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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1 | '다 이뤘다'는 가부장의 허상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 싶었으나 분재 나무가 된 만수]

by 아닛짜

'다 이루었다.'라는 뿌듯함과 한숨이 뒤섞인 유만수(이병헌)의 한마디는 그의 지난 삶을 요약하는 것 같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는 예쁜 아내와 아들, 딸, 강아지까지 완벽한 한 가족이 모여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즐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70년생 만수가 어렸을 적 티브이에서 본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을 꽃잎이 샤랄라 날리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만수네 가족은 왠지 재연 배우들처럼 과장되고 엉성해 보인다. 아들과 딸은 아빠의 오버스런 행동에 장단을 맞춰주지만 어색해서 죽으려 한다.

이들 뒤에 배경처럼 서 있는 단독주택은 70년대 한국을 휩쓴 부의 상징과도 같았던 불란서 주택 양식이다.

정작 프랑스에는 없다는, 기원이 아리송한 이 주택에는 만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이 첫 장면 안에는 만수의 지난 25년간의 고된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우리가 정점이라 생각한 순간 남은 것은 정점에서 내려오는 일뿐이다.

박찬욱 감독은 관객에게 만수가 자신이 이룬 것을 하나하나 다 잃어가는 과정을 웃프고 섬뜩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며 아이러니와 파토스의 대가들인 봉준호 감독과 코엔 형제 감독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박찬욱 감독의 탐미적 예술성이 결합한 블랙 코미디라니! 현기증 난다.

많은 팬에게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헤어질 결심>(이하 헤결)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 같다.

나는 확실히 '헤결 이후파'인 것 같다. 헤결은 이차 관람에 각본집까지 완독했다.

이제 나에게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이차 관람이 필수가 될 것 같다.


<어쩔수가없다>의 1차 포스터는 정말 마음에 쏙 든다. 취.향.저.격.

포스터에는 압도적으로 커다란 나무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나무속에 사는 작은 요정처럼 구석구석 숨어있다.

영화에서도 나무는 단지 배경이나 소품이 아닌 커다란 존재감을 가진다.

주인공인 유만수는 나무를 잘라 종이를 만드는 제지회사의 직원이면서, 동시에 식물을 너무 사랑하여 아내에게 '식물인간'이라고 놀림당하는 사람이다.

그의 모든 것은 나무와 관련되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나무와 동일시한다.


<어쩔수가없다>는 다양한 층위를 가진 이야기라서 단선적인 해석만으로 '끝낼 수가 없다.'

먼저 여러 상징 중에 나를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은 나무를 중심에 두고 리뷰를 해보려 한다.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 박찬욱 감독, 2025년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 싶었던 만수
2. 야생 나무가 아닌 분재 나무가 되어버린 만수
3. 가부장제라는 연극이 끝나고 난 뒤




1.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 싶었던 만수


포스터 속의 나무는 배롱나무이다.

배롱나무는 붉은 꽃이 100일 동안 피어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짧게 피고 금세 져 버리는 여름꽃과 달리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고 하여 '인내의 나무'이다.

매끈하게 벗겨진 껍질은 자기 속내를 숨김없이 다 드러내는 것처럼 보여서 선비를 상징하기도 한다.

껍질이 벗겨진 배롱나무 줄기와 백일 동안 피는 꽃


배롱나무는 가장(家長)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에게는 실로 '가장의 나무'라고도 감정이입될 수 있을 것 같다.

만수는 '가장'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가진다.

70년생인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25년간 제지회사에 다녔다고 하니, 영화의 시점은 대략 2015년쯤으로 추측된다.

만수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적 인물이다.

포스터 속 나무는 가장인 만수 자신이기도 하고, 그가 삶에서 지키려 한 모든 것의 집약이기도 하다.


나무는 오행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오행(五行)은 우주 만물의 변화를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라는 다섯 가지 속성의 상호작용으로 표현한다.

오행의 순서가 '목()'부터 시작하는 것은 나무의 역할을 특별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오행 중 유일한 생명체는 목이다. 목은 바로 인간을 대표한다.

화토금수는 목이라는 생명체를 기르기 위한 환경이 된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적합한 땅()과 태양(火)과 물(水)이 알맞게 공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목이 자라는 과정에서 가위(金)로 적절한 가지치기를 해주어야 알찬 나무로 성장한다.


이렇게 온 우주의 도움으로 자라난 나무는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하고, 열렬히 하고 싶어 한다.

나무가 가장 원하는 역할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모든 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영화에서 만수가 제지회사에 다니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종이를 만드는 것은 나무에게는 극단적 희생이다.

자연의 순환 과정에서 봄, 여름을 거치며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한순간에 도끼로 잘라내지는 것은 급진적이고 돌연한 단절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무들의 피로 만들어진 종이는 지폐, 여권 등 특수한 종이가 아닌 이상 하찮게 여겨지고 낭비된다.


만수와 같은 실직자이자 경쟁자인 제지맨들의 공통점은 모두 종이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나무가 벌목되고 실려와서 분쇄되고 종이로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와 섬세한 과정을 거치는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만수는 태양제지에서 25년간 성실히 근무하고, 전문성을 인정받아 '올해의 펄프맨' 상도 받았다.

그러나 대량해고 물결에 휩쓸리는 것을 피할 행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만수의 또 다른 자아인 구범모(이성민)와 고시조(차승원)도 같은 물결에 휩쓸려 잠겨버렸다.

이들은 누가 뭐라 해도 자부심 있는 펄프맨이었지만, 재취업의 기회는 바늘구멍만 하고 알바를 오래 전전하다 보니 자부심이 바닥을 치게 된다.


만수는 한정된 제지회사의 일자리를 두고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겠다는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운다.

만수는 살인 의도를 가지고 범모와 시조를 염탐하지만, 그들에게서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범모는 만수와 닮은 꼴이다. 범모도 만수처럼 제지회사에서 25년 동안 근무하며 특수지를 만들었고, 올해의 펄프맨 상도 받았다. 조금 벅찬 아내를 가졌다는 점도 유사하다.

뭐라도 해보라는 말에 범모는 말한다.

"나는 종이밥을 먹고사는 사람이야.", "집은 장인 거라 못 팔고, 짐은 허리 아파 못날라."

이 말에 만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공감한다.


만수와 시조는 딸을 애지중지하는 공통점이 있다.

시조는 유학파 제지맨이었으나 지금은 판매 수당을 받는 신발가게 직원이다.

시조가 가게에 찾아온 어린 딸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며, 만수는 천재적 음악 재능을 타고났으나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자기 딸이 떠올라서 울컥한다.

"저를 통해 구입해 주셔야 수당을 받거든요."라는 시조의 말도 만수에게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들이 생각하는 가장의 모습은 가족에게 넓은 그늘과 거주지를 제공하고, 꽃향기와 맛난 열매를 공급하면서도 폼나게 서 있는 커다란 나무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현실은 낙엽이 다 떨어져서 볼품없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이다.


만수가 정원에 심은 사과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엄청난 피와 희생이 비료로 쓰여야 한다.




2. 야생 나무가 아닌 분재 나무가 되어버린 만수


만수에게 집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만수의 아버지는 큰 돼지 농장을 경영했고 만수는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기간은 잠시뿐이었고 농장이 망하면서 만수는 9개월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고, 대학도 가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는 제지 일밖에 모르는 전문가가 되었고, 일하면서 통신대학도 졸업했다.

비록 애 딸린 돌싱이지만 예쁘고 똑똑한 아내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것이다.


만수에게 삶은 전쟁과도 같다.

만수는 아내 미리(손예진)에게 말한다. "여보, 나 지금 전쟁 중이잖아."


만수가 힘들게 되찾은 아버지의 집은 어린 시절 에덴동산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꺾여버린 아버지의 자존심을 되찾아 준 것이기도 하다.

되찾은 집은 만수에게 자기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상징과도 같다.

첫 장면에서 만수는 마음속으로 아마도 '이 멋진 집을 봐. 이 화목한 가족을 봐. 다 이뤘다. 누가? 나야 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족을 불러 모아 힘껏 포옹한다.

불란서 주택을 배경으로 만수는 가족을 포옹하며 행복을 음미한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

만수는 블루칼라 관리직 노동자로서는 다소 벅찬 삶을 꾸려나간다.

집은 대출을 잔뜩 받아서 산 것이고, 유명 교수에게 받는 딸의 첼로 레슨비는 상당한 부담이다.

물론 거기다 넷플릭스 구독료도 있다!

아내는 능력이 있는데도(대졸에, 치위생사이며, 결혼 전에는 만수보다 수입이 좋았다.) 테니스와 댄스 레슨을 받게 하며 중산층 부인처럼 집에 모셔둔다.


이렇게 '다 이루기' 위해서 가장은 슈퍼맨도 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될 수 없다.

자기 자신이 되어서는 자신이 짊어진, 혹은 '짊어졌다고 믿는'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 집, 가족, 나무, 종이, 취미 등 무엇이든 밖에 있는 것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가장의 숙명이다.

그래서 취미에 몰두하는 잠깐의 시간과 공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만수의 자기만의 공간인 온실, 범모의 고급 오디오를 갖춘 음악감상실, 선출(박희순)의 외딴섬의 고립된 집은 이들에게 도피처이자 마지막 자유이다.

만수는 밖에서는 썰렁한 유머를 남발하며 허세를 부리지만, 온실 안에서만은 어둡고 풀 죽은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다.

가족들은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자신의 온실에서 마음껏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만수.


만수의 취미가 분재이며, 집안 곳곳에 분재가 놓여있는 설정은 원작 소설에 없는 것을 새로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분재 설정은 정말 놀라운 통찰이다.

포스터의 거대한 나무 옆에 작은 분재가 놓여 있었다면 상징성을 한층 깊게 했을 것 같다.

아니, 작은 화분에 있는 분재 나무 자체를 거대하게 그렸어도 좋았을 것 같다.


분재는 나무의 자연적인 생장을 억제하고 인간의 미적 감각에 맞게 나무에 철저한 통제를 가하여 기르는 것이다.

분재는 대단히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예술이라고 하지만, 나무 입장에서 보면 그냥 폭력적일 뿐이다.

만약 <다운사이징(Downsizing)>처럼 우리에게 12cm로 축소되면 안락한 환경을 제공해 주겠다는 제안이 오면 받아들일 것인가?


가부장제는 한참 전에 죽었는데 자기만 죽은 줄 모르는 유령과 같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외벌이만으로 중산층 유지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가부장제는 우리 머릿속에 관념적 잔재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만수는 커다란 야생 나무가 되려 했으나, 인위적이고 왜소한 분재 나무가 되었다.

일이 잘 안 풀려 답답한 상태에서 만수는 분재 나무의 모양을 손보려다가 가지를 부러뜨리고 만다.

그가 이룬 허약한 토대가 하나하나 부서져 가는 것처럼.


만수는 두 번째 희생자 시조를 죽인 후 시체처리를 고민하다가 분재를 묶는 철사를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분재처럼 돌돌 만 시체는 흡사 바비큐용 통돼지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 대목은 정말 '배운 변태' 박찬욱이 안 죽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공포만화가 이토 준지의 <소용돌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미 무너진 가부장제는 통돼지 구이처럼 화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만수는 시체를 사과나무 밑에 묻는다.




3. 가부장제라는 연극이 끝나고 난 뒤


가부장제 하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가장도 가장의 보호를 받는 구성원들도.

가족은 자본주의 산업 사회에서 효율적인 생산 단위로 기능해 왔다.

가장, 현모양처, 장래 훌륭한 일꾼인 될 아이들은 효율적 분업 시스템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노동자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가장의 권력과 압제를 강조하지만, 모두 분재처럼 인위적으로 길들여진 생산의 톱니바퀴이자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소비자들일뿐이다.


모든 소동극이 끝나고 갈등이 봉합된 듯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그동안의 모든 살인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을 암시한다. 지금까지 본 것은 예고편이었단다.


만수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범모, 시조, 그리고 선출까지 죽이고 나서 결국 원하던 자리를 얻는다.

범모의 아내인 아라(염혜란)의 욕망이 만들어낸 우연에 의해 범죄 혐의까지 기묘하게 벗어났다.

곳곳에 흔적을 흘리고 다녔던 어설픈 살인 행각이 천운에 의해 조용히 덮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있나?

하늘이 알고 나 자신이 아는데 완전범죄가 어디 있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첫 장면에서 만수네 가족은 행복한 가족을 연기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믿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들은 암묵적으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연기하려 한다. 그러나 이제 아무도 믿지 않는다.


만수는 새 직장에 처음 출근하며 미리에게 말한다.

"이제 테니스도 다시 다니고, 댄스 레슨도 시작해."

그러나 미리는 말한다. "아니, 나 돈 벌 거야."

미리는 이제 가부장에 의존하는 중산층 아내 역할을 단호히 거절한다.


아들 시원은 한밤중에 만수가 온실에서 한 짓을 목격했다.

미리는 아들이 본 것이 바비큐용 돼지였다고 둘러대지만, 아들의 의심은 점점 자라날 것이다.


딸 리원은 그동안 가족에게 한 번도 들려주지 않던 첼로를 연주한다.

자폐적인 딸은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들은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이 소통의 전부이다.

리원은 만수가 범모의 집에서 미리와 통화하면서 한 말을 기억했다가 출근하는 만수에게 되돌려준다.


"벌레가 끓어서 나무가 다 죽어가."


박찬욱 감독은 리원을 마치 예언자 카산드라처럼 신탁을 주는 신비한 존재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리원은 남들의 대화에서 주워들은 말들을 이용해서 적재적소에 예언처럼 던진다.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는 리원이 보기에, 만수의 영혼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


앞으로 썩은 나무 아래 사는 가족들은 조금씩, 그러나 착실히 와해될 것이다.


만수는 살인 과정에서 9년이나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댔다.

심각한 알코올중독에 빠진 외로운 선출의 모습은 미래의 만수가 될 것이다.

미리는 전에는 9년이나 인내하며 만수의 중독을 같이 이겨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열정도 명분도 없다.


이제 최종 빌런이 등장할 차례다.

우리가 이미 고인이 된 가부장제의 유령과 싸우는 동안 거대한 혁명이 진행 중이다.

만수가 모든 것을 잃어가며 지켜낸 단 한 자리는 AI 자동화 시스템으로 변모한 텅 빈 공장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것도 당분간. 25년 노하우 따위는 필요치 않으며, 언제 치워질지 모르는 단순 관리직으로.


만수는 동료 하나 없는 텅 빈 공장에서 파이팅도 해보고, 거대한 종이 롤을 두드리며 할 필요도 없는 테스트도 해보지만, 이윽고 이어폰을 끼우고 귀를 막아버린다.


나는 이 엔딩을 보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의 엔딩이 겹쳐 보였다.


<A.I.>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아이 로봇인 데이비드의 맹목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데이비드는 자신을 입양한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진짜 인간 아이가 되고자 긴 모험을 떠난다.

그러나 피노키오 같은 이 이야기는 에필로그에서 완전한 반전이 펼쳐진다.

바닷속에 잠겨서 작동을 멈춘 데이비드는 2000년 후에 구조된다.

인간이 멸종된 세상에는 외계인처럼 생긴 로봇들에 의해 A.I. 문명이 열려 있었다.

로봇들은 우리가 과거 멸종 생물들을 연구하듯 인간 유물을 발굴하다가 데이비드를 발견하게 된다.


이제 주체는 역전되었다.

전에는 아들을 잃은 낙심한 엄마를 위해 아이 로봇이 개발되었지만, 이제는 모성결핍으로 낙심한 로봇을 위해 인간이 개발된다.


<A.I.>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만큼이나 섬뜩한 묵시록 같은 영화다.

<어쩔수가없다>는 노동자 버전의 묵시록처럼 보인다.

진짜 어쩔 수가 없는 것은 가부장 꼴통 만수가 경쟁자를 죽여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 앞에 다가온 문명의 거대한 전환이 아닐까?


# 두 번째 리뷰에서는 만수의 진정한 살인 동기와 개연성 문제를 다뤄보려고 한다.



#어쩔수가없다 #박찬욱감독 #이병헌 #A.I. #가부장제 #배롱나무 #분재 #아낌없이주는나무 #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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