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몰 정치 : 모두를 걸어도 못 이기면 모두 잃는 정치

by 최재혁

“All or Nothing, 승자가 모든 걸 갖는다”

정치는 다수의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는 다수의 의견이 아니라, 다수를 차지한 ‘하나의 의견’만 남는다. 나머지는 사라진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다. 선거의 결과는 승자에게 모든 것을 안기고, 패자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바로 이 ‘올 오어 낫띵(All or Nothing)’의 구조가 대한민국 정치를 병들게 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매몰 정치라고 부른다.


대통령 선거는 단 한 명만 뽑는다. 지는 순간 후보는 국민의 기억에서 지워지거나, 야권의 비주류로 밀려난다. 승자는 모든 걸 갖고, 패자는 모든 걸 잃는 것은 대통령제를 선택한 모든 나라가 같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국회의원 선거, 지방의회 선거, 심지어 교육감 선거까지도 마찬가지다. 단 한 표라도 적게 받으면, 그 후보는 그냥 ‘패자’다. 다음 선거까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승자 독식 구조는 ‘소선거구제’라는 제도에서 비롯된다. 한 지역에 한 명만 당선되는 제도는 경쟁을 단순화시키지만, 동시에 다양성을 잘라낸다. 선거구마다 다당제가 정착할 여지를 없애며, 유권자에게 선택지를 줄인다. 결국 정치인은 ‘당선 가능성’만을 좇게 되고, 유권자는 ‘될 사람’에게 표를 던지는 투표 전략에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 정치 지형은 양당 중심으로 고착된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이라는 거대 양당의 구조 안에서만 유의미한 승부가 펼쳐진다. 제3당이나 무소속 후보는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생존할 수 없다. 과거 국민의당, 바른미래당, 열린민주당, 통합진보당, 창조한국당 등 한때 돌풍을 일으켰던 정당들도 결국 거대 양당에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매몰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 제도의 문제다. 1987년 직선제 이후 우리 정치는 여전히 소선거구제라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등만 살아남는 구조는 극단적 경쟁을 조장한다. 당선되기 위해선 무조건 상대를 이겨야 하며, 2등은 1등과 표 차가 0.1%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소선거구제 안에서는 ‘협상’보다는 ‘격파’가 중요하고, ‘정책 경쟁’보다는 ‘유권자 결집’이 효과적이다.

유권자의 표심 구조도 매몰 정치의 원인이다. 유권자 다수는 ‘될 사람’에게 표를 몰아준다. 정책보다는 정당 이미지, 인물보다는 대세 판단이 우선이다. 결국 정당은 인물보다는 브랜드로 판단되고, 지역은 ‘보수 텃밭’, ‘진보 아성’으로 고정된다. 출마자 입장에서는 “이길 수 있는 당”을 택하지 않으면 정치를 시작할 수 없다.

메몰 정치로 인해 선거 후에도 제도가 ‘승자 중심’으로 작동한다. 다수당은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고, 법안 심사 구조도 다수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짜여 있다. 정책 합의보다 의석수 밀어붙이기가 더 빠른 길이다. 승자독식 구조 속에서는 굳이 다른 정당과의 협치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결국 정책은 협력의 산물이 아닌, 독점의 부산물로 변질된다.


매몰 정치는 정치의 다양성을 말살한다. 소수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다양한 정치적 시도가 싹트기도 전에 꺾인다. 국민의 정치적 선택권도 축소된다. 거대 정당이 공천한 인물만이 유의미한 후보가 되며, 그 외의 후보는 ‘들러리’에 머무른다.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당의 강세 지역과 약세 지역이 고착화되어, 사실상 ‘유권자 무풍지대’가 만들어진다.


아쉽게도 유권자의 정치 혐오도 큰 문제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고 물을 수 있지만, 표의 비례에 따른 선거 없이 사라지는 표들은 결국 ‘내 표가 사라졌다’는 좌절로 이어진다. 내 표는 의미가 없고, 정치에는 내가 없다. 이토록 허무한 감정은 점차 무관심으로 이어지며, 투표율을 낮추고 정치 불신을 키운다. 실제로 한국 정치에서 청년, 소수자, 지방 유권자의 정치참여율은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의석’으로 환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인의 자질 문제도 생긴다. ‘당선 가능성’이 중요한 정치판에서는 인물보다는 소속 정당이 중요하고, 인지도보다는 정당의 공천 시스템이 절대적이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고, 공천을 못 받으면 낙선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공천 경쟁이 본선보다 치열하고, 줄서기 정치, 충성 경쟁이 당내 정치의 핵심이 된다.

매몰 정치의 핵심은 소선거구제다. 정치 다양성을 제한하고, 표의 사표화 현상을 심화시킨다. 한 표라도 적게 받으면 그 후보에게 투표한 수천, 수만 명의 표는 모두 소각된다. 소선거구제가 반복되면 국민은 점점 선택의 폭을 좁히게 되고, 정치인도 중간층이나 소수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어차피 그들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는 매몰 정치의 문제를 보완할 수 있는 제도지만, 현재는 비례대표 의석 비중이 너무 낮고, 연동 방식도 ‘반쪽짜리’다. 거대 정당은 위성 정당을 만들어 비례제를 악용했고, 결국 ‘비례를 통한 다당제 실험’은 실패로 귀결됐다.


해법은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이다. 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을 선출하게 되면, 소수 정당이나 다양한 정치 세력이 진입할 수 있다. 유권자도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게 되며, 정치적 다양성이 확보된다. 중대선거구제는 ‘1등 독식’이 아닌,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비례대표제의 강화도 또다른 방법이다. 독일처럼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혁하면, 국민의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국회로 연결된다. 정당 간 협치가 자연스럽게 유도되고, 정치권은 극단 대신 연대를 고민하게 된다.


정치 교육의 강화도 필수적이다. 유권자들이 단순히 ‘이길 사람’을 찍는 게 아니라, 정책과 철학을 기준으로 후보를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정당도 브랜드가 아니라 공약으로 평가받아야 하고, 후보도 당적이 아니라 인물로 선택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패배는 곧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란 승패만을 가리는 게임이 아니다. 각자의 의견이 모이고 부딪치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절충과 조정이 이뤄지는 과정이다. 매몰 정치가 끝나야, 대한민국 정치는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Light Green and Beige Watercolor Illustrative Story Book Cover.jpg


keyword
월, 수 연재
이전 03화팬덤 정치 : 정치가 아닌, 인기 척도에 따른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