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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노트] 엉망인 첫 문장을 쓰는 용기

시작의 목적은 도착이 아니라, 길을 알기 위함이다

by 낙원
곽진언 – 응원: 완벽하지 않은 첫 시작을 응원하는 따뜻한 위로, 엉망이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그런 밤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시작하지 못하는 밤.
하얀 모니터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는, 써야 한다는 조바심에 맞춰 뛰어대는 내 심장박동 소리 같았다.
무언가 대단한 문장으로 이 밤을 열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길을 잃고,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만 갔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완벽한 첫걸음을 떼지 못해 영영 출발선에 머문다.

초등학생 무렵이었을까, 처음으로 동생에게 짜파게티를 끓여주겠다며 호기롭게 나선 날이 있었다. 봉지 뒷면의 조리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물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의 첫 짜파게티는, 예상대로 멀건 국물이 흥건한 '한강 라면'이 되어버렸다.
동생은 한 젓가락 맛보더니 말없이 자리를 떴고, 나는 홀로 남아 꾸역꾸역 그 밍밍한 면을 삼켰다.
아까워서라기보다, 나의 첫 실패를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는 어린 마음의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 나는 요리에 재능이 없나 보다.' 어쩌면 그것이 내 삶의 '첫 번째 실패'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집에서 육류 요리는 나의 허락 없이는 시작되지 않는다.
가족들은 내가 해주는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며,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으레 나의 갈비찜을 기다린다.
짜파게티 물도 맞추지 못하던 아이는, 이제 수비드 기계쯤은 능숙하게 다루는 어른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첫 실패는 두 번째 도전을 위한 가장 정확한 내비게이션이었다.
한강이 되었던 그 짜파게티는 '실패작'이 아니라, '물을 버려야 한다는 첫 번째 교훈'을 새겨준 고마운 지도였던 셈이다.

우리가 첫 시도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첫 삽에 보물을 파내려는 헛된 기대 때문일지도 모른다.
첫 문장은 당연히 어색하고, 첫 그림은 당연히 삐뚤빼뚤하며, 첫 노래는 당연히 음정이 틀린다.

그것은 시작이다.

시작의 진짜 목적은 단번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서툰 걸음 속에서 내가 가야 할 방향과 다음 걸음의 보폭을 가늠하는 데 있다.

얼마 전 깨달았듯, 진짜 재능은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그날의 밍밍한 짜파게티가 오늘 근사한 갈비찜의 시작이었듯, 오늘의 엉망인 첫 문장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만두지 않기 위해선, 먼저 엉망으로라도 시작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도 나는 하얀 모니터 앞에서 망설인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나의 문장이 과연 가치가 있을지 의심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일단 쓰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기 위해, 그냥 시작해보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첫 문장을 쓴다.
엉망일지 몰라도, 일단 시작한다.
모든 이야기는 그렇게 태어나니까.

오늘도, 천천히 이어가는 삶의 낙원에서.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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