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햇빛 아래의 장례식, 혹은 탄생”
※ 이 글은 영화를 본 분들,
혹은 영화는 보지 않더라도 그 감정의 결을 느껴보고 싶은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줄거리와 장면에 대한 해석이 포함되어 있으니, 감상 전엔 살짝 주의해주세요.
우리는 다시, 꿈을 걷는다.
이번 여정은 어둠이 아닌,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한 빛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빛 속에는 잔혹한 침묵이 흐르고, 그 침묵은 어느 순간 폭발한다.
슬픔과 상실, 고통과 파괴는 이 세계에서 꽃으로 장식되고, 축제로 포장된다.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는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깊이를 해부하는 잔혹극이며,
또한 집단의 리추얼 속에서 감정이 어떻게 소멸되고 대체되는지를 추적하는 실험이다.
그 기괴함과 잔인함, 그리고 정서적 잔상은
관객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어떤 이는 도저히 끝까지 볼 수 없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이 영화를 두고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공포”라 말한다.
<미드소마>는 호불호를 넘어서—이해와 거부 사이의 감정 자체를 실험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만큼, 이 영화는 강력한 팬덤과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이끌어냈다.
그것은 취향이기 이전에, 체험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체험 속으로 들어간다.
고통을 말하지 못한 자, 사랑을 끝내 지키지 못한 자,
그리고 공동체의 미소 속에서 서서히 사라진 자의 이야기.
태양은 지지 않고, 감정은 타버리고—
남은 것은 해방인지, 파멸인지.
21세기 이후 공포영화는 급속히 분화되었다.
B급 슬래셔와 점프 스케어는 줄어들고, 심리적 불쾌감과 감정적 파열이 그 자리를 채워갔다.
그중에서도 아리 애스터는 “무섭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불안하게 만드는 법”을 아는 몇 안 되는 감독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가정 내 비극’을 연극처럼 구성해 단편을 만들었고,
2011년 발표한 단편 <The Strange Thing About the Johnsons>부터
그는 이미 가족·비밀·심리적 붕괴라는 세 가지 축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아리 애스터는 공포를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는 “가장 무서운 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부모의 죽음, 연인의 배신, 무너지는 가족.
그는 늘 말한다.
“나는 공포를 찍는 게 아니라, 감정을 찍는다.”
2018년, 아리 애스터의 장편 데뷔작 <유전>는 호평 속에 등장했다.
토니 콜렛의 열연, 가정 비극과 오컬트의 결합, 정적이면서 불쾌한 분위기.
모든 요소는 성공적인 듯 보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히 어딘가 불균질 했다.
상징은 과도했고, 장치는 지나치게 설명적이었으며, 연출의 톤은 흔들렸다.
마치 감정을 재현하려는 욕망과 오컬트 공포의 공식성 사이에서
무언가 완전히 정돈되지 않은 채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악마를 등장시키는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애스터가 말하고자 한 감정의 흐름이,
여전히 ‘공포 장르의 틀’ 안에 구속된 채 튀어나왔다가 가라앉는 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감정은 장면마다 새로 시작됐고,
관객은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다음 장치로 이동했다.
결국 <유전>은 훌륭한 인장이지만,
그가 진짜로 하고 싶던 말—“슬픔 이후의 인간”—을
완성하지 못한 최초의 스케치에 가까웠다.
그 미완의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
1년 뒤, <미드소마>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
<미드소마>는 <유전>에서처럼
상징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상징이 되도록 구성된 영화다.
감정은 공간 속에 녹아들고, 상징은 연출과 인물의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불협은 없다. 억지는 없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하나의 감정 구조물이다.
고통은 시각적 이미지가 되고,
상실은 의례로 변환되며,
슬픔은 공동체의 소음 속으로 녹아든다.
이 영화에서는 감정이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는 방식 그 자체가 연출의 중심이다.
<유전>이 슬픔을 떠올리는 영화였다면,
<미드소마>는 슬픔을 구조로 삼아 작동하는 건축물이다.
표지:<미드소마>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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