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향한 시민의 불신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든, 최소 30% 이상의 국민은 분노한다. 그 분노는 단순한 실망이 아닌, 상대 진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극단적 혐오로까지 이어진다.
거대 양당 체제가 고착된 지 오래지만, 그 안에서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증폭된다. 정치란 국민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고, 사회의 갈등을 중재하며,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균형 있게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정치의 현실은 그 본질에서 너무도 멀리 벗어나 있다.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만들어내고 증폭시키며, 민생은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우리의 비극적인 정치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일까 분석했고, 그렇게 다섯 가지 병폐를 짚었다. 먼저 ‘혐오 정치’다. 정치인은 정치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지금의 정치인은 갈등을 활용해 생존을 꾀한다.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까지 ‘적’으로 만든다. 혐오를 통해 결집을 유도하고, 반대를 통해 동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정치는 건강한 토론과 비판을 봉쇄하고, 증오만 남긴다. 상대를 부정해야만 내가 설 수 있다는 정치적 논리는 시민사회를 분열시키고, 타협과 협력은 정치적 배신으로 낙인찍힌다.
그 다음은 ‘팬덤 정치’다. 정치인이 자신의 생각과 비전으로 국민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충성도 높은 팬덤을 만들고 그들만을 바라본다. 팬덤의 환호를 받기 위해 정치는 자극적이고 극단적으로 변한다. 이 과정에서 정치는 더 이상 공공성을 위한 장이 아니라, 팬심을 모으는 쇼 무대가 되고 만다. 정치인의 발언은 신념이 아닌 팬의 기대에 따른 연출이고, 논리는 중요치 않다. 그저 박수와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어떤 말도, 어떤 태도도 정당화된다. 팬덤이 과잉되면 대화가 불가능해지고, 정치적 다양성은 사라진다.
‘매몰 정치’는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미래를 위한 정책은 사라지고, 정쟁의 중심은 언제나 과거다. 누가 잘못했는지를 밝혀내는 데 온 힘을 쏟고, 상대의 실책을 반복해서 끄집어내며 현재의 실정을 덮으려 한다. 정치는 끊임없이 과거로 달려가고, 국민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지 못한 채 과거의 논쟁 속에 갇힌다. 이로 인해 진정으로 필요한 변화는 지연되며, 모든 정치 행위는 ‘보복’이나 ‘방어’라는 방식으로만 재생산된다.
‘굽신 정치’는 권력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난다. 국민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민심을 받드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자 앞에만 머리를 숙인다. 관료, 대기업, 해외 권력, 검찰 등 실질적인 힘을 쥔 존재 앞에서 정치인은 굽신거리고, 국민은 기만당한다. 국민은 선거 때만 소중할 뿐, 평소엔 민의를 대변받지 못한 채 철저히 배제된다. 정치가 스스로 권위의 정점에 서는 대신,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 움직이는 행위가 돼버린 것이다.
마지막은 ‘파괴 정치’다. 협치는 무능, 타협은 배신,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정치 전반을 지배한다. 정책은 상대가 하면 무조건 반대되고, 법안은 진영에 따라 찬반이 정해진다. 국익보다 당익이 앞서고, 상대 진영의 실패만이 나의 성공이라는 극단적 계산이 모든 전략의 기반이 된다. 이로 인해 정치 자체가 소모적이고 무의미해지며,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등을 돌린다. 정치는 해결이 아닌 파괴를 지향하는 공간이 되고, 공동체의 신뢰는 산산이 조각난다.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치는 왜 이토록 파괴적이고 퇴행적인 방식으로 굴러가게 된 것일까? 이는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구조와 문화, 그리고 시민의 정치적 태도 모두와 관련돼 있다. 변화는 위에서 오지 않는다. 위기를 인식하고 바꾸고자 하는 힘은 언제나 아래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 다섯 가지 정치 유형을 먼저 마주해야 한다. 이 장은 그 문제의 본질을 하나씩 해부해보고자 한다. 정치가 다시 우리 삶의 편안함을 위한 도구가 되기를 바라며, 지금부터 그 분석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