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문장이 되어
고요한 밤, 등 뒤로 나직이 들려오는 인기척.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따뜻한 찻잔이 조심스럽게 책상 한쪽에 놓이는 소리.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가만히 감싸고 나가는 손길.
나는 그 온기 속에서 오늘의 첫 문장을 얻는다.
한때는 모든 것이 나 혼자의 싸움이라 믿었다.
텅 빈 방, 하얀 모니터,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던 그 막막한 고독의 시간들.
수없이 많은 글자를 지우고 또 쓰던 밤, 나는 나에게 수없이 물었다.
‘나는 왜 이토록 부족한가.’
그때, 곁에서 조용히 내 글을 읽던 연인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뭘 하든 믿어. 하지만 글을 쓸 때의 당신이 가장 당신다워서 좋아.”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견디는 나의 모습이었다.
성공이나 실패로 규정되지 않는 나라는 존재 그 자체를 향한 믿음.
그 말 한마디가, 무수한 자기 의심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붙들어주는 등대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내 삶의 모든 변곡점에는 그렇게, 나의 가능성을 나보다 먼저 알아봐 준 나의 첫 독자들이 있었다.
아무도 완성본을 보지 못했을 때, 심지어 나조차 내 이야기를 의심할 때, 그들은 기꺼이 나의 엉성한 초고를 읽고 따뜻한 눈빛으로 다음을 기다려주었다.
그들의 존재는 단순한 응원을 넘어, 나의 이야기가 가닿아야 할 세상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로, 수없이 포기하고 싶던 밤들을 건너왔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 독자일지 모른다.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을, 서투른 첫걸음을, 흔들리는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봐 주는 존재.
창작이란 고독한 어둠 속에서 홀로 벼려내는 칼이 아니라, 누군가 밝혀준 작은 촛불 아래서 조심스럽게 이어가는 편지 같은 것임을 이제는 안다.
그 편지를 쓸 힘은 내 안의 재능이 아니라, 내 밖의 당신에게서 온다.
나는 당신이 있어 쓴다.
나의 첫 독자가 되어준 당신에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기꺼이 믿어준 나의 사람들에게, 다음 문장을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 하나로 나는 다시, 나의 낙원을 이어간다.
오늘도, 천천히 이어가는 삶의 낙원에서.
#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