝음이라면, 파이는 큰 어둠이다.
모든 물은 바다로 나아가기를 열망한다.
수영장의 '한정된 물'이 바다라는 '무한한 도(道)'와 합류했을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는 파이의 분신과도 같은 또 하나의 중요한 존재가 등장한다. '리처드 파커'라는 벵골 호랑이이다.
리처드 파커의 원래 이름은 '목마름(Thirsty)'이었다. 새끼 때 물가에서 물을 먹다가 잡혀서 지어진 이름인데, 조련사의 이름과 서류상 혼동이 있어서 우여곡절 끝에 '리처드 파커'가 된다.
파이가 우연히 들어간 한 성당에서 만난 신부는 파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You must be thirsty."
신부의 말은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연결성을 암시한다. 중의적인 이 말은 "목마르겠구나."라는 상태 확인이기도 하고, "네가 바로 '목마름'이구나."라는 이름 확인이 될 수도 있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운명의 실에 묶인 것처럼 한배에 타게 된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들은 바다에서 조난되어 작은 보트에 탄다!
진정한 이름과 정체성에 목말랐던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험난한 수행이 이제 시작된다.
파이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 마마지에게 수영을 배웠다. 삼촌은 수영을 힘들어하는 파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널 해치는 건 물이 아냐. 공포심이지."
수행의 본질은 내면의 두려움을 길들이는 과정이다.
문명인에게 내면의 두려움은 깊이 잠재해 있는 것이어서 특별한 수행 환경이 필요하다.
지상에서의 일상적 삶에서는 마음이 너무 산만하게 흩어져 있어서 두려움을 길들일 힘이 없다.
파이에게 두려움을 마주하게 되는 계기는 비극적으로 찾아온다.
아버지는 급변한 정세와 아이들의 장래를 고심한 끝에 캐나다로 이민하기로 결정한다.
파이의 가족은 커다란 배에 동물들을 싣고 가던 중 태평양에서 거센 폭풍우를 만나고 배는 침몰한다.
혼자 살아남은 파이는 구명보트에 가까스로 올라타고, 얼룩말과 하이에나, 오랑우탄도 합류하게 된다. 보트 아래에는 무시무시한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숨어있었다.
현기증 나게 아찔한 이 상황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바다 조난은 출가(出家)를 상징한다. 출가자는 가족, 재산, 성취, 이름 등 속세에서 귀중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리처드 파커는 수행자가 직면한 내면의 두려움이다. 수행을 시작하는 자에게는 그동안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던 온갖 장애물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내면의 두려움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길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몸이 있는 한 모든 고통과 두려움이 뒤따르기 마련이므로. 마치 수레바퀴가 수레를 끄는 짐승을 따라가듯이.
파이가 어린 시절에 만났던 리처드 파커는 비록 철책에 갇혀 있었지만 공포심을 줄 만큼 충분히 강했다.
그러나 바다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이들은 각자의 핸디캡을 가지고 비등하게 마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제 파이는 호랑이 길들이기를 시도할 수 있었고, 이들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며 공존하는 시기를 맞는다.
파이는 그동안 삶의 필수요소라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체험한다. 그 과정에서 파이는 강제적으로 미니멀리스트가 된다.
그는 바다 한가운데서 엄마, 아빠, 형을 잃었다. 인도에는 자신의 모든 추억과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남겨두고 왔다. 아껴두었던 비상식량도, 일기를 쓰던 메모장도 거센 폭풍 속에 사라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파이는 그동안 집착했던 모든 것들을 놓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연이 주는 식량이 있었다. 적절한 때에 물고기 비가 내리고, 낚시도 할 수 있었다.
파이는 항해법을 전혀 몰랐지만, 새로운 삶의 요령을 하나하나 터득하며 자신감을 갖게 된다.
파이는 자신의 상황을 다이어리에 이렇게 요약한다.
'한 뼘 그늘의 소중함을 이전까진 몰랐다. 연장, 양동이, 칼, 연필 따위가 귀한 보물이 되리란 것을.
리처드 파커가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는 것도...
녀석도 나처럼 험한 세상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다.
둘 다 같은 주인 밑에서 편히 살아왔고, 이젠 진짜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다.'
자신감의 비밀은 '하나씩 버리는 것(letting go)'에서 비롯된다.
무언가를 쌓아갈수록 우리는 그것에 의지하게 되며, 아이러니하게도 많이 쌓을수록 우리는 취약해진다.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것은 집착이다.
자연은 자신감이 조금 붙은 파이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준다.
어느 날 커다란 배가 파이의 뗏목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갔을 때 파이는 그 어떤 순간보다 더 절망했다.
계속되는 좌절과 고독 속에서 파이의 정신은 현실과 몽상이 겹쳐지는 단계에 도달한다.
파이는 이제 '믿을 것은 이성뿐'이라고 자신을 다잡으며 몽당연필로 다이어리를 필사적으로 써 내려간다.
다이어리는 파이가 집착하던 마지막 이성의 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폭풍우가 몰려와서 다이어리마저 저 멀리 날아갔을 때 파이의 절망은 <캐스트 어웨이>에서 배구공 윌슨이 날아갔을 때의 톰 행크스의 절규를 연상케 한다.
파이는 생존 필수품에 대한 집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 그는 기진맥진한 리처드 파커를 자신의 무릎 위에 얹고 이렇게 기도한다.
"신이시여, 절 창조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젠 돌아갈 준비가 됐어요."
신에게 완전히 항복(surrender)했을 때 파이에게 환희와 고요가 찾아온다.
그리고 배는 어떤 섬으로 인도된다. 파이는 낙원 같은 그곳에서 열매도 따먹고 맑은 호수에서 목욕도 하고, 섬주민인 수많은 미어캣들과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나 이 섬은 모든 생명을 서서히 삼켜버리는 식충섬으로, 안락함에 취하여 계속 머물다가는 결국 죽음으로 가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수행자는 힘든 수행의 성과로 삼매(三昧)에 도달한다.
삼매는 마음이 수행 대상과 합일된 상태로, 마음의 잠재력이 극도로 개발된 상태이다.
수행자는 삼매 속에서 지상의 어떤 쾌락과도 바꿀 수 없는 지극한 행복을 맛본다. 마음은 삼매의 행복과 안락함에 머물고자 한다.
그러나 수행 과정에서 이때가 위험한 퇴보의 시기이므로 다시 정진의 힘을 일으켜야 한다.
파이가 도착한 섬은 삼매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환각과도 같은 것이다.
파이는 정신을 차리고 리처드 파커를 데리고 바다로 떠난다. 자신이 길들인 두려움을 안고 다시 수행처로 돌아가는 것이다.
파이가 구명보트에서 찾아낸 생존 매뉴얼을 읽으며 명심한 것은 '무엇보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다.
희망은 '믿음'에서 나온다.
요가의 소의 경전인 <요가 수뜨라>에서는 수행의 첫 번째 발판으로 믿음을 강조한다.
"올바른 길로 가는 수행자는 믿음(信), 정진(精進), 마음챙김(念), 삼매(定), 지혜(慧)가 선행되어야 한다(śraddhā-vīrya-smṛti-samādhi-prajñā-pūrvaka itareṣām)."
<요가 수뜨라> 1-20
요가 수뜨라 1장 20절의 다섯 요소는 불교에서 오근(五根), 혹은 오력(五力)으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성과 논리의 종교인 불교도 믿음을 수행을 돕는 첫 번째 기능(根)과 힘(力)으로서 강조한다.
믿음은 양날의 검과 같다. 정진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힘이 될 수도 있지만, 무지로 가는 맹목이 될 수도 있다.
파이는 다행히 이성과 믿음의 균형을 잡아주는 부모에 의해 양육되었다.
아버지는 종교에 몰두하는 어린 아들을 걱정스러워하며 이렇게 충고한다.
아버지 : "세상의 모든 종교를 믿는 것보단 이성을 믿는 건 어때? 우주를 이해하는데 과학은 수백 년이 걸렸지만, 종교는 일만 년이나 걸렸어."
파이에게는 이성주의자 아버지뿐만 아니라 감성적이고 포용적인 어머니도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을 부드럽게 받아 보충해 준다.
어머니 : "그건 그렇죠. 아빠 말이 맞아. 과학은 세상을 가르쳐줄 순 있지만 여기 있는 건 [가슴에 손을 얹으며] 못 가르쳐줘."
아버지 : "누군 고기를 먹고 누군 채소를 먹고 모두의 생각이 똑같을 순 없지. 네가 뭘 믿든 상관은 없지만 맹목적인 믿음은 안 돼. 이성적인 사고를 하라는 거지."
이성의 신봉자였던 아버지는 파이에게 맹목적인 믿음의 위험을 알려주었고, 어머니는 믿음의 강력한 힘을 일깨워주었다.
중년이 된 파이는 자신을 인터뷰하는 작가에게 "종교란 방이 많은 집과 같다."라고 말한다. '의심의 방'이 층마다 아주 많은 집.
의심과 믿음은 대립과 협력 속에 살아가는 한 쌍의 부부와 같다.
의심은 믿음을 유지해 준다. 의심으로 더 강력해진 믿음은 수행의 원동력이 된다.
의심과 믿음의 상반된 특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파이는 자신의 놀라운 이야기를 끝내고 작가에게 또 다른 버전의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짐승이나 식충섬이 나오는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한 배에 탄 주방장, 엄마, 불교 신자가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이야기. 그러나 사람들이 믿을법한 이야기.
그리고 파이는 작가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떤 버전의 이야기를 선호하나요(Which story do you prefer)?"
믿음은 '어떤 것이 사실(진실)이냐'가 아니라, '어떤 것을 선호하느냐(prefer)'의 문제이다.
우리는 타고난 인식의 한계와 시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소수 파이의 끝을 알 수 없듯이.
파이는 처음엔 자신이 선택한 이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암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험난한 바다에서 비로소 자기 이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파이'는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끝없고 무의미한 윤회에 대비될 수 있다.
수행은 윤회의 바다를 건너서 뭍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바다의 모든 물방울을 모은 것보다 많은 윤회의 과정 속에서 믿음은 우리가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주는 마음의 기능이다.
수행의 성취는 오랜 기간의 정진을 통해 가능하다.
정진은 판단하고 시도하며 관심을 가지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은 그것이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法)는 즉각적인 기쁨을 주지 않는다. 먼저 법을 알고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법을 가까이해야 하는데, 마음을 열고 스스로 검증해야 한다.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검증할 수 있고, 가까이할 수 있다.
수행의 관점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어떤 것을 마음에 들어 할 것인지의 선택의 문제만이 남는다.
비참하고 사악한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 환상적이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
이것은 단지 비관과 낙관의 양자택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는 모두 현실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 몽상일 뿐이다.
수행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과정이다. 있는 그대로 아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을 획득하기 위해 어떤 믿음을 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부정성에서 지혜를 얻고, 어떤 사람은 긍정성에서 힘을 얻는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는 결코 어느 하나의 이야기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경계해야 할 것은 오직 맹목적 믿음으로 빠질 위험이며, 수행자에게는 의심과 이성의 힘이 항상 필요하다.
나는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크게 와닿은 장면이 있었다.
파이는 드디어 멕시코 해안에 도달했을 때, 기진맥진한 몸으로 배를 뭍으로 끌고 오면서 "배를 놓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라고 말한다.
그동안 자신의 생명줄과 같이 의지했던 배와 리처드 파커와 헤어지면서 파이는 아이처럼 통곡을 한다.
'내가 잡고 있는 배는 무엇일까?'
이 질문이 나를 뒤흔든다.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숲으로 사라진 리처드 파커처럼 미련 없이 놓아야 할 배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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