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 길이 아니야
곰돌이 ep.2
"니혼고가 스키데스"
대학 신입생 시절, 나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런 척했다. 사실 난 그때 라면에 들어간 반숙 계란 정도로만 일본에 관심이 있었다. 적성? 그건 수시로 변하는 내 기분보다도 더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렇게 나는 일본어 전공생이 되었다. 대학 생활은 마치 자막 없는 애니메이션 같았다. 분명히 말은 하는 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어쩌다 아는 단어 나오면 "오!" 하고 혼자 감동했고, 시험땐 '일본어'보다 '암기력'과 싸워야 했다. 첨부터 나의 영역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들어간 등록금과 세월이라는 기회비용에 매몰되어 전과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내 길이 아니야......."
(그렇다고 다른 길이 어딘지도 몰랐지만)
졸업 후에도 일본어는 내 삶의 일부가 되지 못했고, 결혼 후엔 일상이라는 이름의 회전목마에 올라타 정신없이 돌고 또 돌았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뭘까?
그때 마주친 게 동네 문화센터 유화강좌였다.
"그림이라도 그려볼까?
시작은 그저 그런 호기심이었다. 학창 시절에 그림에 대한 관심이 없진 않았지만 집안 형편상 그쪽으론 눈길조차 두지 않았다.
"이제 해도 되지 않을까?
밥 짓고 청소하고, 누군가의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딸로 사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나'라는 사람을 잠시라도 마주하고 싶었다.
그림은 내게 새로운 언어였다.
생각보다 어렵고,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꽃도 그려보고, 인물화도 시도해 보고, 추상도 흉내 내봤지만 뭔가 마음속에 이거다 싶은 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쁜 곰인형 한 마리를 그리게 되었다. 그 동글동글하고 엉뚱한 표정의 곰인형 한 마리가 화폭에 담겼는데, 단순하면서도 감정을 담은 그 존재가, 말없이도 이야기를 건네주는 친구 같은 그 존재가, 나의 인생을 바꾸게 될 줄이야....
그때부터였다.
곰돌이는 나의 주제가 되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그 속에 점점 나의 감정이 스며들었다.
외로운 날엔 눈동자가 촉촉했고, 행복한 날엔 볼이 빨개졌고, 지친 날엔 털이 쓱 헝클어졌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왜 하필 곰돌이예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곰돌이는 제 마음의 자화상이거든요. 날마다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 살아가는, 말없이 버텨내는 나"
일본어 전공? 지금은 '아리가또' 외에는 쓸 일이 없다. 대신 물감 튜브를 짜고, 곰돌이의 눈동자를 그릴 때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림은 서툴고, 곰돌이들은 매번 이상한 방향을 바라보지만, 그래도 그 속엔 지금의 나, 이제야 제 길을 살짝 찾아가는 내가 담겨있다.
전공은 결국 삶의 일부였지만, 그림은 삶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오늘의 감정을 곰돌이 한 마리에 담아, 캔버스 위에 조용히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