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1971년 8월 15일 밤, 미국 전역의 TV 화면에 흑백 영상이 흘러나왔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달러를 더 이상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습니다.”
그 한 문장은 곧 세계의 눈금이 사라졌다는 선언이었다. 어제까지 금 1온스가 35달러였던 세상은 그날부터 기준을 잃었다. 달러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것을 지탱하던 금의 무게가 사라진 것이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붕괴했고, 세계는 새로운 기준을 찾아야 했다. 무역, 금융, 환율 모든 것이 흔들렸다.
그때, 또 다른 파동이 밀려왔다. 1973년, 중동전쟁과 아랍 산유국의 석유 금수 조치로 기름값이 순식간에 4배나 뛰어올랐다. 주유소마다 차량 행렬이 늘어서고, 공장 굴뚝이 멎고, 난방이 끊겼다. 석유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문명 자체의 스위치였다. 이제 세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석유에 어떤 통화의 가격표를 붙일 것인가?”
그 해답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나왔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조용히 악수를 나눈 것이다. 닉슨 행정부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중심에 있었고, 합의의 핵심은 간단했다. 사우디는 석유 가격과 결제를 달러로 하고, 미국은 사우디 왕정의 안보를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이 단순한 약속이 세계 경제의 질서를 뒤흔들었다. 사우디는 내부 군사력 확장 대신 미국의 보호를 선택하였다. 왕정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더 큰 것을 얻었다. 석유를 사는 모든 나라가 달러를 확보해야만 석유를 살 수 있는 구조 즉, 달러 수요의 강제 메커니즘을 손에 쥔 것이다. 이후 각국 중앙은행은 무역 결제를 위해 달러를 비축하여야 했고, 석유 수입국들은 달러 결제 시스템에 편입되었다. 달러는 다시 ‘세계의 기준’으로 복귀하였다. 달라진 것은 금이 아닌 에너지가 그 기반된 것일 뿐이다.
석유를 팔아 벌어들인 달러는 산유국의 중앙은행과 국부펀드에 쌓였다. 그런데 그 막대한 오일머니는 곧 미국 금융시장으로 되돌아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언제든 큰 금액을 사고팔 수 있고, 안정성과 유동성을 동시에 갖춘 자산으로 미국 국채가 가장 믿을 만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흐름이 바로 ‘페트로달러 리사이클(petrodollar recycle)’이었다. 석유 판매로 얻은 달러 → 국제은행(유로달러) 예치 → 미국채 매입 → 다시 세계 대출로 순환. 이 순환 매커니즘은 달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금융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이미 깔려 있던 ‘배관’, 즉 유로달러 시장(Eurodollar Market)이 있었다. 이름과 달리 유럽 통화와는 무관하다. 미국 밖, 특히 런던 등지에서 운영되는 미국 달러 예금·대출 시장을 뜻한다. 브레턴우즈가 무너지며 미국이 자본 통제를 완화하자, 달러는 국경 밖에서도 자유롭게 흘러다니기 시작하였다. 이 오프쇼어(Offshore) 금융 배관 덕분에 석유 달러는 막힘없이 세계 금융으로 순환하였고, 달러의 영향력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넓어졌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석유는 거대한 물이고, 달러는 수도꼭지이며, 유로달러 시장은 이미 깔려 있던 배관이었다. 수도꼭지를 트는 순간, 배관을 따라 달러가 금융의 도시로 퍼져 나갔다. 페트로달러 체계가 이렇게 빠르고 견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결국 세 가지 요인이 맞물렸다. ① 금이 사라진 뒤 생긴 기준의 공백, ② 사막의 악수로 대표되는 안보와 결제의 교환, ③ 이미 존재하던 유로달러 시장이라는 배관. 이 세가지 축이 ‘가격표-결제-자금흐름’을 달러로 고정시키며, 달러는 금보다 더 강한 통화가 되었다.
페트로달러의 탄생은 단순한 외교적 합의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행동과 관행, 그리고 금융 시스템의 관성에서 비롯된 ‘잠금 효과(lock-in)’였다. 한 번 고정된 구조는 스스로를 강화하였다. 석유를 사려면 달러가 필요하고, 달러를 유지하려면 미국 금융을 신뢰하여야 하며, 그 신뢰가 유지되는 한 세계는 달러를 버릴 수 없었다.
금본위 시대가 끝난 자리에, 석유라는 필수재와 달러라는 가격표, 그리고 유로달러라는 금융 배관이 결합하며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다. 브레턴우즈의 자가 부러진 자리에 에너지와 금융의 회로가 놓였고, 달러는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날 사막에서의 악수는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달러 패권의 2막을 연 첫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다른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석유를 타고 흐르던 달러가 이제는 금융 그 자체로 진화하며, 국경 밖에서 하나의 제국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다음 장인 달러패권 3장면은 유로달러 시장의 탄생과 달러가 국경 밖에서 제국이 된 이유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