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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교과서에도 시험지에도 없는 가르침

학교를 그만두니 진짜 교육이 시작되었다 연재 중

by 여온빛



‘하루하루 쌓임의 법칙’


항상 수진이는 무언가 힘들고 불가능한 일이 있을 때, 결과가 더디다고 느껴질 때.

스스로에게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목표가 있고 그게 어찌 될지 몰라도 그냥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그쪽을 향해 가다 보면 어딘가 가까이 가게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그녀의 삶의 태도이고 그렇게 하루하루 거짓되지 않게 살아왔다.


지금 순간도 그렇게 시작하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내일 일도 모르는 미미한 인간이다. 아무리 잘난 척 해도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래도 큰 일과 결정을 하고 나서 그게 잘한 것이라고 확신해도 가끔은 자신도 모르게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한다. 그래서 자꾸 자신의 마음으로 스스로 다잡는다.


어떤 결정을 했던 그 책임을 본인이 지겠지만, 그래도 지금 본인의 양심과 믿음과 신념을 따라가는 편이 맞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지만 우리 인간의 삶은 누구나 유한하다.

누구나 태어나고 누구나 죽는다. 인간의 삶은 한낮 풀이고 그 영광은 그 품의 꽃과 같다 하지 않는가.
풀은 시들고 꽃을 떨어진다.

그 누구도 너의 삶을 기억하지 않을 터이니 남의 삶과 비교해서 불안해하지 말라고 수진이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진짜 중요한 건 곧 떨어질 꽃을 피우기까지 최선을 다 했는가이다. 그건 내가 알면 되는 거지. 누군가 내 곁에 있는 자가 알아주면 그건 보너스인 거고.


오늘 하루 열심을 살았는가 질문에 스스로의 대답이 ‘그래’이면 충분한거다. 너무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남의 평가를 무서워하지 말자.


수진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사실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옛날 생각을 다시 하니, 수진이는 씁쓸한 느낌이 몰려왔지만, 자신의 흑역사를 다시 소환해서 그 썩은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 수진아, 불안해하지 마!
매일 좋은 시간으로 꽉꽉 채우면
좋은 미래가 반드시 오게 되어있어.
잘한 선택이야.
좋은 생각으로 좋은 발전으로 시간을 계속 쌓자~
쌓임의 법칙!




준서는 하루하루 자신의 공부를 이어가면서 무언가 성취감이 오르고 있었다. 그 어렵기만 하고 국어공부를 해야 하는 건지 수학 공부를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문제를 해석하는 것도 너무 어렵기만 했던 시절이 바로 두 달 전인데 이제는 수학이 너무 재밌다고 말하는 준서가 되지 않았던가.


학교를 다녔던 기간 동안 수학교재는 진도가 나가지 않고 1단원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더랬다. 그런데 거의 한 달 만에 진도를 영 못 달리던 수학문제집 한 권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마치 마의 고개를 넘기고 나서는 힘 빼고 달려도 될 만큼 쉬워진 길에 몸을 실은 느낌이다. 그렇게 수학도 문학도 운동도 악기 연습도 제법 속도가 붙고 있었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준서는 진도를 박차고 나가는 속도가 더뎌지기 시작하더니 역시 자기는 안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발전은 계단식이라더니, 준서에게도 한 단계 오르니 변화가 없는 것 같은 그 구간이 온 것이다. 특히 수학문제는 풀기만 하면 답이 영 맞지 않는 게 너무 많고, 어떤 것들은 아무리 인강을 반복해서 들어도 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도서관 2층 한쪽 책상에서 그렇게 수학문제와 씨름을 하다가 기가 죽고 자신에게 화도 나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에 공부하던 손을 털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딱 봐도 아빠정도 돼 보이는 아저씨가 자기가 몇 달 전에 풀었던 인수분해 문제를 옅은 소리로 읽어가면서 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 신기했다. 왜냐하면 모양새가 선생님이 문제를 푸는 모습이 아니라, 당연히 쉽게 풀어야 할 큰 어른이 준서가 봐도 정말 쉬운 문제인데 엄청나게 고민하고 계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그 고민하던 아저씨도 나처럼 답답한 마음이 들었는지 갑자기 밖으로 나를 뒤따라 오기 시작했다.


그 아저씨는 내가 앉은 도서관 로비 한쪽에 있는 정수기 옆 소파 근처로 다가왔다. 그곳은 바로 준서가 서 있는 곳이었다.


"학생이지? 중학생이니?"


"네"


"아, 혹시 인수분해 풀 줄 아니?"


아마도 아까 아저씨자리에서 중얼거리던 인수분해를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 아저씨가 풀고 있던 거라면 풀 수 있을 거 같은 쉬운 문제여서 '네'라고 대답했다.


"오 그래? 잘됐다? 그럼 나 좀 가르쳐 줄래?"


"네?"


'이게 무슨 일이지? 진짜 이분은 학생처럼 그 문제를 풀고 계셨던 건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게, 아저씨가 옛날에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못했어. 그래서 지금 이 나이에 검정고시를 보려고 하는데 다른 건 어떻게든 하겠는데 수학이랑 영어가 너무 힘들더라고.

특히 수학은 지금 하는 부분이 이해가 가질 않아서 진짜 헤매고 있는데 시험이 한 달도 안 남았어서 너무 절박한 상황이야. 네가 알면 좀 알려줄 수 있니?"


아저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을 들으니 이제 이해가 되었다.


"네, 알려드릴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사실 저도 수학 잘 못해요." 이렇게 말하면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도 나 같은 꼴통정도는 충분히 가르칠 수 있을 거야. 진짜 다행이다. 야~ 오늘 완전 운수대통한 날일세."






그렇게 운수대통했다면서 기뻐하던 아저씨는 자기 자리로 뛰어 돌아가서 수학 문제집을 가지고 나오더니, 내가 가장 자신 없어하는 수학을 첫 강의할 수 있는 선물 같은 시간을 주셨다.


"와~ 너 진짜 대단하다. 완전 수학천재네. 아저씨가 오늘 널 만나려고 이 시각에 여길 왔나 보다. 오늘 일감이 없어서 집에는 와이프랑 애도 있고, 시험은 코앞이고, 공부는 해야 하는데, 어쩌지 하다가 예전에 지나가다 봤던 여기 도서관이 생각나서 와본 거였거든."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학교에서 나 같은 수학 실력은 정말 바닥일 텐데, 이 사십넘으신 아빠 뻘 되시는 아저씨에게 난 수학천재가 되어 있었다. 진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아저씨, 왜 검정고시 시험을 보세요?" 아저씨가 보답으로 사준 시원한 에이드 한잔을 마시면서 준서가 물었다.


“하.. 아저씨는 어릴 때부터 늘 먹고사는 게 먼저였어. 아버지가 나 어릴 때,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랑 동생 둘이랑 사는데 울 엄마 혼자 벌어서는 우리 삼 남매가 어떻게 살 도리가 없었어.


맨날 배고프고, 눈치 보이고, 자존심도 못 챙기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학교는 나에겐 사치 같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너무 비교되니까 학교 가서 다른 애들이랑 같이 있는 거 자체가 너무 괴롭기도 했지.


못났기도 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후회가 많이 돼. 나를 너무 안 보살핀 것 같아. 그럴 자격이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어. 환경에 굴복한 거지. 그때 중학생인 나를 만난다면,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 후회 많이 할 거라고."


아저씨의 얼굴에는 뭔가 씁쓸한 기억이 올라와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다시 기억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배움’이란 걸 내 인생에서 아예 빼버렸지.”


아저씨는 먼 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려. 지금 이 나이에 뭘 더 바꾸겠냐.. 뭐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자식새끼들 자라나는 모습 보면 아빠로서 뭔가 불안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 아저씨는 7살짜리 딸이랑 4살짜리 아들이 있어.

뭐 이 나이에, 겨우 중학교 검정고시냐 비웃는 사람도 있겠지. 왜 없겠어. 나라도 그럴걸 같은데...


그런데 '배워야 한다. 배우고 싶다.' 이런 마음이 계속 올라오는 거야. 그래 까짓 거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놓지만 않으면, 언제든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거 아닌가? 그게 무슨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늦으면 어때? 늦어도 괜찮지.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내가 뭐 잘못해서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주눅 들고 살아야 하나.


세상탓 하면서 실패자모드로 사느니 차라리 내가 나를 포기하지 말자. 나라도 나를 좀 챙겨주자. 그래야 내 새끼도 있는 거고 내 와이프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이 마구 쏟아지는 거야. 그래서 아저씨 진짜 공부하는 거 보통 힘든 게 아닌데 이렇게 붙들고 몰래몰래 공부하는 거야. 하하하."


"늦으면 어때? 늦어도 괜찮지.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그 말은 교과서에도, 시험지에도 없는 이야기였다.

남보다 한참 늦게 출발했다고 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을 놓지 않는 거다.

그 마음 하나면, 언젠가는 도착하리라.


준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숫자도 공식도 아니었지만,
그 어떤 정답보다 마음 깊은 곳에 꽂혔다.


집에 돌아온 준서는 책상 위 포스트잇에 이렇게 적었다.


늦어도 괜찮다.

포기만 하지 말자.

언젠가는 도착한다.

그동안 속도가 나지 않아 매너리즘에 빠졌던 준서는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상쾌한 기분이 좋았다.

문제를 푸는 손이 느려도 괜찮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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