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고개는 국민을 향하지 않는다. 그들은 위만 본다”
“정당의 주인은 당원입니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입니다.”
정치인들이 늘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진심으로 믿는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 선거철에만 찾아오는 ‘주권자 대접’은 선거가 끝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정치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자리는 국민이 아닌, 유력 정치인을 향한 고개 숙임, 곧 굽신의 정치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는 ‘거대 양당’이라는 구조에 철저히 묶여 있다.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정치인으로 살아남고 싶다면 당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하고, 그중에서도 유력 정치인과의 거리를 어떻게 좁히느냐가 핵심이다. 무소속이나 소수정당으로 출마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은 정치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정치는 상명하복, 충성경쟁, 줄세우기 게임이 된다.
정치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은 선거가 아니라 ‘공천’이다. 선거는 유권자와의 경쟁이지만, 공천은 동료 정치인과의 경쟁이고, 심지어는 ‘윗사람’의 선택이다. 공천을 받지 못하면 선거에 출마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공천권을 쥔 유력 정치인, 당 대표, 대통령 후보, 원내대표 앞에선 정치인의 고개가 자동으로 숙여진다.
형식상 공천은 공천관리위원회가 한다. 기준도 있고 절차도 있다. 하지만 정치를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면 안다. ‘공정’이라는 이름 뒤에는 ‘입김’이라는 실세가 있다는 걸. 정치인의 생존 여부가 좌우되는 순간, 그들은 국민이 아니라 사람을 본다. 누가 힘을 가졌는지,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누가 미는 사람인지 계산한다.
작금의 정치 풍토에서는 당연히 ‘국민을 위한 정치’가 실종된다. 의원들은 국민 눈치를 보기보다 유력 정치인의 눈치를 본다. 민생보다 권력, 공약보다 줄서기가 우선이다. 당의 내부 논쟁도, 정책에 대한 고민도, 모두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한 연극’에 불과하다. 결국 정치인은 본인의 양심이 아닌, 상관의 기류에 따라 움직인다.
도대체 왜 굽신 정치가 등장하게 된 것일까? 대한민국의 정치 구조는 정당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정당이 후보를 내고, 정당이 선거 자금을 대며, 정당이 국회 내 힘의 구도를 만든다. 이 상황에서 정당의 힘이 곧 정치인의 운명이다. 그 정당 안에서 누가 힘을 갖고 있느냐가 곧 생사여탈권을 쥔 인물이 된다. 결국 정치인은 ‘권력의 줄’에 서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공천권 집중 구조는 굽신 정치를 불러온다. 공천권이 중앙당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지역에서 아무리 유능한 정치인이 있어도 중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천은커녕 면담조차 어렵다. 정치인은 지역구보다 중앙을 바라보고, 국민보다 당 대표를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굽신 정치’가 일상화된다. 국민의 이익보다 공천권자의 심기를 헤아리는 정치가 된 것이다.
비례대표 및 당내 민주주의의 부재도 강력한 문제다. 비례대표 후보는 극히 소수의 권력자들이 정하는 경우가 많고, 당내 공천도 공정한 경선보다는 전략공천이나 ‘물갈이’, ‘컷오프’ 등 내부 기준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당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약하고, 참여해도 실질적인 권한은 없으니, 당 내부에서도 민주주의는 유명무실하다.
굽신 정치는 정치의 방향을 왜곡시킨다. 정치인의 시선이 국민을 향하지 않으면, 결국 정책도 국민을 향하지 않는다. 민생보다 정파, 지역보다 계파, 국민보다 당내 권력 싸움이 우선시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전시 행정, 보여주기식 입법, 실효성 없는 규제다. 국민의 삶을 바꾸는 정치가 아닌, 정치인을 위한 정치가 반복된다.
굽신 정치는 정치를 혐오하게 만든다. 국민은 정치를 볼 때 “쟤는 누구 라인이야?”라는 시선을 갖는다. 실제 실력보다는 누구 밑에 붙어 있느냐, 얼마나 충성했느냐로 평가받는 정치는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 정치인은 정치가 아니라 사람을 향한 줄서기로 평가받고, 유권자는 정치인을 대표자가 아니라 ‘정치권의 꼭두각시’로 바라보게 된다.
가장 큰 피해는 결국 국민이다. 정치가 정당의 권력자들만 바라보는 구조에선, 국민을 위한 법안, 정책, 예산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정치는 특정인을 위한 충성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민주주의의 본질인 ‘국민을 위한 통치’는 실종된다.
결국 굽신 정치 문제의 핵심은 공천 구조와 정당 권력의 집중이다. 공천권이 한 사람 혹은 소수 지도부에게 집중된 구조 속에서는 누구도 소신 있게 정치할 수 없다. 숨 막히는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하고, 목소리를 낮춰야 하며, 때론 국민보다 권력자의 눈치를 먼저 봐야 한다.
정치인의 생존 조건도 변화해야 한다. 정치인은 매 선거에서 살아남아야 하기에, 이상보다 당선이 우선이다. 정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선 공천을 받아야 하고, 공천을 받기 위해선 ‘굽신’이 필수다. 개인의 정치 철학이나 정책 역량은 후순위다. 당선만 된다면, 그 이후에야 정책은 고민해도 된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굽신 정치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매몰 정치가 사라져야 한다. 다양성이 존중받기 시작하면 그릇된 리더에게 굽신거릴 필요도 없다.
공천의 투명성과 분권화도 필요하다. 공천을 특정인에게 집중시키지 말고, 당원과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공개 경선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중앙당보다 지역 당원의 목소리가 더 중요하게 반영되는 구조라면, 정치인은 국민에게 더 다가갈 수밖에 없다.
비례대표 선정 방식의 개선과 당내 민주주의 강화를 위한 제도 개편도 진행해야 한다. 소수 권력자가 좌지우지하는 비례대표 제도가 아니라, 당원 투표 또는 공개 검증 절차를 통해 구성해야 한다. 정책 중심 후보들이 등용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또한 정당법을 개정해 당원들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공천 관련 위원회의 구성과 운영 과정을 공개적으로 감시받도록 해야 한다. 외부 감시가 강화되면, 권력 중심의 줄서기 정치가 줄어들 것이다.
굽신 정치는 정치의 수치다. 국민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발밑을 기웃거리는 정치에서 민주주의는 자랄 수 없다. 고개를 숙여야 한다면, 그 고개는 국민을 향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