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퇴근 후 나는 나를 다시 만난다

인사담당자, 일상, 존재감 회복

by 문장담당자

"퇴근 후 나는 다시 나를 만난다"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벗는 것은 양말도, 셔츠도 아닌, 하루 종일 나를 감싸고 있었던 ‘회사라는 껍질’이다.

나는 반도체 장비사의 인사담당자다.
그리고 어느덧 ‘과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한 조직의 성과와 인사, 보상, 채용을 과정을 리드하고 있다.

낮 동안 나는 회사의 언어로 살아간다.
평가, 직무기술서, KPI, 연봉 책정표, 채용공고, 전자결재…
어느 것 하나 ‘감정’이 묻어날 틈이 없다.
그 언어들 속에서 나는 늘 누군가의 이름 대신 직급을 먼저 부르고 어떤 서류보다 정서가 뒤처지는 대화를 반복한다.

하지만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문을 닫는 순간 나는 다시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하루의 끝, ‘존재감’을 되찾는 시간

나는 퇴근 후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브런치라는 공간에 인사담당자로서 한 사람의 마음을 기록한다.

회사에선 수치와 기준이 먼저지만, 이곳에서는 감정과 사연이 먼저다.

서류 너머, 평가표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의 얼굴을 나는 이 밤에야 비로소 떠올릴 수 있다.

“그 직원, 참 열심히 했는데 왜 낮게 평가됐지?”

“이번 인사에서는 저 말 한마디가 꽤 아팠겠다.”

“보상은 숫자인데, 상처는 감정이었겠지.”

이런 생각을 사무실에선 감히 꺼내지 못한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조용한 방에 앉아 마주한 노트북 앞에서는 내가 ‘사람을 보는 시선’을 다시 꺼낼 수 있다.


‘일’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한때는 퇴근 후에도 일 생각뿐이었다.
메일 알림이 울리면 반사적으로 손이 가고 회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일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걸 나는 꽤 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러다 문득 책상 한편에 꽂힌 노트를 펼쳤다.

국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좋아하는 문학 작품을 베껴 쓰던 그 노트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때부터였다.
퇴근 후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HR이라는 조직 속 언어를 인간의 말로 번역하는 글.

그 글 안에서 나는 다시 나를 회복해 갔다.


‘사람을 다루는 일’을 한다는 것

인사팀에 있다는 이유로 나는 수많은 결정을 ‘당연한 듯’ 말해야 했다.

"그건 성과 때문입니다."

"연봉 조정은 기준대로 했어요."

"이 기준에서 벗어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 기준이 사람 하나를 놓치고 있다는 걸 안다.

단지 수치에 들지 못했을 뿐인 사람.
과정은 훌륭했지만 결과만 부족했던 사람.
‘관찰되지 않은 노력’으로 버텨온 사람.

나는 그들을 회사에서는 놓치지만 퇴근 후에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지켜내지 못한 감정들을 적어도 글로라도 붙잡기 위해.


HR이 ‘사람’의 언어가 되기를 바라며

나는 인사담당자다.
채용을 기획하고, 평가제도를 검토하고, 보상표를 설계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역할은 조직 안에서 사람의 말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내가 회의실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 보고서 안에 다 담기지 않는 마음들을, 이 밤의 언어로 다시 꺼낸다.

퇴근 후 나는 다시 사람을 떠올린다.
그 이름을, 그 말투를, 그 한숨과 고개 끄덕임을 기억하며 내가 왜 이 일을 택했는지를 매일 되묻는다.

그리고 다시 다짐한다.
“HR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놓치지 않는 사람,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