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진짜 같은 연기, 연기 같은 진심
리무진 문이 열리고
오스카는 또 다른 역할로 진입한다.
그가 맡은 이번 배역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괴물도, 거지도, 피에로도 아닌, 그저 딸을 둔 아버지다.
그가 보인 표정은 다정하고 조심스럽다.
딸은 방금 전 클럽에서 돌아온 듯한 모습이다.
어색한 침묵 사이로 흘러나오는 대사는 익숙하다.
“재미있었어?”
“괜찮았어.”
극적 긴장 대신 흐르는 건 공감의 정서다.
이전 장면, 무슈 메르드는 혐오와 야수성의 화신이었다.
욕망과 배설의 은유로서 문명 그 자체를 조롱했다면,
이번 장면의 오스카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자상하고 현실적인, 어쩌면 우리 아버지 혹은 우리의 모습에 더 가깝다.
“넌 왜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않아?”
“그 애들은 나랑 너무 달라. 날 이해 못 해.”
이 짧은 대화는 청소년기의 고립감과,
그에 공감하려는 부모의 애씀을 담고 있다.
오스카는 조언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딸의 감정을 들어준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연기가 연기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역할’이다.
이 장면은 어쩌면 <홀리 모터스> 전체 중 가장 ‘진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토록 현실 같은 장면이 철저히 연기된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진짜란 무엇인가?”
“우리가 감정이라 부르는 것은 과연 본연의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시나리오에 길든 것인가?”
레오 카락스는 이 장면에서 한 박자 숨을 고른다.
그리고 관객에게 감정의 잔상을 안겨준다.
무슈 메르드의 광기를 목격한 직후,
우리는 이처럼 평범한 감정에 더 깊이 젖어든다.
카락스는 여기서 연기의 본질,
그리고 인간성의 양가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이 장면은 그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감정의 회상일지도 모른다.
그에겐 실제로 외동딸(나스탸)이 있으며,
이 장면은 딸과의 관계에서 느낀 거리감과 죄책감을 투영한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예술가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그가 삶의 일면을 연기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한 순간.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진짜’를 갈망했던 흔적이 이 장면에 서려 있다.
‘서사 없는 서사’, ‘배경 없는 정서’.
<홀리 모터스>는 우리에게
가장 인간적인 연기도 결국 연기일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연기 안에서 우리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고,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연극의 방식 아닐까.
오스카는 이번엔 알렉스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는 테오 앞에 선다.
짧은 말이 흘러나온다.
"너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마. 그건 변명이야."
그리고,
칼이 휘둘린다.
테오는 쓰러진다. 피가 번지고, 방은 정적에 잠긴다.
알렉스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외형을 바꾸기 시작한다.
죽은 이를 자기처럼 만든다. 머리를 빗고, 옷을 벗기고, 하나씩 자신과 닮게 한다.
죽음을 통해, 그는 ‘벌’이라는 이름의 미학을 완성하려 한다.
그러나
누워 있던 테오가 칼을 든 채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그를 찌른다.
둘은 피 흘리며 나란히 쓰러진다.
모습은 완전히 같다.
누가 누구인지, 이제는 알 수 없다.
이 장면은 하나의 의식이다.
죄를 심판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자는 결국,
자신이 심판하고자 했던 그 얼굴을 닮아간다.
처벌은 결국, 닮아감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끝엔, 분리 불가능한 정체성의 파편만이 남는다.
하지만 오스카는 죽지 않는다.
칼에 찔렸음에도
그는 피를 흘린 채 리무진으로 돌아간다.
비틀거리는 걸음, 그러나 결국 무대 뒤편으로 걸어 나가는 배우처럼.
그리곤 다시, 멀쩡한 얼굴로 앉아 있다.
마치 그런 일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고통도, 심판도—
그저 또 하나의 장면이었을 뿐.
이 장면은 마치 거울 속 서로를 찌르는 두 존재 같다.
결국 거울은 깨지고, 파편만이 남는다.
누가 누구였는지,
어떤 감정이 진짜였는지—
우리는 끝까지 알 수 없다.
레오 카락스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가,
하나의 존재로 되돌아가는 그 순간을.
다음 화에서는
자아의 파괴와 연기의 부정,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춰진
레오 카락스 자신의 고백을 함께 들여다본다.
표지이미지 출처: 영화 『홀리 모터스』 공식 포스터
배급: Wild Bunch / 국내 수입사 인터그림
사용 목적: 비평 및 리뷰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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