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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노트] 노력의 배신 앞에서

그럼에도, 다시 키보드를 잡는 이유

by 낙원
혁오(HYUKOH) - TOMBOY: 잘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나이테는 자라고 있음을 믿으며

새벽 3시, 모니터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삭제' 버튼을 눌렀다.
11시간 동안 써내려간 13,256자가 0.1초 만에 사라진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던 그 말이, 빈 문서 위에서 조용히 무너져 내린다.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깊은 우울에 잠겨 있었다.
때로는 최선이 최악의 결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나는 결국 1인분을 해낼 수 없는 사람인가?' 하는 좌절감이 검은 파도처럼 나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 끝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죽을 거야?"

아니었다. 그건 아니었다.

조회수 47. 댓글 0개.
어제 올린 소설 5화가 차가운 숫자로 나를 맞이한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적막한 방을 채운다.
한 달째, 이런 밤을 보내고 있다.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내가 믿을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
하지만 평생을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처음으로 '이거라면 잘할 수도 있겠다'는 희미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 그게 글쓰기였다.

브런치에서 독자들의 응원을 받으며, 나는 내 안의 작은 불씨를 보았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내가 노력에게 보상을 약속해달라고 매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노력은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을, 어제와는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줄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나로 살고 싶지 않다.

하는 것과 안 하는 것.
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
결과에? 아니면...

하면 해봤다는 무언가가 남는다.
안 하면 그저 오늘이 어제와 똑같을 뿐이다.
똑같은 절망 속에서 하루를 더 살아갈 뿐이다.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고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언젠가 멋진 판타지 소설을 써 내리라 꿈꾸며.
내가 원하는 삶,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삶을 위해.

오늘도 나는 빈 문서 앞에 앉는다.
커서가 깜빡인다.
배신당할 줄 알면서도, 다시 첫 문장을 쓴다.

노력이 배신하는 세상이라면,
배신당할 각오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배신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천천히 이어가는 삶의 낙원에서.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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