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운의 시네마틱 레버리 [미드소마(3)]

에덴의 얼굴을 한 의식의 서막

by 서도운

3장. 에덴의 얼굴을 한 의식의 서막

호르가 마을은 첫인상부터 마치 고대의 신들이 숨겨둔 낙원 같다. 파란 하늘, 초록으로 물든 들판,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피리를 불고 웃으며 걷는다. 그곳에는 고통도, 분노도,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환상이 펼쳐진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그리워했던 유토피아, 아니, 성경 속 에덴동산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싶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그 완벽함은 너무 의도적이다. 거대한 규모의 목조 건축물들이 숲 한가운데 자리한 것부터가 이상하다.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기보다, 자연 위에 비틀린 질서를 세운 것처럼 보인다. 소수 부족이라기엔 그들의 세계는 이미 지나치게 체계적이며, "자연주의"라는 명목 아래 인간적인 우연성과 이질감을 철저히 배제한다. 꽃잎과 웃음 뒤에 감춰진 건 규율, 통제, 그리고 예정된 의식이다.

마크는 끊임없이 담배를 피운다. 그 행위 자체가 호르가 마을의 풍경을 자꾸만 어긋나게 한다. 그는 자연과 연결되기를 거부하고, 이질적인 도시인의 냄새를 끝끝내 남기며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호하!”

소녀가 밖을 나가기 전 의식의 준비인 듯 이상한 숨소리를 낸다. 그밖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외치며 기괴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의 소리는 어딘가 동물적이고 원초적이다. 청각적 자극이 반복될수록, 이곳이 단순한 공동체가 아니라 의식의 공간임을 눈치채게 된다.

그날 대니는 펠레에게서 생일을 축하받는다. 정작 남자친구인 크리스티안은 그 사실조차 몰랐지만 의례적인 생일 축하 의식인 케이크와 초로 대충 마무리한다. 하지만 대니는 이런 형식은 의미가 없다는 듯

"하호!" 숨을 내뱉으며 생일 의식의 초를 꺼버린다.

감정의 균열은 그런 사소한 곳에서 시작된다. 펠레는 다정한 말과 따뜻한 그림을 건네며 대니의 빈틈으로 들어온다. 한편으로 대니가 자기도 모르게 무너져가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들은 인생을 계절로 나눈다.

0~18세는 봄이라 이야기하며 마을에서 공동육아를 한다.


18~36세는 여름이라 불리며 순례를 떠난다.

(펠레와 잉마르가 이 시기인 듯하다.)


36~54세는 가을이라 불리며 실질적인 마을의 중심이 되며 마을을 운영해 나가는 역할이다. (실제로 가을에 수확되는 작물 과일이 많다)


54~72살 동안은 상징적 존재로 그저 남아있는다.


72세가 되면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자연의 질서"로써 생을 마감한다.


즉 하나의 계절당 18세로 나뉜다.


호르 가는 말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 거스를 수 없다고.


그러나 그것은 한 편으론 인간다움의 포기이며,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감정을 압살 하는 폭력이다.


그 모든 것을 상징하듯, 노란 피라미드 구조물 그리고 갇혀있는 곰 한 마리. 자연의 일부라면 자연 속에 있어야 할 곰이, 정작 이곳에서는 우리의 공포와 맞바꾼 희생물이 된다. 꽃과 곰, 피라미드와 룬. 이 마을의 언어는 언제나 상징으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또 한 장의 그림. 어린 소녀가 남자에게 사랑을 전하는 이야기. 베개 밑에 둔 꽃, 생리혈과 체모가 섞인 음식, 그 뒤에 남자와 소녀의 사랑과 임신. 이 그림은 의식이 아닌 일상이고, 일상이 의식이 되는 사회다.


사랑이 아니라 임신을 위한 작법, 욕망이 아니라 의무로서의 감정. 모든 감정은 도구가 되었고, 모든 관계는 순환을 위한 장치다. 우리는 인간의 가장 따뜻한 본능마저 재단된 세계 안에서 보게 된다.


그날밤, 룬 문자가 아기 베개 아래 놓인다. 갓난아기는 엄마의 품이 아닌 공동체의 소유다. 울음은 멈추지 않고, 누구도 그 감정에 응답하지 않는다. 아이와 엄마는 단절되어 있고, 그 단절은 “기형적 가족”이라는 말로 밖엔 표현할 수 없다. 호르가의 육아는 공동체적이지만, 정서적 애착이 삭제된 육아다.


첫날밤이 저문다.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고, 꽃은 만개한 채 흔들린다. 그러나 관객은 이미 느낀다. 이 낙원이 단 한 번의 외침으로 지옥이 될 수 있다는 걸.

“호하!”는 축제의 시작이 아니라, 지극히 인공적인 자연을 표방하는 의식의 시작이다.




4장. 순환이라는 이름의 폭력


아침 햇살은 무심히 들판을 비추고, 피리 소리는 멎었다.

사람들은 허밍처럼 낮은 소리를 흘리며 언덕 위에 모여든다.

불길하리만치 조용한 의식의 시작.

호르가의 사람들은 늘 순행을 강조했지만,

이번에는 누군가가 뒤로 걷는다.

의식에 초대된 외부인들은 알 수 없는 불편함에 휩싸인다.

자연은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되고, 반복되며, 순환된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이라도 하듯.


노란색 피라미드 건축물을 배경으로

두 명의 노인이 사람들 사이를 가른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마치 성직자처럼

주문을 외우고, “호하!”라는 외침으로 의식의 시작을 알린다.


그 모습은 처음엔 전통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흰 옷, 금빛 장식, 룬이 새겨진 바위 앞에 선 노인들.

그들은 자신의 손을 찔러 피를 흘리고,

그 피로 룬문자를 그 바위 위에 남긴다.

신성한 경전처럼 여겨지는 의례.

그러나 노인의 눈에는 분명히 보인다.

신을 향한 경외가 아니라,

다가올 죽음에 대한 맹렬한 공포.


그리고,

한 사람씩 절벽 끝으로 올라선다.

새하얀 하늘과 거대한 바위는,

영화적 구성이라면 신성함을 부여할 법한 풍경이지만—

노인의 몸은 카메라의 움직임 없이,

음악도 없이, 툭, 떨어진다.

머리가 산산조각이 나고,

정적은 짧은 비명과 함께 깨어진다.


한 사람은 곧바로 죽지 못한다.

그가 짓는 일그러진 고통의 표정은,

이 ‘순환’이 결코 평온하거나 숭고한 죽음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든 호르가인들이 동시에 고통에 찬 울음을 낸다.

그들은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가 고통을 공유하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반응한다.

이건 연민이 아니라

감정의 명령,

그들 내부에 내장된 의식의 코드다.

곧 거대한 망치가 내려치고,

남은 생의 찌꺼기를 제거하듯

노인의 삶은 완전히 정리된다.


충격을 받은 잉마르의 친구들은

당장이라도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이고,

동의 없이 이뤄진 공포였다.

그러나 한 여인은 차분하게 말한다.


"제 차례가 오면, 저도 기쁘게 받아들일 거예요."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순환의 일부이며,

노인이 죽으면 새로운 아기가 그의 이름을 물려받는다고 한다.

숫자를 유지하고, 계절을 순환시키며,

하나의 체계를 영속시킨다는 것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겨울이 끝나면 다시 봄이 오는 법이라고.

자연의 원리라며 그들은 웃는다.


그러나 관객은 묻는다.

우리는 인간이지 자연이 아니다.

자유의지, 삶의 선택, 자기실현.

그 모든 인간다움은 이 마을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계절은 시간의 은유가 아니라,

폭력의 변명으로 사용된다.


크리스티안은 여전히 논문에만 집착하고,

마크는 그 충격적인 장면을 보지도 못했다.

대니는 혼자 붕괴된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

공감받지 못하는 고통,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펠레의 눈빛.


펠레는 조용히 그녀를 위로한다.

“나도 가족을 잃었어요. 하지만 이곳에선,

모두가 가족이에요.”

그는 마치 정확히 대니가 듣고 싶었던 말을 준비한 듯 말한다.

대니의 눈은 떨린다.

그는 이제 단순한 친절한 호스트가 아니다.

그녀의 정신 속 깊은 균열에 파고드는 사람,

고통의 공명을 흉내 내는 설득 자다.


의식이 끝난 뒤,

절벽 아래에 두 노인의 시신은 태워진다.

연기 속에서 꽃이 피고,

죽음은 마치 시작처럼 연출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안다.

그 모든 장면이

순환이라는 이름 아래 포장된 살해의 의식이라는 걸.


표지: <미드소마>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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