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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S Pay와 탈달러화: 비달러 결제망의 실험

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by 이설아빠

세계 무역 지도에 생긴 새로운 균열


2020년대 중반, 세계 무역 지도 위에 또 하나의 균열이 그어지기 시작하였다. 중국·러시아·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구성된 BRICS가 그 중심에 서 있다. 한때 “개발도상국 협의체” 정도로 취급되던 이 그룹은 이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집트 등 자원 부국을 끌어들이며 자신들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달러로만 거래하지 않겠다.”


이 선언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SWIFT·IMF·세계은행 체계에 맞서, BRICS는 자체 결제망·개발은행·디지털 화폐 시스템을 만들려는 현실 실험을 시작하였다. 그 실험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 바로 BRICS Pay다.


이제 세계는 한 줄로 이어진 단일 금융 도로가 아니라, 여러 개의 평행한 도로가 나란히 깔리는 국면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길 끝에는 ‘다극화된 통화 질서(Multipolar Currency Order)’라는 낯선 풍경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 풍경은 과연 달러 패권의 종말을 의미할까, 아니면 단지 독점이 약해진 새로운 균형일까.


BRICS Pay와 포스트-달러화의 실체


BRICS Pay, ‘두 번째 결제망’의 실험

BRICS Pay는 2019년 러시아가 처음 제안한 공동 결제 플랫폼이다. 설계의 목표는 명확하다. 회원국 간 무역 대금을 달러 대신 각국 통화로 정산하고, 장기적으로는 공동 디지털 결제 단위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다. 즉, 각국 중앙은행의 실시간 결제망을 연동하고, 블록체인 기반 토큰을 활용하여 환전 비용과 송금 비용을 최소화하겠다는 구상이다.


2025년 현재, 러시아·중국·인도·브라질 일부 은행이 시범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사우디와 이란의 합류는 상징성이 크다. 왜냐하면 지난 반세기 동안 국제 원유 거래는 사실상 “석유 = 달러(Petrodollar)”라는 공식 위에서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산유국이 비달러 결제망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달러 중심 에너지 질서에 대한 첫 균열로 읽힌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가 극적이다. SWIFT 제재 이후 러시아는 무역 결제의 약 30%를 비달러 통화로 처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블·위안화 결제와 함께 BRICS Pay를 통해 일종의 ‘제재 회피형 무역망’을 실험하는 셈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도 높다. 국제 유가 결제의 85% 이상이 여전히 달러로 이뤄지고, BRICS Pay의 거래 규모는 SWIFT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추정된다. 지금 단계에서 BRICS Pay는 달러·SWIFT를 대체하는 메인 도로가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우회할 수 있는 보조 도로(secondary rail)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러 없이도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신호 효과는 작지 않다. 이 신호가 쌓이면, 언젠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새로운 네트워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중국·인도, 서로 다른 탈달러 계산법

겉으로 보면 BRICS는 하나의 커다란 블록처럼 보인다. 하지만 ‘탈달러화’를 바라보는 계산법은 국가마다 전혀 다르다.


먼저, 서방 제재 이후 러시아의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루블 결제와 위안화 연동을 늘리고, BRICS Pay 같은 대체망을 통해 제재를 우회할 수 있는 숨통을 만들고자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러시아 외환보유액의 약 40% 안팎이 위안화 자산으로 구성돼 있을 정도로, 달러·유로 비중을 급격하게 줄였다.


반면, 중국의 전략은 한층 더 장기적이다. CIPS(중국판 SWIFT)와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를 통해 위안화 사용 범위를 넓히면서도, 완전한 탈달러를 선언하지는 않는다. 미국 달러 체계와 공존(coexistence)하되, 위안화를 “제2의 선택지”로 키우는 전략에 가깝다. BRICS Pay는 이 위안화 전략의 확장판이자, 달러 독점을 견제하는 레버리지 역할을 한다.


인도는 루피 결제망을 확대하고, 일부 국가와는 루피-로컬 통화 직거래를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서방 금융시장 접근을 유지한다. 인도에게 비달러 결제는 ‘저항’이 아니라 ‘다변화(diversification)’에 가깝다. “달러를 버리겠다”가 아니라 “달러만 쓰지 않겠다”는 접근이다.


이 세 나라의 공통분모는 분명하다. 목표는 “달러를 없애기”가 아니라, “달러 의존도를 낮추고 선택지를 늘리기”인 것이다. 이것이 21세기형 탈달러화, 곧 ‘포스트-달러화(Post-Dollarization)’의 실제 얼굴이다. 달러를 밀어내는 혁명이 아니라, 달러의 독점을 서서히 희석시키는 재배치에 가깝다.


금융 네트워크의 관성: 왜 달러는 아직 중심인가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이렇게까지 비달러 실험이 진행되는데, 왜 달러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가?

국제기구 통계를 보면, 달러의 위치는 아직 견고하다. IMF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전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는 약 58.4%, 유로는 약 19.8%, 위안화는 약 3.9% 수준에 머물러 있다.


SWIFT 결제 통계를 봐도 달러 비중은 약 46%, 유로는 약 24%, 위안화는 약 4~5% 수준이다. 수치만 놓고 보면, 비달러 실험이 화려하게 회자되는 것에 비해 현실의 격차는 여전히 매우 크다.


이 격차를 만드는 힘은 단순히 환율 경쟁력이 아니다. 달러가 가진 것은 금융 네트워크의 관성이 다. 미국식 법치와 계약 집행 시스템, 회계·공시 기준, 국채·회사채를 포함한 깊고 넓은 채권·자본시장, 그리고 글로벌 은행과 운용사들이 쌓아온 수십 년의 신뢰 데이터 이 모든 것이 함께 엮여 하나의 “보이지 않는 플랫폼”을 이룬다. BRICS가 기술적으로 결제망 자체(CIPS, BRICS Pay 등)를 복제할 수는 있어도, 이러한 제도적 신뢰와 시장 인프라를 통째로 이식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그래서 오늘의 달러는 단순한 통화를 넘어,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운영체제(OS)에 가깝다. 스마트폰을 바꾸듯 한 번에 갈아탈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흔들리지만, 아직 대체되지 않은 달러

그럼에도 방향성은 분명하다. BRICS Pay, CIPS, 루피 결제, 원유 위안화 같은 비달러 실험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달러는 여전히 “공기와 같은 통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숨 쉬기 어렵다. 미국의 재정적자나 정치 리스크가 커졌어도, “대체재의 완성도”가 충분히 높아지기 전까지 달러의 자리는 쉽게 비지 않는다.


실제로 위안화는 자본 통제라는 구조적 한계, 루피는 국제 금융시장에서의 유동성 부족, BRICS 공동통화 구상은 회원국 간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조정 실패라는 벽에 막혀 있다. 결국 지금의 현실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달러는 패권을 잃지 않았다. 다만, 독점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을 뿐이다.


세계는 하나의 중심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던 시대에서, 여러 중심이 공존하는 다극화(Multipolarization)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의 통화 패권 경쟁은 더 이상 금 보유량이나 석유 매장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제 전쟁터는 데이터, 토큰, 결제망, 그리고 그 위에 쌓이는 신뢰다.


BRICS가 연 길 위에서, 여전히 보이는 달러의 그림자

BRICS는 분명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BRICS Pay는 그 길 위에 깔린 첫 번째 ‘두 번째 결제망’이다. 그 길이 지금은 좁고 울퉁불퉁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달러 외의 선택지”가 실체를 갖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세계 통화 질서는 이전과는 다른 궤도로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일 당장 달러 패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달러는 여전히 가장 깊고 넓은 금융 인프라와 제도적 신뢰를 등에 업고 있다. 탈달러화 흐름이 의미하는 것은 “왕의 퇴장”이 아니라, “왕 혼자만 있던 왕국에 다른 영주들이 등장하는 과정”에 가깝다.


앞으로의 통화 질서는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중심은 여전히 달러가 맡되, 위안화·유로·루피·디지털 통화들이 분야·지역별로 역할을 분담하고, 위기 때마다 BRICS Pay 같은 보조 결제망이 우회로를 제공하는 구조이다. 그리고 이 경쟁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21세기 통화 패권의 싸움은 돈의 모양이 아니라, 신뢰가 깔린 네트워크를 누가 장악하느냐의 싸움이다.”


BRICS는 그 네트워크 경쟁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이 달리는 길 위에는, 아직도 달러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제 세계는 그 그림자를 어떻게 활용하고, 얼마나 벗어나며, 어떤 새로운 질서를 설계할 것인가를 두고 또 한 번의 긴 실험에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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