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진출을 노려라!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조용히 메모를 하며 효진과 유리의 발표를 경청하고만 있던 기석이 입을 열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예리하게 빛났다.
"방글라데시와 몽골..."
모두의 시선이 기석에게 쏠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기석은 노트를 덮으며 동시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안해주신 방글라데시와 몽골, 두 나라 모두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시장입니다. 그러나 아직 남성용 프리미엄 화장품 시장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있긴 하지만 대부분 로컬 브랜드입니다. 그리고 가격은... 우리 제품의 1/10 수준입니다."
효진과 유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에 개의치 않은 듯 기석은 말을 이었다.
"아무리 한류 팬이 많아도, 소득 수준이 따라오지 않으면 안 팔립니다. 시장 크기는 커도, 소비 여력이 없습니다. 지금 진출하면 그냥 샘플만 뿌리고 끝날게 확실합니다."
효진은 약간은 억울한 듯, 두 손을 크게 펼치며 말했다.
"그래도 경쟁사가 하나도 없잖아요. 우리가 먼저 들어가면 선점할 수 있는 기회 아닌가요?"
기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표님, 그리고 효진 씨, 유리 씨. 시장을 선점하면 상당한 이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장 선점을 통하여 후발주자들에 대한 진입 장벽을 선제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장 선점을 위해서는 많은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건 대기업의 영역이지, 뷰티스타 같은 중소기업, 특히 스타트업에겐 상당한 부담입니다. 경쟁사가 없는 시장, 언뜻 보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반드시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단호했다.
"경쟁자가 없다는 건,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기석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설명했다.
"첫째, 그 시장에서 수요 자체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 시장에선 사람들이 그 제품을 원하지 않거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남성용 고급 화장품을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화장품을 쓰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거나, 기초 화장품조차 생소한 국가에서는 고객 스스로 그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즉, 그 시장에선 아무도 그 제품을 찾지 않기 때문에 ‘경쟁’조차 없는 겁니다.”
기석은 숨을 고른 다음, 나머지 이유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둘째, 시장의 규모가 작아 확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한 경우입니다. 초기엔 100개, 200개, 조금 팔릴 수 있어도, 몇 달 뒤면 시장이 포화되면서 주문이 끊기고 브랜드만 남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수익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다른 기업들이 진출을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쟁사가 없어 보여도, 그 시장의 유통 마진이 지나치게 높거나, 환율, 통관, 현지 파트너 문제 등으로 실질적인 이익이 거의 남지 않는 경우입니다. 또는 소비자 가격 저항이 너무 크기 때문에 고급 제품을 제값 받고 팔 수 없는 시장일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오히려 ‘진출을 안 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도현은 기석의 설명을 듣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즉, '경쟁이 없는 시장'은 기회가 아니라, 함정일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기석은 다시 조용히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회의실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효진은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떨구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했던 얼굴은 사라지고, 어딘가 억울한 듯한 표정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효진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메모장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단순히 인구수랑 성장성, 한류 인기만 믿고 덤비는 게 아니었어... 바이어들은 그런 감성적인 요소만을 보는 게 아니라, 냉정한 숫자와 구조를 본다는 거구나.’
효진은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자신이 애써 조사한 결과가 부정당한 것 같아 순간 속상했지만, 기석의 설명이 틀렸다는 걸 증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펜을 들어, 아까의 자료 옆에 작은 글씨로 메모를 추가했다.
‘소득 수준, 구매력, 유통 인프라 → 다음 조사 시 우선 체크 必.’
유리도 손을 모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책상 밑에 감춰진 두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몽골’이라는 시장도 기석의 말에 따르면 기대 만큼의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설픈 시장조사는 그냥 착각일 수 있겠구나. 경쟁자가 없다고 무조건 기회가 되는 건 아니었어...’
그녀는 노트를 천천히 넘기며 조용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시장 선점 = 비용 vs 수익 → 중소기업 기준에서 감당 가능한가?’
‘경쟁자 없는 시장 = 수요 부족 가능성 높음 → 소비자 수요 조사 필수’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어 기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노트를 펼치고 있었다. 유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네. 시장이란 게 생각보다 훨씬 복잡해.’
도현도 기석의 말을 곱씹었다.
'무조건 앞서 들어가는 게 능사가 아니구나... 저분, 진짜 무역 전문가 맞긴 하구나.'
도현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리더로써, 정리를 해야했다.
"좋습니다. 그럼 다시 처음부터 시장을 분석해보죠. 각자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서 공유해 주세요. 우리는 데이터로 판단합시다."
며칠 간의 집중적인 시장 조사 끝에, 뷰티스타 코스메틱의 전 직원은 주요 해외 시장에 대한 리포트를 만들어냈다. 동남아, 중동, 북미, 유럽까지. SNS 트렌드, 경제 지표, 경쟁 브랜드, 인증 제도까지 비교 분석한 자료들이 한 데 모였다. 그리고 회의실, 도현은 노트북을 펼치고 말했다.
"각국의 데이터를 비교한 결과, 유럽, 특히 독일과 프랑스가 가장 유망한 시장으로 나타났습니다."
기석이 고개를 들었다. 도현은 자료를 넘기며 설명을 이었다.
"유럽의 남성 화장품 시장은 20xx년 기준 약 110억 유로, 우리 돈으로 약 16조 원 규모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성장률인데, 유럽 시장은 5.3%의 꾸준한 성장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효진과 유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계속해서 분석한 데이터를 설명했다.
"독일은 실용주의, 품질 중심 소비 문화이며, 프랑스는 전통적인 향장 문화가 뿌리 깊지만, 동시에 자연주의, 친환경 브랜드에 대한 수요가 큽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K-뷰티에 대한 인식이 높고, 구매력이 뛰어납니다."
도현은 다음 장으로 슬라이드를 넘기며 독일 시장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설명했다.
"그중 독일은 남성 소비자의 약 42%가 민감성 피부를 가진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래서 저자극, 무향료, 비건 제품에 대한 선호가 특히 높아요. 우리 제품처럼 ‘자연 유래 원료 + 남성 피부 특화’ 콘셉트가 적합하합니다.”
다음 슬라이드를 넘기며 프랑스 시장을 가리켰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향장 산업이 강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최근 5년 사이에 바뀐 게 있어요.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 철학’이 있는 제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났습니다. 즉, 단순히 기능만이 아니라 ‘스토리’를 중시한다는 겁니다. Made in Korea, 그리고 ‘도시에 사는 남성을 위한’ 브랜드라는 콘셉트는 꽤 먹힐 수 있어요.”
효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럽은 한국 브랜드에 대한 호감도가 높고, 특히 클린 뷰티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저희 제품같이 천연 원료 기반이라면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유리도 말을 이었다.
"유럽 전체 남성 화장품 시장의 향후 성장률은 여성용 보다 높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요. 특히, 프랑스는 미용 산업의 전통 강국이지만, 최근 들어 남성 그루밍이라고 불리는 남성 미용관리 소비층이 급증하면서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다고 하네요. 특히, 30 ~ 40대 남성들 사이에서 스킨케어 루틴을 갖는 게 당연한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고 해요."
기석이 조용히 말을 보탰다.
"유럽은 기본적으로 인증 장벽이 높습니다. CPNP 등록, 제품 안전성 테스트, 라벨링 규정 등... 진입 자체가 쉽지 않지만, 일단 통과하면 브랜드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다른 국가로 수출하기에 좋은 레퍼런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레퍼런스라는게 어떤 의미인가요?"
기석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던 도현이 물었다.
"무역, 즉 글로벌 비즈니스는 보통 사람과 사람의 관계, 신뢰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나 선진국으로 수출이 되고, 유통 되고 있다는 의미는 그만큼 제품이 안전하고 믿을 수 있으며, 시장성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이어와 협상할 때, 다른 어느 나라에 현재 수출이 되고 있는지, 얼마나 팔리고 있는지 많이 물어봅니다."
기석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설명을 이었다.
"예를 들면, 예전에 한국의 한 중소 화장품 회사, 쉽게 말해서 A사라고 합시다. A사가 CPNP 인증을 받고 유럽에 진출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시장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였습니다.”
도현과 직원들이 기석의 말에 집중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럽 입점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중동과 남미 바이어들한테서 먼저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제품 성분이나 용도보다 먼저 나오는 말이 ‘유럽 통과 제품이 맞냐’였습니다. 그들에게 유럽 인증은 ‘이미 검증된 브랜드’라는 뜻이었습니다.”
기석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그 회사가 유럽에서 대박을 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한 줄, ‘유럽 등록 제품’, 그것 하나로 세계 다른 지역 시장에서 인지도를 높였고, 결과적으로 수출이 3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결국 유럽 시장은 소비 시장이기도 하지만, 브랜드 신뢰를 테스트할 수 있는 시장이기도 합니다.”
도현은 기석의 설명에 동의하며 중얼거렸다.
"진짜 브랜드로 성장하려면, 유럽부터 잡아야겠네요."
기석은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그 말, 마음에 듭니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습니다. 우리 유럽 시장 공략, 진짜로 시작해봅시다. 자료 정리하고, 다음 회의에서는 진출 전략 수립으로 넘어가죠."
회의가 끝나고, 도현은 회의실에 홀로 남았다. 화이트보드에는 수십 개의 국가명과 숫자, 화살표가 얽혀 있었다. 방금까지 열띤 토론이 이어졌던 자리였지만, 지금은 조용했다. 고요한 회의실 한복판에서, 도현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무심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유럽이라는 단어 아래 그어진 빨간 밑줄을 바라보았다. '프랑스, 독일, 인증, 성장률 5.3%' 손글씨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지만, 그 안에서 이상하게도 명료한 길이 보이는 듯했다.
‘이번엔… 정말로 해볼 수 있을지도 몰라.’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시장조사는 막연했고, 수출이란 단어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거대한 벽에 작은 균열 하나를 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문득 지우의 말이 떠올랐다.
“처음이 제일 어렵죠. 다들 그래요. 그래도 꾸준히 하면 됩니다.”
창밖에서 저녁 햇살이 회의실 책상 위에 길게 스며들었다. 도현은 조용히 창을 바라보다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첫걸음을 제대로 내디뎠다. 뷰티스타 코스메틱의 유럽 진출도, 그렇게 조심스레 시작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