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을 용기

사노 요코의 태어난 아이

by 주아유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배고픔도, 아픔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합니다. 그러던 중, 아이는 한 여자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여자아이가 개에게 물려 엉엉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자, 엄마는 아이의 상처를 씻고 반창고를 붙여줍니다. 태어난 아이는 이때 처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반창고를 붙이고 싶다는 이유로 아이는 태어나기로 결심합니다. 아이는 진짜 삶을 경험합니다. 배고픔을 느끼고 모기에 물리면 가렵고, 물고기를 잡으며 즐거움을 맛봅니다. 아프면 울고 엄마에게 달려가 반창고를 붙여달라고 떼쓰기도 하고 피곤하면 졸음이 쏟아지는 경험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타인과의 관계를 인식합니다.


태어났으므로 아이는 모든 감각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태어난다는 건 단순히 행복한 일들만을 맞이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배고픔을 느끼고 애정을 갈구하고 질투도 하고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숱하게 경험하게 되겠지요. 허나 아이는 그 모든 것을 느끼기로 결심합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것, 그런 삶이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 순간을 충실하게 느끼며 지낼 때에 맛보는 피곤함. "산다는 건 피곤한 일이야"라고 혼잣말하며 잠드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걱정과 생각들에 사로잡혀 내가 무엇을 느끼고 원하는지는 잊어버리고 맙니다. 지금 내게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도 봄냄새나는 바람도 바쁜 일상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냅니다. 억눌린 내 욕구는 몸이 알아채고 자꾸만 신호를 보냅니다. 어깨는 뻐근하고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도 부글대며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기도 합니다. 지금 니 마음을 한번 살펴보라고 보내는 신호를 약으로 달랩니다. 지금 이 순간 무언가 열심히는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음이 헛헛합니다.


'나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도 꺼려집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계속 생채기가 날 때도 있어, 온전히 마음을 터놓고 누군가와 진정으로 연결된다는 건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혼자인 것 같은 마음, 고립된 것 같은 마음을 채우려 쇼핑도 하고 SNS도 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타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도 태어났으나 태어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넘어져서 상처가 났을 때 반창고를 붙여줘야 하는데 피가 난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아픈 것도 익숙해지니 무감각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마음에 굳은살이 생겨납니다. 굳은살이 생기기도 전에 보호막을 여러 겹 두르기도 합니다.


아이가 부럽기도 합니다. 상처가 나면 반창고를 붙여줄 엄마가 있으니까요. 내가 더 큰 반창고를 붙였다고 눈치 보지 않고 으스대기도 하니까요. 태어나지 않았을 때부터 옆을 지켜준 강아지가 있으니까요. 삶은 상처가 날 일 투성이지만 그래도 서로 안아줄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계와 연결되고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상처와 치유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고 매 순간을 오롯이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그림책을 보며 하게 됩니다.





사노 요코의 생애와 작품

그녀는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9살 때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쟁과 가난을 겪으며 사랑하던 오빠와, 자신이 키우다시피 한 남동생이 죽게 됩니다. 오빠가 죽고 난 뒤 엄마는 그녀를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매정하게 굽니다. 폭언을 하거나 일을 시키고 성에 차지 않으면 때리기도 하지요. 이런 유년기를 보내며 엄마를 지독하게 싫어하기도 하며 그런 자신을 자책하기도 합니다.

33세에 작가로 데뷔한 이후 그림책, 수필을 포함해 총 173권의 저서를 남기고 2010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엄마와의 갈등과 치유의 과정을 담은 '시즈코상', 암투병을 하며 쓴 에세이 '죽는 게 뭐라고'등을 쓰며 일본 문학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전쟁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겪었던 그녀의 경험이 작품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초반부 아이가 보이는 세계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아픔과 배고픔을 모르는 상태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느꼈던 정서적 마비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태어나지 않은 아이옆을 졸졸 쫓아다니는 강아지는 작가를,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오빠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릴 적부터 약하게 태어나 병으로 고통스럽게 죽었던 오빠 옆에 함께하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투영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림책 속에서라도 함께해주고 싶었던 마음이 드러난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시큰해집니다. 아이를 다정하게 안아주고 커다란 반창고를 붙여주는 엄마가 작가의 유년시절에도 있었다면 좋았겠다고, 이렇게 작품을 쓰면서 조금씩 치유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슈탈트 심리학으로 본 작품 분석

1. 미완성된 형태의 충족

게슈탈트 이론은 '미해결 과제가 행동을 주도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작품 속 아이는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불완전한 존재로 머물러 있지만, 여자아이와 엄마와의 상호작용(반창고 붙이기)을 목격하며 관계에 대한 욕구를 인식합니다. 미해결 과제를 충족시킴으로 충족된 욕구는 배경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욕구가 전경으로 떠오르면서 현재에 집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미해결 된 경험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를 '고정된 게슈탈트' 또는 '반복회귀 게슈탈트'라고 부릅니다. 그 경험이 완결될 때까지 미해결 된 게슈탈트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장을 조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림책 속 아이는 '상처치유'라는 구체적 욕구를 통해 미완성된 자기 존재를 해소하려 합니다.


2. 현재 경험의 중시

게슈탈트 치료는 지금, 여기의 경험을 강조합니다. 아이는 태어난 후 비로소 "배고픔, 아픔, 웃음"을 체험하며 현재의 감각에 집중합니다. 이는 사노 요코가 암 투병 중 일상의 소소한 순간, 딸기를 먹거나 손글씨 쓰기와 같은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태도와 유사합니다. 작품은 완벽한 행복이 아닌 진짜로 느끼는 것을 삶의 본질로 재정의합니다.


3. 대상관계의 형성

아이는 태어나기 전까지 세게와의 분리감을 유지합니다. 게슈탈트의 '접촉 경계' 개념에 따르면, 건강한 정신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합니다. 아이가 엄마의 반창고 붙이기를 관찰하며 타인과의 연결 욕구를 깨닫는 장면은, 인간이 관계를 통해 자아를 확장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사노 요코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을 받을지언정 순간을 생생하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의미있는 관계를 맺고 서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상처받을 용기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라는 메시지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효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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