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인, 정체가 뭐지?
사무실 한구석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킨 채 모니터를 바라보며 키보드를 치고 있는 노인, 한기석.
"30년 무역 경력"이라는 짧은 소개를 들었을 뿐, 도현은 아직 그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말이 없는 건 둘째 치고, 출근 첫날부터 스스로 뭘 하겠다는 적극성도 없었다. 물론 시키는 일은 묵묵히 잘 처리했지만, 그걸로는 그가 '진짜 무역 전문가'인지, 어떤 분인지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다.
'진짜 무역 전문가가 맞긴 한 걸까?'
도현은 책상에 앉아 은근슬쩍 기석을 힐끔 거렸다. 그러나 기석은 마치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히 뭔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이러다 우리 회사, 망하는 거 아니야...?"
도현은 중얼거리며 책상 아래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사무실 점심시간, 유리와 효진은 회의실 한편에서 조용히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도현은 책상에서 이메일을 확인하던 중, 두 사람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효진 씨, 혹시… 한기석 선생님이랑 같이 일 해봤어요?”
“아뇨. 말 걸어볼 틈도 없었어요. 항상 혼자 조용히 모니터만 보시던데요?”
유리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근데… 조금 무섭지 않아요? 뭔가 딱딱하고, 예전 우리 교무부장님 느낌이랄까. 말도 거의 안 하시고.”
“하하하 그러니까요. 요즘 시대에 그렇게 말 안 하고 조용한 분 드물잖아요. 딱 봐도 올드스쿨 느낌이던데요. 왠지 저희 일하는 방식을 마음에 안 들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도현은 살짝 웃으며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분, 사실... 무역회사 출신이라고 하던데요. 해외 무역만 30년 넘게 하신 베테랑.”
효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진짜요?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세요? 그리고 그렇다면 저희 회사 같은 조그만 곳에서 일할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음... 그러게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말은 별로 없는데, 가끔 한마디 할 때마다 되게 핵심만 찌르긴 해요.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은 그분, 신뢰하세요?”
도현은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근데 말이에요... 지금 우리한텐 누군가 진짜로 수출을 해본 사람이 필요해요. 나는, 우리가 처음 해외 진출을 준비하는 이때, 그분 같은 사람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효진은 도시락 뚜껑을 덮으며 작게 웃었다.
“뭔가 영화에 나오는 옛날 첩보원 같긴 해요. 조용한데, 뭔가 다 알고 있는 그런 느낌?”
“맞아요.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때 기석이 사무실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왔다.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기석은 여느 때처럼 아무 말 없이 믹스 커피를 타고 본인의 자리로 이동해서 앉았다. 도현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뭐지. 그냥 은퇴한 노인은 아닌 것 같은데.’
점심시간 이후, 갑자기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야, 김대표, 어디 있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투자자 백상무다. 도현은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섰다.
'왜 또 온 거야, 저 미친 x'
"아, 백상무님. 오, 오셨습니까."
"오긴 뭘 와. 한가해 보이네? 당장 매출 보고서나 가져와 봐!"
백상무는 사무실을 휘젓듯이 걸어 들어왔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마치 폭풍이라도 지난 것처럼 어수선했다. 도현은 황급히 매출 파일을 찾아 백상무에게 내밀었다. 백상무는 파일을 대충 넘기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매출이야? 장난해? 요즘 K-코스메틱, 한류 때문에 해외에서도 불티나게 팔린다던데! 김대표 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거금을 투자한 거, 이러려고 회사 반대에도 투자한 줄 알아?"
그의 목소리가 사무실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직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백상무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모니터만 바라봤다.
"대표면 대표답게 굴어야지! 사업하겠다는 사람이 계획도, 전략도 없이 감으로만 뛰냐?"
백상무는 책상을 쾅 내려쳤다. 그리고는 도현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6개월 안에 수출 실적 만들어 와."
"네... 네? 6개월 안에 수출 실적이요?"
도현은 얼어붙었다.
"한 건이라도 좋으니까, 수출 계약 따와. 못하면? 투자금 전부 회수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백상무는 마지막 경고처럼 말을 던지고는 사무실을 쿵쿵 울리며 나갔다. 도현은 입술을 깨물며 견뎠다. 남은 건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뿐이었다.
‘나는 대표고, 모두가 나만 쳐다보고 있는데... 정작 나는, 이 회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백상무가 사라진 뒤, 도현은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도현은 직원들이 모여있는 회의실 문을 열기 전, 손잡이를 붙든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기석을 채용했지만, 그가 정말 맞는 선택인지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도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석은 누구보다 먼저 회의실에 들어와 있었다. 도현, 기석, 회계 담당인 유리, 그리고 막내 직원이자 마케팅 담당인 효진이 한자리에 앉았다.
"다들 앉아주세요."
회의실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도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우리... 수출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6개월 안에 수출 실적을..."
직원들끼리 소곤거림이 일었다.
"수출이요?"
"지금 당장 우리 가요?"
"해외라니...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수출이라는 게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회의실 안은 금세 부정적인 분위기로 휩싸였다. 도현은 책상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같이 회의나 한번 해봅시다. 아무거나 좋으니 아이디어를 말씀해 보세요."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도현은 애써 웃으며 다시 말했다.
"편하게 이야기해도 됩니다. 뭐라도 떠오르는 거 없어요?"
그때, 막내 직원 효진이 손을 들었다.
"대표님, 저 K-POP이 유럽에서 인기 많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한국 화장품도 유럽에서 잘 팔리지 않을까요?"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유럽 시장, 괜찮겠네요."
하지만 유리가 손사래를 쳤다.
"근데 대표님, 우리 해외 수출 경험 전혀 없잖아요. 영어를 할 수 있는 직원도 없고요. 그리고 유럽은 가보지도 못했어요."
"수출하고 관련된 서류 준비 같은 것도 어떻게... 뭘 해야 하는지 모르고요."
"혹시라도 오더(주문) 들어오면, 물류는요? 통관 같은 거는요?"
순식간에 회의실은 부정의 도가니가 되었다.
'맞아... 우리, 아직 해외는 꿈도 못 꿔.'
도현도 마음 깊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회의실 한쪽 구석, 말없이 앉아 있던 기석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CPNP 인증 없으면, 유럽 수출은 꿈도 꾸지 마셔야 합니다."
짧지만 강렬한 한 마디에 모든 직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네...? CPNP요?"
"유럽에 화장품 수출하려면 CPNP 등록은 필수입니다."
기석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화장품이든 뭐든, 유럽 시장에 판매하려면 제품 안전성 인증을 받아야 합니다. 없으면 세관에서 통관 거부, 아니면 벌금 폭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도현은 얼떨떨했다.
"CPNP 인증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최소 조건입니다."
기석은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수출은 감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규정, 인증, 통관, 물류, 계약 조건 등 전부 하나하나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막연한 수출이라는 꿈이, 이제는 현실적인 장벽으로 다가왔다. 도현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왜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몰랐을까...'
기석은 다시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시장조사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시장조사요?"
"네. 무엇을, 어떤 나라에, 어떤 소비자에게 팔 수 있을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하죠?"
"간단합니다."
기석은 펜을 꺼내 화이트보드에 적었다.
1. 경제/사회/정치/기술 환경
2. 소비자/시장 규모/유통 구조
3. 경쟁사/경쟁 제품/대체재 분석
4. 수입 규제 및 인증 요건
5. 타깃 국가/시장 선정
"이것들부터 먼저 해봅시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막연함은 줄어들고 '해보자'는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도현은 화이트보드에 남은 글씨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장조사부터…"
생각보다 어려운 길이 될지도 모르지만, 도현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혼자서는 못 했지만, 함께라면 할 수 있다.'
도현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뷰티스타 코스메틱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해외 시장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사무실 창밖, 흐린 하늘 아래로 또다시 거센 빗줄기가 뿌려지고 있었다. 미정과 함께 걸었던 비 오는 캠퍼스의 오후가 떠올랐다. 그날 그녀는 도현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빠, 비 오는 날 같이 걷는 거 너무 좋아. 그냥, 지금처럼만 오래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도현은 고개를 떨궜다. '그냥, 지금처럼'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아프게 들리는 걸까. 오늘따라 유독 미정이가 더 생각났다.
'잘 지내고 있니, 미정아. 보고 싶다.'
이 상황에서 미정이가 생각나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도현은 사무실 한가운데 오랫동안 서 있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밤, 형광등의 미세한 윙윙거림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입구 근처의 책상 위, 노란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기석’이라고 적힌 작은 메모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도현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서류 몇 장과 함께 낡은 흑백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다. 모래바람이 이는 듯한 중동 사막에서 흰 케피예(keffiyeh)를 쓴 바이어와 악수를 나누는 남자의 모습. 어릴 적 TV 뉴스에서나 보던 장면처럼 느껴졌지만, 그 남자는 지금의 기석이었다. 아직 머리가 까맣고, 눈매가 지금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하지만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사진의 뒷면엔 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계약은 신뢰로부터 시작된다. 신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쌓인다.”
도현은 사진을 든 채로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사진 속 배경엔 낡은 천막과 사막용 화물 트럭이 있었고, 그 위로는 희미한 국기와 로고가 보였다. 희미한 글자 하나.
"AL WASEET TRADING - QATAR"
도현은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했다.
“알와시트 트레이딩, 카타르 소재 복합 무역회사. 90년대 아시아 화장품 및 전자제품 유통 1세대.”
그리고 거기, 작게 적힌 문장.
“한국 대기업 종합 무역상사와의 파트너십 경험 있음.”
‘이 사람이 진짜 무역을 하셨구나…’
도현은 봉투를 다시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기석의 책상 쪽으로 돌아봤다. 여전히 그 자리에 기석이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